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였음 청년(3)
헌터였음 청년(3)
“발덴 씨.” 이안은 막간을 이용해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정보를 들어두기로 했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들릴 생각이기는 했지만, 활자로 정리된 지식과 직접 사람의 입으로 듣는 이야기 사이에는 방향성의 차이가 있었다. “응?” “헌터 명가도 여럿이잖습니까. 특히 좋아하는 가문이 있으십니까?” 발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안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예의 헌터 명가라는 자들의 인상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닌 모양인데….’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는 차이였다. 말이 아닌 다른 표현으로부터 전달되는 생동감. 사람의 몸짓에 반영되는 은근한 감정들. “이거이거, 참. 자네 수수께끼 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저는 칼을 쓰는 쪽을 좋아했거든요. 멋있어서.”이안은 화자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일만한 문장을 던지고는 반응을 기다렸다. “허어. 칼이라? 그쪽이라면 역시 펜드래곤 아니겠나? 대격변 이전부터 전해져내려온 그 ‘성검’을 소유한 가문!” ‘어….’ 이안은 순간적으로 치솟은 ‘그게 다 뭡니까?’라 외치고 싶은 충동을 인내했다. 물론 그도 엑스칼리버의 전설에 대해서는 알았다. 그걸 찾아내는 걸 평생의 숙원으로 삼은 헌터도 있었고. 요정들에게 온 가족을 잃었던 자였다. 고약한 점은, 가족을 살해한 요정들이 그를 입양했다는 점이었다. 원수인 자신들을 부모로 여기는 인간을 보며 조롱하기 위하여. 진실을 알아내고, 부모 노릇을 하던 요정을 참살한 그는 교회의 종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요정들에게 공포를 새겨주겠다며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성검을 찾아 헤맸다. 엘릭. 영국인이면서 영어보다도 요정어에 익숙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탐색의 절박함이 발굴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안이 아는 바, 이야기 속 무구를 정말로 찾아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헌터들은 은탄과 쇠말뚝처럼 전승을 이용한 장비를 구비해 둘 뿐이었다. 진짜 전설의 무기를 찾기 위해 인생을 불사르는 헌터는 드물었다. ‘찾았으면 좋겠는데.’ 이안은 이제는 만나볼 수 없을 옛 친구 엘릭의 소원이 성취되었기를 희망했다. 1999년이 지나간 다음에도 헌터들은 사냥을 이어가야만 했을 테고, 그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엑스칼리버는 큰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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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들로서는 진위여부를 알 수 없지만, 특히 그 전설이 마음에 들어. 초대 가주 엘릭의 영혼이 성검에 깃들어 후손의 인품을 판별한다는 것 말이네.” “…예?” “음. 역시 영혼 이야기는 좀 소름끼치는가? 펜드래곤의 초대 가주가 후손의 몸을 차지한다는 뜬소문도 있고 말이야.” 발덴은 이안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하지만 별의 기사 엘릭 펜드래곤은 고결한 사람이니만큼 후손의 몸을 빼앗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게야!’ 같은 열렬한 자기주장을. 그 덕에 이안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게 누구냐’는 소리가 나와도 수습하기 쉽도록. “그러면 엘릭 경의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그 맨손으로 싸우던 사람이라거나요.” “아. 서홍 말인가?” 또다시 옛 동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내가 사라져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그 사람도 나름대로 꽤 큰 흔적을 남기고 갔지. 지금 헌터들이 익히는 마나 연공법의 시초라고들 하던데. 하지만 엘릭 펜드래곤에 비하면 한 수 처질 거라 보네.” ‘그 녀석의 기체조가 진짜로 효험이 있었단 말이지?’ 마나 연공법의 시초라니. 헌터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망나니 취급받던 녀석이 출세했지 않은가. 이안은 이어지는 발덴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발덴은 엘릭이 뭇 성좌들의 선택을 받았지만 서홍은 성좌가 먼저 나서 계약을 제의한 경우가 없었다면서 엘릭 최강론을 설파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다른 헌터가 입을 열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시작의 여섯 명가를 세운 시조들 중에서 최강을 꼽자면 역시 심장 먹는 왕 아니겠어?” “어허. 무슨 소리를 하나. 성검이 있다니까? 대격변 이전부터 전해져내려온 최강의 아티팩트!” 이안은 VS 놀이에 열중하는 헌터들의 대화를 들으며 허탈히 웃었다. 저들이 말하는 명가의 시조들이 누군지 다 짐작이 갔다. ‘진짜. 나 없던 동안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리고 동시에, 몇 가지 위화감도 느껴졌다. 엘릭과 서홍의 헌터 이력은 서력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 아닌가. 하지만 그들의 우상화된 일대기는 남았어도, 서력 시절 그들이 어찌 활동하였는가는 전해지지 않았다. 여섯 시조들은 ‘대격변 이전부터 활동해온 헌터’가 아니라 ‘대격변을 극복해낸 주역’으로서의 이미지만이 남아 구전되는 듯했다. ‘찾아봐야 할 게 늘었군….’ *** “다들 하차해 주십시오.” 헌터들은 지원청 직원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꽤나 익숙한 모양새인 것이 다들 게이트 식생 조사는 몇 번 해 본 모양이었다. “금일 조사하실 게이트의 입구는 전방에 있습니다.” “이런. 숲 타입인가? 저쪽에선 별로 주워올 게 없는데.” “지급해드린 시계의 제한시간이 다 되기 전까지 채집을 끝내고 돌아와 주십시오. 몬스터의 마석 역시 지원청에서 수매(收買)하지만, 위험 수당은 따로 나오지 않으니 교전은 최대한 회피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지원청 직원은 모두를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별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이안이 요정 접수원에게도 들었던 그 인사였다. *** “어? 자네. 무기는 따로 안 챙겨왔나?” F급 게이트의 식생 조사에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F급 헌터라도 흔히 ‘잡몹’이라고들 불리는 경량 개체 몬스터를 제압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몬스터는 몬스터인지라, 사람이 죽는 일은 드물어도 다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지원청에서는 헌터의 안전을 위해 식생 조사 시 활동지침을 배부해 2인 1조의 탐색을 권장했다. 물론 여느 ‘권장’ 지침이 그렇듯 지켜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감독관이 게이트 내부로 동행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발덴과 이안은 그 드문 사례였다. 본래 발덴도 지원청의 권장지침을 신경쓰지는 않았으나, 이안이 게이트 탐사 초행길이라는 말을 듣고는 팀을 자청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신참에 대한 배려였고, 또 어느 정도는 정체불명의 헌터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그런 발덴의 입장에서 이안이 무기 하나 들고 오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밑바닥 헌터의 생활을 체험하러 온 명가의 자제든, 성좌교단의 수행자든. 헌터는 본질적으로 싸우는 자. 무기 하나쯤 갖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저 친구, 무투가인가? 그렇다기에는 금속제 건틀렛 같은 것도 안 보이는데….’ “아. 제 무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안은 검은 코트의 왼팔 상박 부분에 묶여있던 견장을 풀었다. 그을음 먹인 버클에 묶여 견장을 고정하던 두 갈래 줄은 어느샌가 이안의 손에 잡혀 있었다. “응? 그게 무기라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발 아래 굴러다니는 돌을 하나 주워, 견장에 메겼다. 두 줄 사이에 고정된 가죽조각. 다시 가죽조각 한중간에 물린 돌. 이안과 동시대의 헌터들이 ‘탄환을 구하기 쉽고 은닉하기도 쉽다’는 이유로 가장 선호한 원거리 무기. 돌팔매였다. 이안은 줄을 붙잡고 천천히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점차 가속이 붙는 돌팔매의 회전에 따라 소음이 커져갔다. 훙훙거리며 바람을 가르던 소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거세지지 않았다. 이안은 바로 그 때 줄의 한쪽 끝을 놓았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린 직후, ‘케륵!’하는 피 끓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어, 어?!” “한 놈 잡았습니다. 가 보시죠.” 이안은 예상치 못한 무기에 황당해하는 발덴을 잡아 끌고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어린아이만도 못한 체구. 얄쌍한 사지. 볼록 튀어나온 배와 매부리코. “고블린이로구만. 하긴, F급 게이트에서는 나와봐야 고블린 아니면 코볼트지.” 발덴은 ‘마석을 찾으려면 심장 부근부터 갈라보면 된다’면서 시범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말게. 마석도 강한 놈에게서나 잘 나오지 약한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일은 드물거든. F급 게이트에서는 건실하게 약초를 수집하는 편이 더 효율이 좋네.” 이안은 두건 너머로 피식 웃었다. 강한 개체에게서 더 좋은 아이템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지극히 성좌물다웠으니까. 발덴이 손칼로 고블린의 흉곽을 절개하는 사이, 이안은 고블린이 만든 피웅덩이에 다가가 비취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 반응이 없음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일이 쉽게 돌아간다 싶었다.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부터 혹시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비취 목걸이의 동력원이 되는 것은 밤의 족속이 흘린 피였다. 헌데 게이트 내부의 몬스터가 밤의 족속과 동류일까?이안 스스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온 답은 ‘아니다’였고. “그래. 어째 돌팔매에 맞는 손맛이 덜하더라.” 이안의 견장 안쪽에는 삼각형 두 개가 교차되어 만들어지는 육망성 모양, 흔히 ‘다윗의 별’이라 불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다윗이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는 전승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평범한 사람이나 동물이 맞을 경우에는 일반적인 돌팔매 정도의 위력이지만, 밤에 속한 종족에게는 일반적인 물리법칙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흡혈귀가 이 돌탄에 맞으면 피격 부위의 재생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되었다. 거인 부류에게는 특히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다윗의 문양이 일신교 전승과 별다른 접점이 없는 족속에게는 큰 효과가 없긴 하지만….’ 그가 아는 고블린은 유럽계 전승에 기반을 둔 신화생물이었다. 문화권으로 따지자면 일신교의 상징이 먹히는 게 당연했다.그러나 이안이 알고 있던 당연함은 이번에도 부정되었다.다윗의 문양이 효과를 발휘했다면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평범한 반응 말고, 좀 더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어야만 했다. 맞은 부위가 타들어간다거나 하는 식으로.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목걸이를 피에 적셔보았지만, 역시나 목걸이는 무반응이었다.‘전승병기도, 목걸이도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밤의 족속과는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텐데….’이안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비취 목걸이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할 모양이었다. 첫 번째 방법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안은 조급하지 않았다. 미리 두 번째 계획을 준비해 두었으니까. “엇. 이안이! 이리 와 보게! 마석이 나왔어!” “오! 금방 갑니다!” *** “일은 자네가 다 했는데. 돈을 나랑 이렇게 나누면 안 되지 않나?” 발덴은 이안의 말에 꽤나 당혹했다. 이안은 첫 번째 고블린을 잡은 이후에도 게이트의 풀뿌리를 뽑기보다는 고블린을 찾아내 골통을 깨는 데 주력했다.그리고 고블린들로부터 나온 마석의 정산금을 반씩 분배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태도였다.‘역시 명가의 자제라서 이 정도는 푼돈인 건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블린 해체법에 대해 배웠으니까요. 수업료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야매 수업에 지불하기엔 영 많은 양인데….” 이안은 분배를 사양하려는 발덴을 만류하며 지원청 직원에게 정산된 금액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이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값을 겸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의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안은 ‘정 부담되시면 다음에 만날 때도 잘 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헌터지원청 수송차량에서 하차했다. 등 뒤에서 ‘아니, 자네 실력에 이런 일을 맡아 할 필요가 있나?’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피식 웃었다. 물론 있었다. 비취 목걸이를 충전하기 위함이었다. *** 그 뒤로 이안의 일상은 아주 간단해졌다. 우선 기상 이후에는 곧장 도서관까지 도보로 이동한다. 도착 시간은 정확히 도서관 개관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열람실에서 대격변 시기를 다룬 책을 읽다가 게이트 식생 조사 집결 시간이 되면 지원청 별관으로 이동하여 조사 업무에 나선다. 게이트로부터 귀환하고도 아직 도서관이 폐관 시간이 되지 않았다면 다시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이 폐관했다면 게이트 귀환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생활은 굉장히 규칙적이어서, 누구라도 이안을 일주일만 관찰하면 생활 패턴을 암기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의 이동 경로 상에는 꼭 인적이 드물고 그늘이 짙은 장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안이 스스로의 존재를 주의 깊게 감추지도 않았으므로, 누군가가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안이라는 이름의 0세대 헌터가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그가 처리하는 공공일자리 업무 대부분이 F급이라는 것까지도 파악했을 테고. 그러니까. 지금의 이안은 주거지가 일정하며, 활동 양상이 규칙적이고, 가진 바 무력 역시 범상한 F급처럼 보일 터였다. 그렇게 지난 시간이 3주. 도서관에서 독파한 책이 두 자릿수를 넘어선 시점에서, 이안은 허탈히 중얼거렸다. “아니, 이 자식들. 왜 습격을 안 하지?” 시대가 변해서 흡혈귀들도 군기가 빠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