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rawler

피그물(2)

0세대 헌터가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피그물(2)

‘블러드웹이라.’   이름이 조금 거슬리기는 해도, 양질의 정보가 있다는데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본래 그는 지원청의 공용 컴퓨터를 이용해 블러드웹에 접속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원청은 습격 사건의 수습을 위해 대부분의 구역이 출입 통제가 걸린 바.   이안은 헌터지원청의 게이트 실종자 복귀 지원정책으로 받은 휴대전화형 통신 단말기를 활성화시켰다.   지금까지는 평소에 쓸 일도 없고, 전화기를 들면 한 손이 묶이기도 해서 아예 전원을 꺼 두고 품 속에 넣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단말기의 화면에 ‘오세아니아’라는 로고가 떠올랐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사라진 대륙의 이름을 따와서 회사의 이름을 지은 건가?’어쩌면 이 회사의 창업주는 오세아니아 출신 0세대 헌터였을지도.   그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복잡하고 귀찮은 인증 절차는 모두 ‘나중에 등록하기’를 선택하여 넘긴 다음.   곧바로 인터넷 브라우저에 블러드웹을 검색한다. 검색창 최상단에 링크가 떠오른다.    망설임 없이 링크를 터치한 이안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눈을 몇 번 끔벅거렸다.   그리고 곧장 화면을 닫았다.   “내가 뭘 본 거지?”   ***   블러드넷의 홈페이지에 무언가 끔찍한 이미지가 걸려있지는 않았다.   사실 이미지 자체가 없었다.   아이콘이니 픽토그램이니 하는 가독성 좋고 세련된 디자인적 요소가 모두 배제된 채, 오직 바탕색과 글자만이 나열된 모습.   ‘이건….’   PC 통신이었다.   사실, 진짜 PC 통신처럼 파랗거나 검은 바탕색에 하얀 글자로 이루어졌다면 이안 역시 이토록 경악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블러드웹은 빨강 바탕에 검은 글자라는, 사람의 시력을 공격하는 수준의 처참한 웹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안은 기함하며 페이지 소스를 열어보았다.   “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이트 주인장이 영 이상한 컨셉을 잡았다는 말이 즉각 이해되었다. 다른 사이트 홈페이지의 소스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량.   그러니까. 블러드웹의 창조자는 일부러 시간과 예산을 들여가며 이런 시각테러급 홈페이지를 구축한 것이다.   이안은 이걸 만든 작자가 흡혈귀가 아닌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급히 블러드웹에서 빠져나온 이안은 다른 사이트 몇 곳을 돌았다. 여타의 사이트는 헌터넷과 비슷하게 여러 디자인적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해 두었다.   오직 블러드웹만이, PC 통신 시절의 디자인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안은 뒷목을 잡았다. 사실 저건 헌터들의 시력을 저하시키려는 흡혈귀의 함정 아닐까?   그는 여러 사이트를 뒤져 블러드웹 개수 스크립트를 찾아냈다. 사이트 디자인의 근본은 어떻게 뜯어 고칠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배경색과 글자색 정도는 보기 편하게 만들 수 있었다.   연녹색 화면에 검은 글자. 이안은 한숨을 쉬며 블러드웹을 들여다보았다.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고급 정보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구조인가?’   몇 가지 게시판에 접속을 시도해 보았지만 대부분 ‘회원 열람 가능한 게시판입니다’ 따위의 안내문이 나올 뿐이었다.   비회원이 확인할 수 있는 게시판은 공지사항 정도. 그는 공지사항에 있는 이번 주의 징계목록 게시글을 열어보았다.   『온누리_283과…』   ‘아니. 어떻게 회원 닉네임마저 PC통신 같을 수 있지?’   이안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뒤에 숫자가 붙는 부분은 그 시절 감성과 다르긴 했는데, 아마 중복된 닉네임에 붙는 일련번호인 듯 싶었다.   『zX정령지존Xz간의 분쟁에 대한 처분』   이안은 미래시대에서 그윽한 옛 시절 인터넷의 향취를 맡았다.   ‘이건 PC통신보다는 한 걸음 뒤에 유행했던 작명법일 텐데.’『양측 모두 활동정지 3일이니라. 핏빛 거미줄에 의탁한 이상 모두 여의 권속인 바, 다들 사이좋게 지내야 하느니라.』   “…?”   이안은 쓰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운영자가 사용하는 단어에다가 어투까지. 모든 게 소름끼칠 정도로 익숙했다.   특히 ‘~니라’하는 저 고풍스러운 어미(語尾)가 그러했다. 헌터들과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조차 저런 식으로 여유와 품격을 과시했으니까. 보거라. 밤의 사냥꾼들이여. 우리의 시간이 다가왔느니라! 너희의 분투와 의지를 치하하며,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혈족이 되어라. ‘저런 말을 핏빛 만월 아래에서 외칠 때는 압도적인 분위기였는데….’   PC통신 인터페이스의 웹사이트 게시글에서 보니까 영 하찮아보였다.   이안은 스크롤을 위로 울렸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기대감, 긴장, 두려움과 흥분.   마치 공포영화에서 굳이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로 향하는 주역들을 볼 때와 같은 느낌. 약속된 파멸로 향하는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답답함과 두근거림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과 흡사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이안은 게시글 옆에 작게 적혀 있는 운영자의 닉네임을 보았다.   왕녀.   이안은 단말기를 집어넣고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장갑 특유의 한기가 열 오른 낯을 식혀주다가, 이윽고 열기가 전염되어 미지근하게 물들었다.   “하아….”   인생.   ***   존재론적 충격에 직면한 이안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다른 혈족 아닐까?   왕녀를 너무나도 존경해서 그런 닉네임으로 컨셉을 잡은 흡혈귀?   이안의 감성은 이 가설을 믿고 싶어했다.

d3kza0VLSVdxajZ6L09aWC8xUnR2TkZ5Ky9FbTdkbHQ3bWxyRjk2UmgxSXRnNTlMOXp1ckE1bXl2OWg5MUoraA

하지만 이안의 이성은 이 가설을 부정했다. 적어도 이안이 아는 ‘혈족’에 속한 흡혈귀라면 감히 왕녀의 이름을 참칭한다는 발상조차 불가능했으리라.   그는 블러드웹을 더 둘러보거나 회원가입을 하는 대신 외부 사이트에서 블러드웹에 대해 검색을 이어갔다.   대부분의 글은 ‘사이트 UI가 왜 이렇게 이 모양 이 꼴이냐’하는 성토였고, 그를 뒤잇는 글은 ‘나름 쓸만한 정보가 많다’는 평가였다.   이안은 왜 블러드웹의 자료가 외부 유출이 안 되는지 알아보자는 글에서 ‘사이트 주인장 소속사가 주기적으로 퍼간 글을 단속한다’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소속사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안은 직감했다. 알아버렸다가는 분명히 자신의 이성에 큰 피해를 입힐 내용이었다.   그러나 저 자칭 –타칭 왕녀일 가능성도 분명 있었지만, 이안은 그걸 최대한 외면하고 싶었다- 왕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보아야만 하는 정보기도 했다.   심연을 들여다볼 각오를 마친 사냥꾼은 왕녀 소속사라는 키워드를 넣고 검색창을 열었다.   『헌터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선두주자, BM(BloodMoon) 엔터테인먼트의 초대 헌터-아이돌, 왕녀에 대해 알아보…』   사냥꾼은 검색창을 닫았다.   ***   이안은 극기에 가까운 인내심을 발휘하며 BM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정보글을 정리했다.   성좌 《마르지 않는 갈증의 군주》를 모시는 붉은 교단에서 자신들의 교세를 늘리기 위해 홍보 목적으로 설립한 헌터 엔터테인먼트 기업.   이안은 이 한 문장에서 벌써 몇 번이고 당혹을 느껴야 했다.   저 갈증의 군주라는 성좌는 당연히 그 무시무시한 드라큘라일 터였다. 드라큘라를 모시는 교단이라면 물론 흡혈귀일 테고.   그런데 그 흡혈귀들이 ‘저기 인간이 있습니다.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회적인 개체로군요. 하지만 지금은 제 저녁이죠’라며 인간을 잡아먹는 대신.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흡혈귀가 되어보아요! 지금 가입 시 성좌 계약 무료 주선!’을 외치면서 호객행위나 하고 있다고?   그리고 헌터들은 흡혈귀를 때려잡는 대신 ‘와 나도 안 늙는 흡혈귀나 되어볼까’ 하며 흡혈귀 아이돌 직촬 영상이나 보고 있고?정리글에 따르면 ‘왕녀’는 수십년 전 일어난 S급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주고는 은퇴했다.   은퇴 이후 왕녀의 소속사인 BM 엔터에서는 정보 유출을 심각하게 경계하여 왕녀 개인의 사진을 비롯해 왕녀와 약간이라도 연관 있는 게시글에 저작자 권리를 행사하여 내려버렸고.   블러드웹 출처 게시물 역시 그 비슷하게 단속 중인 모양새였다.   이안은 정리글을 숙독하고는, 공원 벤치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조들은 어째서 흡혈귀의 존속을 용인했고, 이 세상에 돌아온 왕녀는 또 무슨 이유로 헌터-아이돌이라는 기이한 직책을 맡았을까.그가 알아본 바, 헌터-아이돌은 그가 아는 연예계 직업과는 다소 다르기는 했다. ‘우상’이라는 단어의 본뜻에 충실하게 선망받는 헌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소속 성좌를 홍보하는 인플루언서에 가까운 느낌.‘그렇다 하더라도, 그 고고한 왕녀가 스스로를 광고탑으로 삼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안은 비취 목걸이를 매만졌다.   으레 서력 시대에 전해진 마법이 그러하듯 비취 목걸이에 걸린 마법 역시 보이지 않는 조건이 아주 많이 있었다.   상대방이 멀리 있을수록 더 많은 마력을 소비한다. 추적 대상에 대해 아는 게 많을수록 소비 마력이 줄어든다 같은.“…후우.”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녀’라는 닉네임을 쓰는 누군가가, 한때 헌터-아이돌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업종에 종사했고 현재는 은퇴하였으며 블러드웹이라는 개인 사이트 운영자라는 정보를 알고 있는 지금.   비취 목걸이의 추적 기능이 작동할 것인가?   현재 비취 목걸이에 충전된 마력량은 거진 바닥 수준이었다. 완충되었을 시의 밝기를 기준으로 비교하자면 1할 이하.   만일 이런 상황에서도 목걸이가 작동하여 왕녀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안내하기 시작한다면.   이안 옆집에 왕녀가 살고 있거나 왕녀가 하루에 한 번 인터넷에 ‘왕녀니라!’ 하는 뻘글을 쓰고 다니는 취미를 가진 전직 아이돌이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