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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물(3)

0세대 헌터가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피그물(3)

마음을 굳게 다진 이안은 비취 목걸이를 작동시켰고, 한참 동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는 이중의 충격에 휩싸여 배회했다.블러드웹 운영자 ‘왕녀’가 그가 아는 왕녀였다는 진실이 첫 번째요, 왕녀가 정말로 이 도시에 있었다는 것이 두 번째.왕녀의 향방을 깨달은 이안은 밤새 도시의 그늘을 떠돌아다니며 생각했다.   승률은 한 없이 낮다. 그럼에도 왕녀 사냥에 도전해야만 할 것인가?   이안은 성좌시대에 표류한 첫날부터,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질문을 두고 고심했다.   그리고 매번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였다.  시일은 다가오는 낮이 적당하리라. ***   왕녀는 잿빛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왕통을 이은 자, 언제나 스스로의 직위에 걸맞은 품격을 지켜야만 하니.   매니저가 옆에 와 재잘거렸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니 하는, 평소대로의 찬사다.   왕녀는 BM 엔터테인먼트, 곧 붉은 교단에서 붙여준 이가 상당히 거북했다.   개인적으로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이 시대에 새로이 태어난 밤의 귀족들이 왕녀에게는 아직까지도 낯설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셰올에 이렇게 길게 머무르시는 이유가 있나요?”   매니저의 물음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는 마탑연맹 런던의 별장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왕녀는 심중의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지 않았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이 도시에도 나름의 추억이 서려있느니라.”   사실 그녀가 추억을 쌓았을 당시에, 이 도시의 이름은 셰올이 아니었다.   한때 이곳은 서울이라 불렸다. 대격변의 시기 동안 발음이 부정확하게 전달되어 지금과 같은 이름이 되었지만.   그녀의 옛 적수들이 바뀐 이름을 들었다면, 바뀌어도 뭐 그리 불길한 이름으로 바뀌었느냐며 한 마디씩 던질 터였다….   “늙은이는 본래 추억을 쫓으며 사는 법 아니겠느냐.”   매니저는 꺄르르 웃었다.   “늙으셨다뇨!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왕녀는 함께 웃어주었지만, 그렇지 않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본디 지금과 같은 잿빛이 아니라 보다 윤기나는 은빛이었으니.   왕녀는 눈을 감았다.   “아.”   “네?”   “저 아래의 카페가 맛있다던데, 커피 둘…. 아니. 내 몫까지 세 잔. 그리고 함께 곁들일 다과를 사와주지 않으련? 손님이 오는구나.”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그리고 자신을 셰올로 발걸음하게 만든 손님이 드디어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숙적의 심장에 새긴 낙인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   스위트룸의 문을 연 매니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도 어디에서도 ‘손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왕녀를 홀로 두는 것은 다소 불안하지만 어쩌겠는가. 매니저로서의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려면 때로 밀착주시 대상과도 종종 떨어져 있어야 하는 법.  너무 과도한 관심은 위화감 을 준다. 손님의 잔까지 3잔을 주문했으니 손님의 정체를 숨길 생각도 아닌 것 같고. 매니저는 여러 계산 끝에 평소대로의 모습을 연기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매니저가 그렇게 열고 나간 문이 닫혔다.   “흐응. 솜씨가 그렇게 녹슬지는 않은 모양이로구나.”   왕녀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자신의 배후를 점한 사냥꾼의 존재감을 느끼며.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짧은 순간, 사냥꾼은 그림자보다도 더 은근하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숙적아. 네가 보다 신사적으로 변했다 한들, 역시 아직 진정한 품격을 갖추기에는 모자르니라. 레이디 앞에서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니, 4점을 주마.”   신사적으로 변했다는 표현은 두 사람이 서력 시대의 서울에서 만났을 적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왕녀는 호텔의 스위트 룸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안은 로프를 이용한 강하작전에 가까운 수법으로 유리창을 깨부수며 왕녀와 대면했고.   서울 호텔에서의 전투는 이안의 패배로 끝났다. 왕녀가 그의 심장을 취하려던 순간, 다른 동료들이 난입한 덕에 구사일생했을 따름.   ‘…어쩌면 그때 결착을 냈어야 했을지도.’“역시 알고 있었나.”   “그럼. 그 낙인을 누가 새겼다고 생각하느냐?”   예상대로였다. 이안이 투명화 외의 다른 은폐 수단을 갖추지 않고 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낙인이 존재하는 한, 왕녀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는 없으니.   왕녀는 셰올, 호텔 글루스캅의 스위트 룸에서, 그때와 같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안을 맞이했다.   “자리에 앉아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서로 할 말이 많을 듯 한데.”   이안은 자신의 위치에 정확히 꽂히는 왕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망건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나간 자는?”   “…그래. 너로서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단 말이지.”   왕녀는 씁쓰름히 미소지으며 답했다.   “혈족(血族), 아니. 혈맥(血脈)이다.”   ***   혈맥.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안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처럼 생혈로서 어버이와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성좌와의 계약을 통하여 새로이 흡혈귀가 된 이들을 부름이라.”   쌍무적 계약으로서 권능을 대가로 수여받은 이들이기에, 피와 피를 나눈 가족族이 아니라 그저 같은 흐름脈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혈맥.   “너희 족속의 차세대라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사람의 피 냄새가 안 나던걸.”   “그 또한 당연한 일이니라. 저들은 사람의 피가 아닌 몬스터의 피를 바쳐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으니.”   이안은 잠시 심호흡을 하다가, 이윽고 물었다.   “그게 흡혈귀가 맞나?”   “나로서는 밤의 귀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만, 우선 질문에 먼저 답해주마.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으랴?”   저 위대한 시조 드라큘라와 계약을 맺어 힘을 하사받았으니, 저들이 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할 결격사유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혈맥들은 왕녀보다도 더욱 드라큘라에게 가까운 입장이었다.   왕녀는 서로 다른 분파의 장로들이 모여 ‘왕’, 드라큘라를 재현하기 위해 모든 장로의 생혈을 모아 빚어낸 존재였다. 즉, 드라큘라와 왕녀 사이에는 장로의 세대가 끼어 있다.   하지만 지금 혈맥들은 성좌 《마르지 않는 갈증의 군주》와 직접 계약을 나누었으니, 더욱 진혈(眞血)에 가까운 세대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안은 다시 생각했다. 왕녀보다도 더욱 드라큘라에 가까운 존재라니. 어째서….   “어떤 이유로 내 동료들이 너희를 살려주었지? 너희들은 또 왜 얌전히 있었고?”   “아, 간단하다. 도마뱀들이 자아낸 혼란기에 뭇 별들과 계약을 맺은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도마뱀. 렙틸리언의 멸칭. 역시 대격변의 근원은 렙틸리언이었나. 이안은 왕녀의 언명을 귀기울여 들었다.“설령 성좌의 계약자들 하나하나를 걸러 혈맥이 된 자들을 색출했다고 치자. 살아남기 위해 혈맥이 되기로 선택한 이들 전부를, 너희 동료들이 숙청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으로 흡혈귀가 된 헌터 전원을 몰살하려 드는 것은 동료들의 방식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내가 사라진 틈을 타 혈족을 멸절시켰느니라. 허나, 내 위대한 시조께서는 새롭고, 더 나은 방식으로 그늘을 드리우신 게다.”   이안은 왕녀의 말 마디마디에 깃든 묘한 애수를 느꼈다. 그것이 이안 자신을 더 두렵게 했다.   왕녀는.   “어찌 그런 표정을 짓느냐, 두렵기라도 한 것이냐?”   새 시대 흡혈귀들의 종주로서 서력 시대의 헌터들로부터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과 다름 없을 왕녀는.   “그렇다면 퍽 실망스럽구나, 숙적아. 나의 닮은 꼴, 내 대극의 의지가 이토록 무뎌져서 돌아오다니!”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여튼, 우리는 혈족이 낳은 가장 극단적인 피조물이 아니더냐. 나는 걸작이었고, 너는 재앙이라는 방향성의 차이는 있었지만.”   왕녀가 논하는 바는 일종의 도시전설이었다. 이안 자신이 헌터로 각성하게 된 계기를 두고 밤의 족속들 사이에 떠도는 구전 설화.   이안의 헌터 경력은 흡혈귀 장로 한 명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   그는 ‘기억의 장로’라 불렸다. 그가 흡혈로 허기를 채우기 전에, 희생자에게 덧입히는 특별한 조미료 덕분이었다.   흡혈귀가 음미하는 혈액의 맛은 희생자의 인생, 나아가 영혼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여, 최고의 진미를 추구하던 기억의 장로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생물에게는 돌고 도는 영혼이 있다. 피를 통해 전생의 기억을 각성케 하면, 보다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헤라클레스의 현신이니 아서 왕의 환생이니 하는 전설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 발상은 기억의 장로의 식탁을 한결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기억의 장로는 꾸준한 미식을 통해 오래된 영혼이 깃든 피를 알아보는 안목마저 지니게 되었다. 좋은 식자재를 간파하는 요리사의 식견이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기억의 장로가 심혈을 기울여 만찬의 재료로 선정한 메인 메뉴였다.   하지만 그날 밤.   시체가 된 것은 이안이 아니라 기억의 장로였으니.   밤의 족속들은 기억의 장로가 무시무시한 흡혈귀 사냥꾼의 기억을 일깨웠다 말하며 두려워했다.   ***   ‘사실은 전혀 달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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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장로가 전생인지, 무엇인지 모를 기억들을 각성시킨 것은 맞았다.   하지만 기억의 장로의 사인은 슈퍼-흡혈귀 사냥꾼으로 각성한 이안 자신의 반격이 아니라….   ‘식중독이었으니까.’   기껏 해봐야 전생, 특출나도 전생의 전생까지의 기억이 떠오르는 게 전부였던 그 마법은 어째서인가 이안 자신에게는 다른 효과를 발휘했다.   수많은 전생의 기억이 동시에 떠오른 것이다.   허나 그 기억 대부분은 흡혈귀에게 영양가가 없었다.   오히려 독이 될 지경이었다. 이안의 기억은 돌연사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3개월의 벽을 넘었던 기억부터가 희소하고, 20살을 넘었던 것도 지금 살아가는 삶을 제외한다면 한 번 뿐.   그렇게 한없는 죽음이 겹친 혈액을, 정도 이상으로 먹은 기억의 장로는 그대로 죽어버렸다. ‘상했잖아!’ 하는 단말마만을 남기고.   이는 이안 자신과 스승만이 아는 비밀로 남았다.흡혈귀들로서도 전투 중에 흘린 피 몇 방울 가지고는 이안에게 잠재된 독성을 미처 파악할 수 없었으니.   이안에게 흡혈귀 사냥을 위한 최후의 무기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가 성좌 시대에 홀로 표류했음에도 곧장 왕녀를 찾아내 결착을 내고자 결심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흡혈귀들은 자신과 훌륭하게 맞서 패배한 인간을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기념했다.   당연히도 그 방법은 흡혈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흡혈과 달리 뼈를 포함해 모든 육신을 온전히, 한 번에 집어삼키는 것.   그들 나름의 ‘품격있는’ 기념식이었다.   사실 말이 품격이고 기념이지, 헌터들의 분석으로는 다친 상처와 소모한 혈액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 있는 고열량 식품을 집어먹는 것에 가까웠다.   이러한 흡혈귀들의 습성 덕에, 이안은 어떤 흡혈귀라도 살해할 수 있는 독주(毒酒)나 다름없었다.   …일회용이지만.   이안은 자신이 혼자서는 흡혈귀의 왕녀에게 승리할 수 없음을 확신했다.   동시에, 이안은 자신이 홀로 흡혈귀의 왕녀를 사냥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하여 최대한 빨리 왕녀와 만나, 먹이가 되어서라도 녀석을 이 세상에서 영영 지워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왜 자신이 아닌 저 녀석조차도.   지금 시대에 지쳐버린 것처럼 굴고 있단 말인가.   왕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동자에서 혼란을 읽어냈다. 그녀는 고민 없이 이안이 원하는 답을 말해주었다.   “흐음. 숙적이여. 그대는 내가 왜 이토록 협조적인지를 궁금해하느냐? 세상의 지배를 위해 혈맥들 사이에 군림하는 대신, 왜 이런 곳에서 홀로 너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그래.”   “생각해 보거라. 이 땅에 혈족은 이제 없다.”   왕녀의 동족은 절멸했다. 그것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이들만이 남아 옛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할 뿐.   “내가 너와 함께 빠진 깊은 혼돈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혈족은 사라지고 혈맥만이 남아있었지. 내가 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내 신민들을 이끌어 세계를 정복하겠도다?”   왕녀는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결론이 틀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녀는 그 순간을 기억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마침내 동족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을 때.   헌터 사회의 주류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동시에 혈족처럼 헌터들을 온전히 적대할 수도 없는 신민들과 마주했을 때.   그들은 왕녀의 권능을 보며 두려워했지만, 왕녀는….   “‘우리는 실패했구나’였느니라.”   혈맥을 보며 깨달았다.   저들이 혈족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태어난 성공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