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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였음 청년(4)

0세대 헌터가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헌터였음 청년(4)

이안은 흡혈귀들의 근면성실함을 떠올렸다. 밤의 족속 중에서도 흡혈귀는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부류에 속했다.우선 그들이 가진 동족의식부터가 문제였다. 고위 흡혈귀는 자신이 거느린 무리를 혈족(血族)이라 칭했다. 추잡한 정욕의 씨앗 대신 순수한 피로써 이어지는 가족이라는 의미로.후대 흡혈귀들은 자신에게 피를 하사해 고귀한 혈족으로 거듭나게끔 은혜를 베풀어준 선대를 진짜 어버이처럼 믿고 따랐다.사실, 진짜 어버이‘처럼’ 믿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흡혈귀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낳은 부모는 가짜 부모고, 정혈을 하사한 선대야말로 진짜 부모였으므로.교활한 지성에 더해 끈끈한 동족의식으로 무장한 흡혈귀들은, 인간 사회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비상연락망이라 할 것을 치밀하게 준비했다.흡혈귀가 부리는 박쥐 따위의 사역마를 이용해 이루어지는 첩보활동과 즉각적인 의사교환. 그들의 정보자산은 중근세까지 인간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통신 기술이 발달하며 인간과 흡혈귀 사이의 정보 격차가 다소 좁혀지기는 했다.허나 흡혈귀라고 기술을 사용할 수 없는 게 아니었으니, 인간 측의 준비가 아무리 뛰어나도 흡혈귀의 정보역량과는 대등하거나 약간 열세가 한계였다.이안은 이를 감안하고 헌터지원청의 실종자 복귀신고 시점에서부터 계획을 준비했다.일반적인 게이트 내부 몬스터의 혈액으로 비취 목걸이를 충전할 수 없다면? 흡혈귀들이 직접 찾아오게 만들면 된다.흡혈귀의 피를 이용한다면 호환성을 걱정할 필요 없이 곧장 비취 목걸이를 충전할 수 있을 테니까.그리고 지금. 이안의 계획은 완벽하게 어그러졌다.그가 알던 흡혈귀들의 정보역량이라면, 또 수백 년 전의 원한을 잊지 않고 원수의 후손에게까지 해코지를 하는 그들의 치졸함이라면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습격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이상하다.’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설마 이 성좌의 시대가 온 이후로 흡혈귀 개체 하나하나가 압도적으로 강해져서 나 같은 구세대 헌터는 아예 적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건가?’본래부터 흡혈귀와 같은 밤의 족속은 평범한 인간들보다 마력을 훨씬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공기 중의 마력 밀도가 올라간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마력이 풍부한 지금 시대라면….‘아니. 말이 안 되는데?’흡혈귀가 강해진 만큼, 헌터 역시 강해졌다. 헌터 명가 같은 기괴한 단어가 상식으로 통용될 정도로 헌터의 위상을 끌어올린 자신의 옛 동료들만 보아도 그랬다.‘오히려 다른 방향성의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겠어.’시작의 여섯 시조라 불리는 이안의 동료들.그들이 대격변의 시대에 흡혈귀를 절멸시켰다는 가설은 어떨까.헌터지원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확인된 성좌와의 첫 계약자는 엘릭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헌터들은 성좌의 지원에 힘입어 흡혈귀를 압도할 수 있었을지도….이안은 끊임없이 뻗어나가려는 추론을 끊어냈다. 성좌의 시대, 흡혈귀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지금으로선 추측만 가능할 뿐이었다.현재의 상황을 확실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역시 비취 목걸이를 충전해 왕녀를 찾아내야만 했다.‘씁.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력을 쌓을 방도를 준비해야 하나…?’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슬슬 도서관 폐관 시간이 다가온 탓이었다.그는 역사서 몇 권을 빌려 도서관을 나왔다.*** 이안은 지난 며칠 동안 흡혈귀를 유인할 목적으로 도서관을 들락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독서를 건성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를 알아내려면 과거의 기록을 부지런히 들여다보아야만 했으니까.하지만 이안이 원하는 ‘1999년부터 대격변의 시대가 종결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다루는 책이 없었다.그저 ‘한 때 인류가 네자리 수로 연도를 헤아리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도 소수나마 헌터는 존재했다’같은 피상적인 설명 뿐.서력 이후의 시기. 그러니까 대격변의 시대를 다루는 책은 약간이라도 존재하긴 했다.내용은 하나같이 단순했지만.격변기의 혼란을 틈타 지구를 지배하려던 악의 세력을 헌터들이 몰아냈다는, 어쩐지 프로파간다 같이 느껴지는 이야기.하지만 이안은 그 프로파간다성 짙은 전승에서 기시감을 느꼈다.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과, 알게 된 지식을 종합하여 시간의 누더기를 기워보려 시도했다.‘우선 시대 정리부터 시작하자.’그는 여러 교양서적에서 제시된 대로 시대를 세 가지로 구분하기로 했다. 서력 시대, 대격변 시대, 그리고 현재 성좌의 시대.이안은 대격변의 원인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서력 시대의 헌터들 사이에는 3가지 종말론이 떠돌았다.사실 ‘론’ 자를 붙이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딱히 과학적 증거가 있던 게 아니니까.그러니까, 보다 정확한 이름은 3가지 종말의 예언이었다.첫 번째 예언. 1999년, 세기말.세기가 바뀌면서 천지가 뒤집히듯, 현재 지구의 지배종인 인간과 밤의 족속 사이의 구도가 역전되리라는 불길한 경고.예의 밤의 족속이 정확히 어떤 종족을 가리키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다만, 흡혈귀는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우월한’ 종족이라면 자신들밖에 없다고 여겼다.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종말의 주역에 등극했다. 1999년을 기다리며 헌터와 흡혈귀 사이의 결전을 위해 흡혈귀의 최종병기 왕녀를 탄생시키고, 왕녀를 마중물 삼아 저 무시무시한 드라큘라를 부활시킬 계략을 준비한 것이다.이안이 사라진 것이 바로 이때였다. 왕녀가 흡혈귀의 왕을 부활시키려 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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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멸의 의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이안은 왕녀를 붙잡고 무너진 현실의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그리고 다음.’두 번째. 2012년, 꼬리별.지구에 떨어질 유성이 대멸종을 초래하리라는 예언이었다. 1999년의 예언을 믿던 흡혈귀들처럼, 2012년의 예언을 숭배하는 밤의 족속 역시 존재했다.‘렙틸리언이었지.’자신들이 옛 용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파충류-인간들. 그들은 유성이 떨어져 현대 사회가 붕괴하는 날에 별하늘이 열리고 온전한 용으로서 승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이는 렙틸리언들 사이에서 은밀히 전해져 내려오던 구전이었다. 파충인류의 비밀스런 소망을 이안이 알게 된 사유는 간단했다.그들 종족의 배신자가 헌터 측에 합류한 덕분이었다. 하프 렙틸리언.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도 아니고 파충인류와 인간의 혼혈이었던 자칭 용 아가씨가.이안은 이 두 번째 종말론의 배경인 2012년을 전후하여 대격변이 찾아왔으리라 예상했다.그는 붉게 물든 만월 아래서 이루어진 1999년의 의식을 되새겼다. 의식이 점차 진행될수록 현실의 풍경은 무너져갔고, 깨져나간 하늘 너머에는 불길한 혼돈이 회오리쳤다.의식이 완성되었다면 무너진 경계로부터 혼돈이 세상에 쏟아져 내렸으리라.2012년의 렙틸리언들이 1999년의 흡혈귀들을 반면교사 삼아 보다 은밀하게 계획을 꾸몄다면.그래서 정말로 예의 유성이 지구에 추락했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난장판이 된 것도 당연했다.렙틸리언들은 혼돈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고 유성을 소환하는 대마법을 완성했으며, 형이상의 저편에서 찾아온 유성이 지구 대륙의 형태 자체를 뒤바꿔 버린 것이다.이안은 펼쳐놓은 지도책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알던 형태의 대륙이 존재하지 않았다.오직 하나의 통일대륙만이 남아있을 뿐. 그가 기억하는 ‘지구’의 모습은 통일대륙 곳곳에 박힌 대도시의 이름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마탑연맹의 도읍지 런던이라거나, 천공성 뉴욕과 같은 이름에서.사실 대륙의 형태를 갈아엎을 정도의 충격이 지구에 가해졌다면 생명체는 모조리 멸종해야 정상이겠지만.렙틸리언들이 숭배하는 유성, 니비루는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서 불려 다가오는 천체였다.충돌의 파급 역시 마법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이안은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그린 타임 테이블을 정리했다. 1999년의 세기말. 자신과 왕녀가 함께 사라짐으로써 1차 종말론 해결.2012년의 꼬리별. 어떤 이유에서인지 헌터 측의 렙틸리언 저지 실패. 2차 종말론 도래.대격변 발발.대격변의 시기. 성좌와 계약한 여섯 시조를 필두로 렙틸리언 제국과의 전쟁. 헌터 측의 승리. 전후처리 도중에 헌터지원청 설립.“그리고 이 뒤로 성좌의 시대가 열렸다는 건데….”이안은 과연 이 복잡한 헌터사(史)의 격류 속에서 흡혈귀가 어찌 되었을지 고심했다.대격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휩쓸려 절멸당했다고 해도 말이 되고, 대격변을 틈타 세력을 확대했다고 해도 말이 되었으니까.이안은 이 난제를 고민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털어냈다.어차피 왕녀의 생존은 확실하다. 녀석을 찾아낸다면 흡혈귀 종족의 현황 정도는 완벽히 파악할 수 있겠지.사실, 이안은 비취 목걸이가 없어도 왕녀의 생사만큼은 파악할 수 있었다.정확한 위치나 상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은 별 위에 살아 숨쉬고 있음은 명백했다.그것의 생존은 이안은 심장에서 느껴지는 작열감으로 증명되었다. 왕녀가 직접 새긴 낙인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열기였다.1999년의 동반 추락 이후, 혼돈 속에 묻혀있던 어느 시기인가에. 이안은 제 심장에 새겨진 열기가 가라앉았음을 깨달았다. 그때는 기약없는 굶주림을 감당치 못한 왕녀의 영혼이 사그라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안다.왕녀는 그때, 자신보다 한발 앞서 지구로 돌아갔다.이안이 성좌 시대의 지구에 발을 디딘 순간. 오랫동안 멈춰있던 낙인이 다시 맥동하기 시작했다.왕녀의 생존을 알리는 경종. 이안이 왕녀 추적을 결심한 순간이었다.그리고, 지금도. 낙인은 맥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