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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물(1)

0세대 헌터가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피그물(1)

이안은 용인의 호흡이 멎은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녀석의 정면으로 곧장 다가가지는 않았다.   용인의 아가리를 기준으로, 사선에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서력 시기에 렙틸리언을 사냥한 경험에서 나온 동작이었다.   어떤 뱀은 머리가 잘려도 1시간 이상 움직일 수 있다. 참수당한 뱀이 독사라면 그 위험성은 살아있을 적의 자신을 뛰어넘는다.   잘려나간 뱀머리는 무언가를 깨물었을 때 반사적으로 자신이 가진 분비샘의 독을 모두 토해내려 하기 때문이다. 아직 꺼지지 않은 신경회로의 마지막 번뜩임이 준비한 최후의 보복이었다.   그리고 렙틸리언의 집념은 이러한 독사들의 번뜩임보다 훨씬 강인하고 억척스러웠다.   이안은 머리가 잘린 채 기관단총을 난사하는 렙틸리언과 싸워본 적도 있었다.   하여 이안의 접근은 사뭇 신중했다.   정말로 다시 움직여도 벽과 몸이 반쯤 융화되어 손가락이나 겨우 까딱일 지경이긴 하지만, 갑작스럽게 입에서 독을 토해내거나 하는 식으로 공격해올 수도 있으니까.   “어….”   하지만 긴장이 무색하게도 이 풋내기 용인은 완전히 절명한 모양이었다. 이안은 눈을 끔벅였다.   ‘내가 알고 있던 렙틸리언보다 지구력이 다소 부족하군.’   그는 이것이 방금 전의 전투에서도 드러났던 교육 부족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렙틸리언 제국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암묵지의 상당수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대격변의 시기에 제국이 무너진 여파겠지.’   용인의 사체에 다가간 이안은 조심스럽게 비취 목걸이를 들어 핏물에 적셨다.   우우웅─   목걸이의 안쪽에서부터 광점이 피어났다. 금방 사그라들 것처럼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 마력이 충전되고 있었다!   순간 그는 헌터의 금기를 저지를 뻔했다. ‘오늘따라 운이 좋군!’ 같은 감탄사가 턱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운수에 대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불운이 찾아온다. 헌터들 사이 전해 내려온 오래된 징크스였다.   헌터다운 인내심으로 충동을 견뎌낸 이안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비취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마력이 충전되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물질 투과 같은 특수능력을 가진 개체는 서력 시대에는 상당히 고위의 렙틸리언으로 취급받았다. 헌데 지금 이 용인의 피는 일반 렙틸리언보다도 마력 충전 속도가 느렸다.   지금 나타난 용인과, 서력 시대의 렙틸리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고블린 녀석과 달리 전승병기가 통하는 걸 보면, 내가 알고 있던 밤의 족속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건데.’   순간 그의 뇌리에 F급 게이트가 떠올랐다. 게이트에서 나타난 고블린에게는 다윗의 별이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헌데 이곳은 헌터지원청. 게이트 외부였다. 그는 용인의 안구에서 게오르기우스의 가시를 회수하며 고심했다.   ‘전승이 통용되는 기준이 따로 있나?’   이안의 머릿속에 여러 가설이 스쳐지나갔다. 종의 차이가 아니라 게이트의 내부와 외부라는 공간적 차이에서 전승의 효과 여부가 결정되는 걸까.   혹은 예의 ‘고블린’이 지구의 전승에 기반한 존재가 아니라 외견만 비슷한 모사품일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추론은 이 둘이었다. 이안은 전자에 더 무게를 실어주고 싶었다.만약 후자라면 지구의 전승 속 괴물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또다른 적이 존재한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게이트 내부의 고블린으로는 비취 목걸이 충전조차 할 수 없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아졌지만.  이미 심사가 복잡한 낡은 헌터에게, 새로운 적은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안이 상념에 잠겨있던 찰나.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이안 헌터님!”   코지가 황급히 심사실 내부로 뛰쳐들어왔다. 이안은 당혹한 낯의 심사관에게 침착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괜찮습니다. 심사 속행 가능합니다.”   “아니. 그게 중요…하죠. 네.”   코지는 급히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 전까지 습격자와 맞서 싸웠을 사람에게 언성을 높이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본인이 몸 상태는 괜찮다고 증언했으니, 우선은 정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벽에 파묻힌 용인의 사체와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안은 가벼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소리가 들리기에 안 보이게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쯤 벽을 넘어왔을 때 기습해서 깜짝 놀라게 했죠. 그러자 당황해 투과능력의 제어를 잃더군요.”   이안의 설명이 간결하고 정확했기에 코지는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보아왔던, 여전히 대격변 시기의 악몽에 시달리던 0세대 헌터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으니.   “이건 대단하군요…. 어쩌면 C급 심사 필요 실적까지 전부 채우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이안은 이번에야말로 ‘운이 좋군!’을 외칠 뻔했다.*** 하지만 이안의 호운(好運)은 거기까지였다.“죄송하지만 지금 안전교육을 마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예?” 코지는 멋쩍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무래도 습격으로 인해 지원청 시스템에 이런저런 오류가 난 게 많다고. “이 자식들이 전자전 공격도 걸어서 말이죠. 앞서 교육이수 프로그램을 들었던 시간 기록도 전부 날아갔습니다.” 예의 긴급안내방송도 지원청 직원이 겨우 회선을 복구해서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혹시 안전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 하는 겁니까?” “물론 아닙니다. 제가 교육을 수료하신 걸 옆에서 봤으니까요. 다만 전산 시스템을 복구하고 데이터를 다시 채워넣는데 시간이 걸려서, 당장 E급으로의 갱신은 불가능합니다.” 코지는 짧으면 사흘, 길어도 일주일이면 등급 갱신이 완료될 것이라 설명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헌터는 적절한 시기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업인 사람들이었다. 겨우 일주일 정도 기다리는 것은 간단했다. “교육 수강, 수고 많으셨고…. 감사합니다. 헌터님 덕에 다른 심사실에 계셨던 분들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안에게 있어 ‘감사’를 듣는 것은 꽤나 생소한 기분이었다. 서력 시대 헌터들은 감사보다는 욕설을 많이 들었으니까. 심지어는 같은 헌터에게도 종종 욕을 들어먹었다. 목숨을 구해주었다가 ‘저건 내 사냥감이었는데 네가 감히!’ 하며 달려드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친지의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안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시무룩해졌다.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지성체의 피를 보았음에도 뒷맛이 좋은 드문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사뭇 부드러운 분위기. 이안은 자연스런 웃음과 함께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면 블러드웹이 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헌터넷밖에 몰라서요.” 코지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원래 지원청 직원이 하면 안 되는 이야기’라며 운을 뗐다. “음. 헌터넷은 헌터지원청 공식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공식’ 사이트다보니 헌터의, 뭐라고 해야 할까…. 자유로운 의견 교환은 힘들단 말이죠. 블러드웹은 헌터넷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는 장소입니다.” 이안은 성좌물 소설에서 읽었던 헌터들끼리의 은밀한 접선이 이루어지는 블랙 마켓 같은 것을 떠올렸으나, 이어지는 말에 그 정도로 탈법적인 곳은 아님은 깨달았다. “사이트 주인장이 컨셉을 영 이상하게 잡은 게 흠이긴 합니다만. 성좌 시대의 초창기부터 운영된 곳이라 이거저거 참고할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시간 되면 한 번 베스트 팁 정도는 둘러보셔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블러드웹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블러드웹이라니. 뭔가 모기가 날아다닐 것 같은 분위긴데.’ 낡은 헌터는 사이트의 이름이 거슬렸다.   ***   한편, 꼬리별의 추종자들은 불운에 탄식하고 있었다.습격이 실패해서? 아니다. 그들은 이번 헌터지원청 습격작전을 ‘약간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그들이 알아낸 보안 취약점 중 하나만을 이용했음에도 이전 습격에 비해 헌터들의 반응이 현저히 느려졌음을 확인한 까닭이었다.본래 이번 지원청 습격의 목적은 지금까지 습득한 보안 취약점의 신빙성 검증. 차후에 있을 본격적인 전쟁에 앞선 사전 조사 작업으로서는 훌륭한 성과였다.   이번 습격 이후로 한동안 헌터지원청의 경계태세는 더욱 삼엄해질 것이나, 추종자들에게는 아직 많은 팻감이 있었으므로 그 정도는 감안할 수 있었다.   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추종자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습격과는 별개로 주교가 직접 지시한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신참 녀석. 도대체 뭘 한 거지? 저등급 헌터 한 명도 못 죽이고 오히려 자기가 죽어 나자빠지다니.”   검붉은 비늘의 용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그들의 구역 셰올을 담당하는 주교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었다. 주교의 인장이 찍힌 편지의 봉인 아래로 짧고 간결한 문장이 이어졌다.   시기. 결행 당일.   대상. 지원청에서 승급 심사를 보는 저등급 헌터 전원.   처분. 확보 혹은 제거.   평소에도 종종 내려오는 종류의 명령이었다. 차후에 강대한 헌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미리 포섭하거나, 혹은 싹을 잘라두는 작업.  추종자들은 이를 ‘솎아내기’라고 불렀다. 이런 솎아내기의 대상자가 된 헌터들은 보통 출중한 재능과 부족한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직 제 능력을 온전히 개화하지 못했기에,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심장을 먹는 용인들에게 있어서 이는 양질의 심장을 편히 얻을 수 있는 드문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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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추종자들은 솎아내기의 주역으로 싹수 있는 신참을 선정해 실전경험을 쌓고 새로운 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그 싹수 있는 신참이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렸다. F급 헌터의 심장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고.   녹색 비늘의 추종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원청 내부 사정에 정통한 첩자였다.   “운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운? 이게 그냥 운이 좀 없었다로 설명될 일인가? 불운이 아니라 무능이겠지!”   “승급 심사를 보던 헌터 중에 0세대가 끼어있었답니다.”   “…아.”검붉은 비늘의 용인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필이면 제일 처음 만난 상대가 그 흉악한 족속이었단 말인가.   0세대 헌터.   대격변의 시기, 용인들의 윗세대를 잔혹하게 도축해 온 광기 어린 집단.   “그건. 운이 없었군.”   추종자들은 신참을 향해 2분간의 짧은 추도 시간을 가졌다.   ‘가엾게도. 하필이면 미치광이를 만나서.’   신참의 영혼이 옛 용께 무사히 돌아가기를 기원하던 검붉은 용인의 머릿속에서 사소한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옛 용께서 시선을 보낸 헌터는 누구였을까.   보통의 성좌들이라면 예의 0세대 헌터에게 눈길을 보내겠지만, 그들 용인과 0세대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있지 않은가.   용의 저울에 오른 것이 0세대 헌터였다면 포섭 혹은 사살이 아니라 무조건 사살이었을 터다.   검붉은 용인은 예의 0세대를 뇌리에서 지웠다. 그러고는 그날 심사를 보았던 다른 이들의 명단을 확보하라는 상식적인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