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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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빛.“…….”고개가 살짝씩 아래로 기울었다. 잘 생각은 없었으나 마음과는 별개로 졸음이 밀려온 것이다.항거할 수 없는 수마에 잠에 빠져들기 직전이었다.삐이익! 삐이익!별안간 울리는 시끄러운 알림음에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품속에 손을 넣었다.통신용 마도구. 중앙 부분의 버튼을 누르자 소리가 사그라들고 임무 지시가 떨어졌다. -붉은바위산 지하 드워프 도시에서 지원 요청. 고대의 마물 ‘발탄’ 척살. 상세 내용은 도착해서 들을 것.지시가 끝나고. 눈두덩이를 문지르면서 일어났다. 눈을 뜨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게 언제였더라.”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운 게 며칠이나 됐지?몸은 뻣뻣하고 귀에서 이명이 울린다. 그의 몸은 쉬고 싶다고 전신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하지만 마냥 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카데마 왕국에 즐비한 위협과 문제들을 처리하는 게 리안의 일.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린다면 금세 일이 쌓이고,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피곤하지만… 그래도 뭐, 다 끝나고 쉬면 되니까.”국왕과 직접 약속했다. 딱 십년만 일하고 그만두기로.맹약을 맺은 날로부터 벌써 구년여가 지났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기까지 며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곳에서 드워프 왕국까지 이동하는 데 이틀. 거기에 발탄을 토벌하는 시간까지 더한다면.이번 임무가 그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었다.“후우….”이번까지만 고생하자. 딱 이번까지만.마음을 다잡은 그가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이럴 순 없다.”고대의 마물, 발탄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의 가슴팍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이 몸이 고작 인간 따위한테 패배하다니! 이럴 수는 없단…!!”말이 끝나기도 전에.서걱!검이 깔끔한 호를 그렸다. 목에서 녹색 피가 비산하고, 경악에 물든 얼굴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고대의 대악마, 지저의 지배자, 난쟁이들의 공포, 무저갱의 파수꾼….수많은 악명을 떨친 거악 치고는 참으로 비루한 최후였다.철컥.리안은 말없이 피로한 얼굴로 검을 회수했다.수천년간 지하세계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재앙을 단신으로 척결했다.영원토록 칭송받을 위업을 이룩한 것이었으나, 정작 그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흥도 찾아볼 수 없었다.-리안! 자네 괜찮나? 살아있으면 말 좀 해보게!!멀리서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를 찾는 목소리였다.발탄은 그가 여태껏 상대한 적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난적이었다. 주변을 신경써가며 싸울만큼 여유로운 상대가 아니었다.다른 이들을 전부 물릴 수밖에 없었는데.멀리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다가, 전투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오자. 이를 리안의 패배로 오해한 모양이었다.“전 괜찮습니다! 이제 오셔도 됩니다!” 피곤한 기색을 거두고 크게 소리쳤다. 땅굴에 숨어 기다리던 드워프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수염은 뒤엉켜있고 얼굴은 돌가루로 지저분했으나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해선 안 된다.붉은 수염 카퍼. 그는 무려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제일가는 명장이었다.“끝났나? 끝난 건가?”“예. 끝났습니다. 확실하게 죽였으니 이제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리안이 손을 뻗어 발탄을 가리켰다. 카퍼가 홀린 눈으로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생명이 다해 빛을 잃은 동공과 눈을 마주했다.그제야 발탄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인 것일까. 그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맙네! 자네는 우리 종족의 은인이야! 저 빌어먹을 놈한테 여태까지 잡아먹힌 동족이 몇 명인지.”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그가 연신 코를 찡긋거렸다.“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평생 놈의 먹잇감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을 거야. 자식 세대에도, 자식의 자식 세대에도. 평생 어둠 속을 두려워하다 언젠가 한입거리 식사가 되어 생을 마감했겠지. 고맙네, 정말 고마워….”“…….” 리안은 침묵했다. 종의 역사 평생을 피식자의 입장에서 살아온 그들이었다.뭐라 위로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크흠, 내 정신좀 봐. 은인을 앞에 모셔놓고 내 얘기만 했군. 늙어서 그런가 가끔 감정이 격해진다니까…. 며칠만 기다려주게. 내가 아주 성대한 축제를 열 테니!!”카퍼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리안이 침음을 흘렸다.“음….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카퍼가 화들짝 놀랐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설마 당장 떠나겠다는 건가?!”“하하….”뒷말은 흐렸지만 그 웃음은 사실상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카퍼는 황당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자네, 쉬지도 않았지 않나! 상처도 있고,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싸웠는데. 휴식도 취하지 않고 떠나겠다고??”리안이 카데마 왕국의 용사로서 맡은 바 역할이 막중하고 수많은 일정으로 바쁘단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 이번 일로 왕국과 맺은 계약이 끝났거든요. 그냥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음…. 그래도 우리 종족을 구해줬는데 아무 것도 해주지 말라니.”“왕국 소속으로 한 일이니까요. 왕국에 주기로 한 보상 있지 않습니까.”“그건 맞지만… 그래도….”카퍼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져갔다.“정 그러면 보수 공사를 마친 다음에 연락 주시죠. 어차피 여기도 좀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산맥의 땅밑 깊은 곳에 세워진 지하도시.드워프 특유의 석재 가공 기술과 건축 기술의 진수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곳은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에 가까웠다.허나 현재는 발탄과 벌인 전투의 여파로 대부분이 훼손되어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그건 그렇지.”“재건 작업이 끝났을 때 연락 주시면, 제가 그때는 다른 일들 다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오겠습니다.”“그래. 그러면… 이제 떠나는 건가?”“예. 이제 떠날 예정입니다.” 그 말에 카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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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고맙네. 우리 종족을 구원해주어서.”리안이 황급히 카퍼를 일으키자 그가 튀어나온 입으로 말했다.“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하게 하고 말이야.”“이미 많이 받았으니까요.”“에잉. 난 그럼 가보겠네. 여길 원상복구하려면 하루 빨리 장인들을 데려와야 하니까 말이야. 자네도 어서 가보게.”카터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땅굴 속으로 나아갔고, 리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지하도시를 빠져나갔다.타악! 타악!도약을 한번 할 때마다 시야가 휙휙 변했다. 그는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중이었다.그의 얼굴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입가엔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에 깊은 파문을 안긴다.몸은 고단하고 정신은 피폐해지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자주 맡게 되어도.리안이 용사 노릇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건 순전히 맹약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이유도 섞여 있었다.아무런 보수도 보람도 없이 그저 약속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면 오래 못 가고 나가떨어졌으리라.“그러고 보니….”리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발탄과의 일전이 생각보다 길어짐에 따라 어제로 맹약의 기간은 끝이 났다.약속의 시간이 찾아왔으니 이제 헌신의 대가를 받을 차례였다.오직 이것 하나만 바라보고 십년의 세월을 달려왔으니.휴식은 완전히 마무리를 지은 이후에 취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쉴새없이 달려오니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리안은 활기찬 분위기의 수도를 지나 왕궁에 도착했다.그의 마지막 방문은 팔년 전. 왕궁은 그의 기억 속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휑했던 정원은 여러 조각상과 조형물이 곳곳마다 깔려 있었고.궁의 내부로 진입하자 벽마다 그림과 예공품, 진귀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문득 사치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흩어버렸다.어쨌든 왕국은 현재 전에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 사치 또한 부강한 국력을 나타내는 증거니까.복도를 지나 알현실에 도착했다. 문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폐하를 뵈어야겠다.”“…알겠습니다.”기사가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현실로 들어갔다. 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뭔가.’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같은데.뭐 어디까지나 특별한 이유없는 짐작일 뿐이었다. 리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기사가 다시 나오자 그는 알현실로 들어서려 했는데. 척.날카로운 창이 그의 앞길을 제지했다.“일단 기다리라는 국왕 폐하의 전언입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으셨습니다.”“…그러지.”문앞에 서서 대기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두시간 가까이 흐르고 나서야 마침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리안은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먼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용사 리안이 왕국의 하늘, 에밀 폐하를 뵙습니다.”“음. 오랜만이군. 얼마만이지? 한 오년 됐나?”“마지막 뵜을 때보다 팔년 정도 지났습니다. 폐하는… 많이 변하셨군요.”고개를 든 리안이 에밀을 쳐다봤다. 팔년만의 만남. 그의 변화는 중년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큰 편이었다. 노화뿐만이 아니었다.선명히 보이던 턱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옷이 세 치수 이상 커진 데다가. 여유로웠던 옥좌가 이제는 비좁게만 보였다. 시녀가 따라준 차를 홀짝이며 에밀이 입을 열었다.“팔년이나 지났나? 뭐, 사람은 누구든 변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웬일로 찾아온 건가?”리안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기억하십니까. 십년 전 저와 맺으셨던 약속을.”국왕과의 첫 조우를 떠올렸다. 십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십년 동안만 왕국을 위해 일해준다면 그의 바람을 들어주겠다 말하는 그의 모습을.“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폐하의 차례입니다. 마경 원정을 선포해주십시오.”마왕. 대륙의 북단 마경 한복판에 머무르는, 인류의 가장 강대한 적.…그리고 친구와 가족. 나의 세상을 모조리 앗아간 침탈자.열다섯 살. 마을을 침략한 마족들에게 전부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 앞에서 울면서 다짐했다. 반드시 마왕의 목을 베어 이들의 넋을 달래리라고.며칠에 걸쳐 그들을 모두 묻은 뒤 고향을 뛰쳐나왔다. 한자루 검을 들고 강해지겠단 일념으로 왕국 곳곳을 떠돌았다.다행히 그에겐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무위가 얼마나 고강하든 단신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마경은 온갖 마물들과 마족들로 득시글대는 험지. 쉴새없이 적이 쏟아질 뿐더러 드넓은 대지가 온통 마기로 가득하기 때문에 마법을 통한 보급도 불가능하다. 무턱대고 마경으로 뛰어드는 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마왕을 죽이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규모의 물자와 인력이 필요했다. 카데마 왕국에서 태어난 그로선 왕가의 지원이 절실했다.십년동안 왕국을 위해 일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땐 한창 나라가 빈곤했던 시기여서 마왕 토벌같은 대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지금은 다르다. 카데마 왕국은 불과 몇년만에 엄청난 성장력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통치자의 뛰어남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쾌거가 아니었다.드넓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리안이 무보수로 쉬지도 않고 왕국을 도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약속했던 내용의 배 이상으로 왕국을 위해 헌신했다. 이제 헌신의 대가를 받을 차례.헌데….“허?”국왕이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마왕 토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예?”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니?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십년. 십년 뒤에 나라가 부강해지면 마경 원정대를 꾸려주겠다는 국왕의 말을.헌데 왜 갑자기 처음 듣는 얘기인 양 말을 하는 건가.“설마, 십년 전 나눴던 얘기를 약속이라고 가져온 건가? 그거야 철없는 소년의 꿈을 짓밟을 수는 없으니 대충 말했던 거고! 나이를 먹었으면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지. 쯧, 언제까지 헛된 희망 속에 잡혀살 건지….”리안이 발끈하며 소리쳤다.“헛된 희망이라뇨?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왕이 마경에 틀어박혀 수하들만 부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리고, 제 바람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면 저는 무엇을 위했기에 왕국을 위해 일했습니까? 십년을 바쳤습니다. 열여덟 살에 폐하를 만난 이후로 청춘을 다 바쳤단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감정이 격해지고 목소리가 올라갔다.“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믿었으니까! 이 길의 끝에, 마계 원정이라는 결실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일그러진 눈으로 에밀을 바라봤다. 그는 일국의 왕으로 스스로 했던 말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그러나.“하? 무슨 헛소린가? 보수가 없다니. 가는 곳마다 영웅 대접, 귀빈 대접 받으면서. 사람들의 선망을 실컷 누렸지 않나. 평민 따위는 절대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리게 해줬더니.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특별한 보상을 바라느냔 말이냐.”리안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터무니없는 궤변이었다.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그가 아니라 에밀이었다.“정신 좀 차리게. 마족이 우리 나라를 침공하지 않은지 십년이 더 지났네. 우리 왕국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 그러니까 대륙의 동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단 말이야. 헌데, 마왕 토벌을 선포하라고? 전에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 지금 나더러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으라는 소린가? 어?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에밀이 역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리안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멸시가 담겨 있었다.“무위만 높일 게 아니라 지혜도 가다듬을 줄 알아야지! 완전히 철부지가 따로 없군!”리안은 그제야 깨달았다.‘어린 청년이여. 부디 왕국을 위해 일해주게. 비록 지금은 나라가 약하여 마계 원정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져서 충분한 여력만 된다면, 내 그대의 목표를 이뤄주겠네.’십년 전 한창 이름을 날리던 그의 앞에서 터무니없는 조건의 계약을 간곡히 부탁하며 마왕 토벌을 약속했던 그날에도.“…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었군.”약속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는 걸.리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흘렀다.문득 가슴 깊은 속에서 살의가 치밀었다.‘…죽여버릴까.’이뤄주지도 않을 약속으로 그를 십년이나 속여오며 기만했다. 복수는 정당한 것이었다.무기를 맡기고 들어와 빈손인 상태지만, 근위기사를 모두 무력화시키고 왕을 죽이는 것은 맨몸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못한다면 여태 용사 임무를 해오지도 못했겠지. 모든 과정을 끝내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을 손쉬운 난이도였다.허나….리안은 주먹에 준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준비되지 않은 왕의 죽음은 크나큰 피를 불러온다. 아직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또한, 비열할지언정 대외적으로 성군이라 칭송받는 왕이다. 그를 함부로 죽인다면 왕국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것이었다.한번의 감정을 참지 못해 불러올 대가가 너무 컸다. 잘못된 선택에 고통받을 백성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결국 리안은 어떻게든 분노를 가라앉히려 꾹 참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어쨌든 허튼 소리 말고 이제 물러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더니 나까지 머리가 아파서 좀 쉬어야겠으니 말이야.”이를 본 에밀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납득했다는 것으로 마음대로 생각하고는 왕좌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쯧, 돌아가서 다음 명령이나 기다리도록.”리안은 어두운 눈빛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시녀가 텅빈 찻잔을 들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복도를 걷다가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 길에서 왼쪽으로 돌았다.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일은 주방으로 찻잔을 전달하는 것이었고 주방은 방금 지나온 갈래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갈 수 있었으니까.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면 금세 알아차리고 돌아갔겠지만 그녀는 방향을 꺾지 않았다. 몇분을 더 걸어 시녀 숙소에 도착했다. 업무 시간에 일을 내팽개치고 함부로 숙소에 돌아왔다. 걸린다면 시녀장의 문책을 듣게 될 터. 하지만 상관없었다. 업무 평가 따위보다 이게 훨씬 더 중요했다.그녀의 본업은 시녀가 아닌 첩자였으니까.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지나 확인한 후 책장에 손을 뻗었다. 맨위 책장에서 두번째. 세번째 책장에서 세번째. 그리고 맨 아래 책장에서 첫번째 책을 순서대로 꺼낸 뒤 책들을 포개어 쌓자 책의 맨 위에 그려진 문앙이 빛나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정기 보고는 열흘 뒤일 텐데. 무슨 일이이지.음성은 잠겨 있었다. 여인의 어조에서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여인이 자고 있을 시간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수면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 또한.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건이 용건이었으니.“…용사와 국왕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짧은 정적. 그리고 몇 초 후.-쿠당탕!!마도구 건너편에서 무언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소리.그녀는 못 들은 체했다. 잠시 후. 마도구 너머에서 확 정신이 들은 듯한 음성으로 다급하게 물어왔다.-뭐, 뭐라고? 다시 말해봐.그녀는 침을 삼키고 자세한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무력 측정 불가. 접근 금지 요인 용사 리안과 카데마 왕국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정황 상 과거 맺었던 모종의 관계에 파열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제국 내각의 무소불위 권력자이자 중앙정보국의 일인자. 칼리파 국장의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