헌터였음 청년(2)
헌터였음 청년(2)
사실 이안에게 상태창을 외치는 사람들보다도 기이하게 느껴진 것은, 주변의 헌터 대부분이 상태창을 가진 이들에게 질시의 시선을 보내는 광경이었다. 소음공해의 주범을 향한 책망의 시선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러움과 질투라니?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방금 전 헌터지원청의 공무원과 대화하면서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성좌와 계약하면 상태창을 수여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었지.’ 저들이 외치는 ‘상태창’은 성좌에게 간택되었다는 모종의 징표인 걸까. 그렇다면 주변에서 은근히 내비치는 부러움 역시 납득이 갔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과 질투. 이안에게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이런 맥락이라면 자신이 손에 넣은 특별함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도 나름 설득력이….’ 이안은 신세대 헌터들을 이해해 보려다가, 이윽고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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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맞나?’ 그는 상태창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상태창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불특정다수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공공연히 드러내다니?언제 어떻게 정보가 유출될지 알고? 지금 시대 헌터들이 들었다가는 대번에 꼰대 취급받을 생각이었다. *** 이안은 몇 분 동안 상태창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당장 자신과 연관도 없는 일에 심력을 써 봤자 시간과 체력 낭비 아닌가. 이해하지 못할 문제에 골몰하느니, 몇 분이라도 빨리 공공일자리 알선사업에 대해 알아보는 편이 효율적일 터다. 잡념을 털어낸 이안은 헌터지원청의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으로 향하는 길은 본관보다는 한산했다. 이안은 주변 헌터들의 차림새를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본관 앞에 있던 사람들보다는 좀 소박한 복장인데.’ 헌터 개개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 역시도 다소 미약했다. 아무래도 이 공공일자리라는 것은 강한 헌터들이 선호하는 임무는 아닌듯했다. 바로 그 점이 이안에게는 오히려 안심되었다. 자신이 사라져 있던 그 시간 동안, 헌터 업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각변동을 느꼈다. 지구의 마나 농도부터가 압도적으로 높아진 지금. 무턱대고 사냥에 나섰다가는 어떤 봉변을 겪을지 몰랐다.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업계의 실상을 확인해보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안은 옷 아래에 넣어둔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가죽 재질의 목걸이 줄 중간에는 비취 장식이 달려 있었다. 본래 은은히 빛나야 했을 비취는 본래의 광채를 잃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비취 목걸이는 이안이 가진 몇 안되는 마도구 중 하나였다. 부여된 능력은 밤의 일족을 추적하는 것. 추적 가능한 대상은 한 번에 한 명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헌터에게는 더 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이안은 몇 번 비취 목걸이를 매만졌다. 아무래도 광채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마력이 부족해 작동 자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비취 목걸이에 마력을 충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밤의 일족의 피를 흡수시키는 것. 그는 게이트에서 마력을 손에 넣는 즉시 목걸이에 깃든 추적 표식을 다시 활성화시킬 생각이었다. 이 목걸이는 1999년, 이안과 마지막으로 겨룬 밤의 일족. 흡혈귀의 왕녀를 추적하도록 조율되어 있었다. 그 싸움의 승자는 왕녀도 이안도 아니었다. 각자의 동료에게 미래를 맡기고, 지구의 밖으로 함께 추락한 것이다. 자신이 돌아온 이상 왕녀 역시 이 세상에 돌아왔으리라.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더 이르게. 왕녀는 이안 자신보다 훨씬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봉인에서 벗어나기도 쉬웠을 터다. 왕녀는 마력이 극도로 희박했던 지구에서도 그처럼 강력했던 흡혈귀였다. 지금 시대에서는 얼마나 강하고, 또 교활해졌을지 몰랐다. 지성을 가진 적이 두려운 것은 실패로부터 배우기 때문이요, 흡혈귀는 밤의 족속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능을 가진 자들이었으니. 왕녀는 과거가 현재에 떠넘긴 재앙의 씨앗이었다. 이안은 왕녀를 찾아내 사냥하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의무라 여겼다. *** 이안의 미래계획은 미래계획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는 조용히 지원청 별관으로 향해 공공일자리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의뢰의 명칭은 건조했다. F급 게이트 식생 조사. 갓 헌터가 된 초보들을 위한 의뢰로, 게이트 내부에 있는 몬스터들과 직접적인 교전을 벌일 필요도 없이 주변 동식물을 채집해 나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안은 참가 신청을 위해 헌터 등록등을 내밀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별관의 헌터들 대부분은 자신과 비슷하게 마력의 파장이 미약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일부는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가 달랐다. 이안은 보다 강력한 마력 파장이 느껴지는 헌터들을 은밀히 관찰했다. ‘옷의 재질부터가 다른데?’ 얼핏 보아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자세히 보면 비싼 테가 나는 재질의 옷들. 이안은 머릿속으로 성좌물의 클리셰들을 떠올렸다. 그는 어렵잖게 저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유망주를 자기네 조직에 가입시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스카우터들인가?’ 헌터 등록 절차에서 두각을 나타난 신예를 미리미리 선점하려는 자들. 옛날에 읽었던 소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소설 속 스카우터들은 으레 ‘등급 측정 구슬이 깨졌습니다!’하는 감탄사를 외치면서 상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하고는 했다. 자신에게 스카우터들이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건내는 상상을 하던 이안은 이윽고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이 시대에서 헌터들의 모임을 부르는 명칭이 길드인지, 클랜인지, 혹은 그 외의 무언가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집단과 자신이 얽힐 일은 없을 테니까. 애초에 이안 자신이 분류된 등급은 F급 아닌가. 스카우터들의 눈에 찰 리가 만무한 등급이었다. ‘그래도 상상은 재미있었다.’ 이안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F급 게이트 식생 조사 지원자 집결지로 향했다. *** “거, 분위기 한 번 끝내주는군. 장비가 멋진데.” F급 게이트로 향하는 헌터지원청 수송 차량 안. 옆자리에 앉은 멀쑥한 외모의 장년인이 말을 걸어왔다. 이안은 뺨가를 긁적였다. 자신의 장비는 옛날 헌터들 사이에서도 구닥다리 취급받았던 복색이었다. 종아리 어림까지 내려오는 코트에다가 잘 정돈된 모자와 입을 가리는 두건까지. 중근세의 헌터들도 답답해할 차림새였으니까. 하지만 말투를 보건대 시비를 걸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적당히 가벼운 이야기로 친분을 다지려는 한담에 가까울 터. 이안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골동품입니다. 아는 분께 물려받았거든요.” 이안을 헌터의 세계로 이끈 스승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정작 스승은 특수섬유를 이용한 첨단 방탄복을 입고 다녔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처치곤란한 물건을 자신에게 떠넘겼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오, 역시. 때깔이 범상치 않더라니! 어디 헌터명가와 연이 있었나? 아니면 성좌교단의 수행자?” 순간 이안의 두뇌가 정지했다. 도저히 조합될 수 없는 단어가 한데 묶여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헌터…명가라뇨?” 위화감이 너무 심해 두 단어를 붙여 말하기도 힘들었다. ‘원수를 잡아 족치자마자 이 좆같은 일 때려치겠다고 벼르던 작자들만 있었는데?’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원한을 대물림하고 싶어하는 헌터는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대에서 숙적을 끝장내고 후손에게는 평안한 일상을 주고 싶어했으니까. 지금 이 장년인은 이안의 헌터-상식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에이,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그렇게 빼지 말라고. 대격변의 시대에서부터 이어진 근본있는 헌터 가문들 말이야! 그런 명가에서는 요즘의 양산형 아티팩트보다는 전통적인 헌터 장비를 선호한다고 들었어.” 이안은 창밖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헌터에 근본이 어디 있다고. 그냥 밤의 일족에게 피를 본 사람들이 이 악물고 무기를 쥐면 그게 헌터였다. ‘진짜 적응하기 힘들다….’ 그는 장년인에게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거라 장비의 제대로 된 연원은 모른다’고 둘러댔다. 장년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하. 그런 컨셉?” 킬킬거리며 웃은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발덴이라 하네. 잘 부탁하지.” 통성명을 하려던 이안은 사뭇 놀랐다. 발덴이라는 이름은 꽤나 서구적인 분위기였는데, 외형은 한국인에 가까웠다. ‘이것도 그 대격변의 영향인가?’ 헌터지원청의 안내 책자에 적혀있던 ‘헌터지원청의 역사’ 단락에서 본 적 있었다. 대격변의 시대에는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고, 지각변동으로 인해 대륙의 구조까지 뒤바뀌며 이전 시대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뒤섞이며 이름 역시 다양하게 바뀐 모양이었다. 이안은 짐짓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입니다. 게이트 탐사는 처음이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호, 이안. 요한의 다른 발음이던가? 명가의 자제보다는 교단의 수행자에 가까울지도….” 발덴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안은 두건 아래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는 이씨 성에 불빛 안(㷳) 자를 쓰는 토종 한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