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차이(2)
세대차이(2)
헌터 승급시험의 실체는 참으로 충격적이었으나, 이안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쉬우면 좋은 거지. 그날 바로 승급하면 곧장 E급 게이트에 들어갈 수도 있겠고.’ 사실 이안은 아직 몬스터의 피로 비취 목걸이를 충전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블린의 피로는 목걸이를 충전할 수 없었지만, 다른 몬스터는 호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급으로의 승급은 어느 모로 보나 호재였다. 그것이 쉽게 이루어진다니 더더욱.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다가올 심사일을 기다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맞나?’ 사실, 그다지 평온하지는 못했다. *** 화요일 오전. 이안은 헌터지원청 건물을 거닐고 있었다. 등급측정실은 지원청 본관 1층에 따로 ‘측정동’이라고 구역이 분류될 정도로 규모가 사뭇 거대했다. 마법이나 정령의 원소 조작 능력을 테스트 하기 위한 속성집중실 같은 특수 설비 때문이었다. 고등급이 될수록 헌터가 투사하는 힘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에, 안전거리를 포함하여 여러 모로 크기를 넓게 잡을 필요도 있었고. 이안은 측정동의 E급 심사실로 향했다. 그는 심사실의 도어락에 헌터 등록증을 가까이 가져갔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사무적인 전자합성음과 함께 문이 열린 문 너머로는…. ‘아무도 없어?’ 이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꽤나 넉넉히 여유시간을 두고 왔으니 심사관이 없는 건 이해가 되었지만, 다른 승급심사 대상자가 없는 건 또 무슨 일인가. ‘오늘 E급 심사를 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건가?’ 이안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심사관을 기다렸다. 그가 책을 펼치고 10분 정도 경과했을 무렵, 문으로부터 전자합성음이 울려퍼졌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 전 B급 헌터. 현 헌터지원청 직원 브론테 코지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현행 E급 승급심사는 안전교육 영상을 틀어주고 사고사례를 읊어주기만 하면 끝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심사 대상자 대부분은 다소 지루해할지언정 교육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고. 그런데 이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흔히들 0세대라 불리는 부류의 헌터들. 이들은 가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심사관을 공격하거나 심사실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B급 헌터의 자격을 지닌 코지가 겨우 E급 심사관 노릇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본인이 다치는 일 없이 날뛰는 헌터를 제압하려면 그 정도 등급은 되어야 했다. 혹시 다른 평범한 헌터를 붙잡고 인질극을 벌일까봐 시험장도 일반 헌터와는 다른 곳으로 준비되었고. ‘류페이 씨가 굉장히 신사적인 분이라고 하긴 했지.’ 하지만 코지는 이미 0세대에게 데인 게 많은 사람이었다. 작정하고 왕수(王水)를 가져와 흩뿌리는 미친 헌터와도 조우한 적 있는 바, 그는 심사장에 들어설 때부터 어떤 예측불허의 일이 벌어질까 긴장을 놓지 않았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번에 마주한 0세대 헌터는 좋은 의미에서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선, 조용히 책을 읽으며 평화롭게 기다리는 모습부터. “반갑습니다. 이안입니다.” 그리고 먼저 인사를 하는 사회성까지. ‘이 사람의 사교성은 다른 0세대 헌터들의 10배에서 12배…!’ 과연, 동료 접수원이 신사적인 성격이라고 평가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코지는 가벼운 감동을 느끼며 안전교육을 준비했다. *** “특수장비. 그러니까 마도구는 기본적으로 ‘종’으로 나뉘어집니다. 1종 특수장비는 근력 강화나 민첩성 강화처럼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장비고, 2종 특수장비는 화염탄 발사와 같이 외부에 영향을 끼치는 마도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안은 드물게도 안전교육을 성의있게 듣는 헌터였다. 코지는 교육 내용을 노트에 필기하는 0세대 헌터의 모습을 보며 조금 더 무거워진 감동을 느꼈다. ‘패션 센스는 조금 고풍적이지만! 이 얼마나 열정적인 학습태도인가!’ 그는 보다 최대한 열심히 안전교육을 끝마치고 빠른 귀가를 보장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1종 특수장비는 특별한 자격 없이 구매 가능하지만, 2종 특수장비는 E급 헌터부터….”사실 이안의 입장에서 E급 헌터 안전교육은 정말 흥미로웠다. 서력 시대와는 다른, 이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알 수 있었으니까. 예컨대 상위 등급으로 승급했다고 동료들을 무시하다가 일어난 상해사고나,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아티팩트를 장착했다가 마력 탈진으로 실려온 사고와 같이. 서력 시대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이야기가 많았다. 이러한 사고에 대한 예방법과 대처법을 논하는 안전교육은 교육에 들이는 시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여기서 잠시 마도구 오용 사례 모음집을 보고 가시겠습….” 삐─위이이이이이이이익! 코지의 말허리를 자르고, 경보가 울려퍼졌다. [헌터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반복합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 ‘설마!’ 이안의 머릿속에서 성좌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헌터 관리국을 습격하는 악의 조직들. 무슨 이유인지 국가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한 자들이 사회규범의 상징인 관리국을 무릎꿇리기 위해 일어나는 대규모 습격전. 이안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바삐 둘러보던 찰나. “에헤이. 또 이거 쓰네. 요새 헌터들은 블러드웹에서 다 읽고 오는데.” “예?”영 귀찮다는 어조로 심사관이 입을 열었다.코지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답했다. “아.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왜, C급부터 있는 실기 시험 있잖습니까. 거기서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도 보아야 한다고, 게이트 브레이크나 수송 중인 희귀 몬스터 탈출 같은 상황을 설정해서 던져주거든요.” 본래 이런 심사 규정의 이면을 말해주는 것은 권장 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0세대 헌터는 이런 가짜 상황에서 ‘역시! 아직 세상은 멸망의 위기였어! 좋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할 수 있다 나라면!’을 외치면서 진짜 돌발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헌터지원청의 비공식적 지침으로는 0세대 민원인이 돌발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냥 사실을 솔직히 말할 것이 권장되었다. “이쪽과 접수처가 같은 1층인데 실제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죠? 동선 불편하게시리. 그게 저런 경보방송은 등급측정실 안에서만 들리게 하려고 그렇습니다.” 코지는 오늘은 C급부터 E급 심사일이 겹친 날이니, C급 실기시험 방송일 것이라 덧붙였다. 아하. 이안은 작게 감탄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살짝 시무룩해졌다.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대강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내 세대 헌터들이 조금 성급한 경우가 많긴 했지.’ “그러면 잠시 방송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교육을 재개─” [반복합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꼬리별의 추종자들이 습격했습니다! B급 이상의 헌터는 모두 본관으로! C급 이하는 쉘터로 이동 요망!] 코지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헌터지원청에서 상황을 아무리 실감나게 설정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사태가 있었다. 꼬리별의 추종자. 계약해서는 안 될 성좌와 계약한 자들의 총칭. 코지는 하필이면 이 날 습격이 벌어졌음을 탄식했다. A급 승급심사일, 하다 못해 B급 승급심사일이었다면 인력이…! ‘아니.’ 습격자들은 고심 끝에 오늘을 노렸을 것이다. C급 헌터 승급 심사에서 가짜 돌발상황을 연출하는 것을 연막 삼아 자신들의 진짜 습격을 가리려는 의도. 헌터지원청의 내부 사정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이러한 간교함이야말로 지금의 습격의 배후에 한때 인간이었다가 변절한 자들이 있음을 암시했다. 그는 B급 헌터로서 나서야만 했다. “여기에서 기다리십시오. 심사실은 패닉 룸 역할도 겸합니다. 누군가 열어달라고 하면 절대로 열어주지 마시고….” “인기척을 숨기기 위해 문에서는 떨어져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안은 이어질 말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코지는 잠깐 당혹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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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계시는군요. 잠시 상황을 살펴보러 가겠습니다!” 코지가 급히 떠난 뒤, 이안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정말로. 정말로 익숙한 이름이었다. 꼬리별의 추종자라. 이안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래. 사람을 위하는 성좌가 있다면, 사람을 증오하는 성좌도 있는 법이지.’ 성좌물이 으레 그렇지 않던가. 그는 예언에 기록된 니비루의 권능을 떠올렸다. 종말을 드리우는 무시무시한 유성이라면 능히 성좌의 칭호를 움켜쥘 힘이 있으리라. ‘대격변의 시대가 끝났는데도 게이트가 열리는 이유도 알겠어.’ 니비루는, 그리고 그 추종자들은 아직 예언의 성취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안의 목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을 참아내는 것 같기도 하고, 울부짖음을 억누르려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소리. 하지만 그는 숙련된 헌터였으므로, 불필요한 소리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안은 견장을 풀었다. 안감에 다윗의 별이 새겨진 왼쪽 견장이 아니라, 오른쪽 견장을. *** 쿵, 쿵…. 복도를 꽉 채울 정도의 거구를 지닌 용인이 E급 심사실 주변을 활보하고 있었다. 오늘 습격자들 중에 가장 신참이었던 그는 퇴각 시에 인질로 삼을 저등급 헌터들을 확보하는 역할을 받았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었다. 주교께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유혈을 허락하셨으니. 오늘 그는 위대한 용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리라! 탁. 심사실 벽 너머로부터 소리가 들린다. 용인은 사납게 웃었다. 이러한 힘을, 이러한 육신을 지니고 나니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자신이 인간일 적에 몬스터들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지금의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가 이 너머에 있다. 그러한 입장의 역전은 용인에게 묘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E급 심사실을 그냥 지나쳐 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서성거리던 안쪽의 발소리 역시 차분해졌다. 바로 이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저등급 헌터들을 확보하는 임무에 선정된 이유인 투과의 은총을 발휘했다. 스윽, 심사실의 벽 너머로 용인의 얼굴이 스며들었다.“옛 용께 왕좌를! 거짓 용에게 죽음을! 네놈의 떨리는 발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는 헌터의 두려움을, 자신을 향한 경외와 절망감을 바라며 고개를 돌렸다. 심장을 뽑아 살점을 취할 희생물을 찾아내기 위해. 용인의 거구가 스며든 벽이 기이하게 꿀렁거렸다. 벽에서 반쯤 튀어나온 채 능력을 과시하던 용인은, 분명 소리가 들리던 방 안에서 누구도 없음을 깨달았다.‘더미인가?’ 지원청에서 습격자를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술책을 펼쳤나. 용인이 혀를 차곤 몸을 빼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쇠꼬챙이 하나가 용인의 눈알을 파고들었다. E급 헌터 따위가 던진 잡동사니가 자신을 상처입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텐데. 그는 알지 못했다. 저 꼬챙이는 용을 죽인 자 성(聖) 게오르기우스의 상을 녹여 만들어진 것이다. 서력 시대, 바티칸이 천 년을 넘게 이어져온 문화재를 희생하여 벼려낸 전승병기의 하나. 용인은 있을 수 없는 일에 당혹했다. 몸이 굳는다. 이는 실책이었다. 투과 능력이 엉키며 육신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로 인해 더 큰 당혹이 찾아온다. 악순환이다. 곧 사냥꾼이 노리고 있던 악순환이었다.이안은 과거를 반추했다. 아무리 전투경험이 적은 흡혈귀라도 안개화 같은 수단으로 벽을 돌파한 다음에는 최대한 빨리 몸을 빼내야 함을 알거늘. 자신이 가진 힘에 도취된 것을 보면, 갓 축복을 받은 녀석이겠지.‘어리다.’제대로 사냥을 교육받지 못했다.그는 건조한 상념 속에서 또 하나의 꼬챙이를 준비했다. 전승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저 용인은 게이트 속 고블린과 달리 밤의 족속과 모종의 연속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용인은 두 가지의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울부짖었다. 첫 번째 공포는 점차 어두워져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시야에서 왔고. 두 번째 공포는 하나는 마지막까지 사냥꾼이 보이지 않음에서 왔다. 용인은 보이지 않는 적에게 외쳤다.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이 비열…!”낡은 사냥꾼은 풋내기 사냥감의 단말마를 들어주지 않았다. 쐐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 이미 절반이 닫혀있던 용인의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이안은 그제서야 머리에 두른 망건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