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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배신당한 용사는 악의 제국으로 간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용사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숲길을 걸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헤치고 헤쳐. 멀리서 보이는 한줄기 빛을 향해 나아가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이곳은 무덤이었다. 리안이 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수습한 묘지.무덤가 앞에 털썩 앉아 독한 술을 병나발째 들이켰다.목을 타고 내려가는 화끈한 감각을 느끼며 비석에 엉킨 덩쿨을 뜯어냈다.“…원래 기쁜 마음으로 오려고 했었는데.”최근 몇년간 일이 워낙 바빠서 찾아오지 못했다. 맹약이 끝나고 마계 원정을 선포한 이후에 찾아올 예정이었다.톡.문득 떠오른 과거에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했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평화롭던 마을에 갑작스레 나타난 마족들. 사람들은 악마가 손을 한번 휘저을 때마다 갈기갈기 찢겨졌고, 잔뜩 겁에 질린 그는 혼란을 틈타 정신없이 도망쳐나왔다.이 어두운 숲길 속으로. 숲속에 무덤을 판 이유는 남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던 스스로의 나약함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무 뿌리 아래 숨어 벌벌 떨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마을로 돌아갔을 땐 도망친 그를 제외한 모두가 죽어 있었다.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감겼고,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도 죽어라 땅을 팠다.시체를 전부 숲속으로 옮기기까지 칠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시체 위를 흙으로 덮기 직전 맹세했다. 다시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겠다고. 비릿한 혈향과 살이 썩는 지독한 냄새를 맡으며 반드시 마왕을 죽이리라 다짐했다.마음먹은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편히 잠에 든 적 없었다. 언제나 앞만 보면서 달려왔다.헌데 결과는 이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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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꼭 원한을 백배, 천배로 되갚아주겠다고 말했었는데. 마왕을 죽이기란 아직도 요원하다. 이제 와서는 과연 놈을 만날 수 있을 지나 오리무중이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자 마음이 꺾일 듯 쓰라렸다.반쯤 남은 술병을 한입에 다 털어넣었다. 머리가 아파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씁쓸한 표정으로 삐뚤빼둘한 비석의 홈을 매만지던 순간이었다.-삐이익! 삐이익!호각 소리에 리안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거센 진동이 느껴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돌아가서 다음 명령이나 기다리도록. 국왕이 알현실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설마 그게 진심일 줄 몰랐다. 약속을 개같이 내팽개친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양, 그냥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건가?분노가 차올랐다. 한편으로는 황당했다. 리안은 실소를 흘리며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다.이어진 말은 더욱 가관이 따로 없었다.-딜라트 왕국 왕성. 왕세자의 성인식 축사. 내일 오전까지 도착할 것.“하, 하하.”임무 내용을 확인하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가 아니면 막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적을 상대하는 일도 아니고.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전쟁이나 테러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가라니?리안은 광대가 아니었다. 이전에는 이런 이상한 요청에도 맹약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응했지만. 왕과의 약속이 깨진 지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마도구를 들어 던졌다. 나무에 부딪힌 마도구가 반으로 갈라졌다. 쪼개진 마정석을 쳐다보다가 생각했다.“…이제 어쩌지.”더 이상 그의 밑에서 개처럼 구르기는 싫었다. 리안은 허탈함에 실의에 빠져 있다가 문득 머리를 부여잡았다.강한 두통이 일었다.거의 한달 가까이 잠에 들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이어왔다. 육신이 초인의 경지에 다다라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진작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거기에 믿었던 왕에게 배신당하며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도수가 80도에 달하는 독한 술을 원액으로 병째 들이켰으니. 진정으로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슬슬 눈이 감겼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봉긋 솟아오른 무덤에 기대어. 리안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깊은 잠을 청했다.***새벽 네 시. 깊은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는 시간. 유일하게 불이 켜진 건물이 있었다. 커튼 너머로 수십 명의 인형이 빠르게 움직이기를 반복했다.제국법 상 새벽 두시 이후에는 열 명 이상이 한 곳에 모여 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제외였다. 그들은 법망의 위에서 활동했으니까.외국의 중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각종 공작을 담당하는. 드라케스 제국의 핵심 정보기관. 제국중앙정보국.그들은 중정 소속의 요원들이었다.“제인. 자료는. 다 정리 됐나?”국장, 칼리파는 수십 명의 요원들을 진두지휘하며 물었다. 정신없이 서류를 정리하던 부하 요원이 대답했다.“지금 거의 끝났습니다.”“정리되는 즉시 내 앞으로 올려.”카데마 왕궁의 첩자로부터 충격적인 보고를 들은 날로부터 벌써 이틀째. 상황을 파악하느라 다급했던 정보국도 이제 진정 상태에 접어들었다. 칼리파는 국장실로 들어갔다. 머지않아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철이 그녀의 책상 앞으로 도착했다.서류철 안에는 용사 리안의 지난 십년동안의 행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진짜 미친 행적이네.”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던 그녀가 남은 페이지의 두께를 가늠하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사람들은 십년이란 세월이 강산도 변할 만큼 긴 시간이라고들 하지만.아무리봐도 리안이 이룩한 업적은 십년만에 낼 수 있는 성과가 아니었다.사룡 아르자크 격퇴. 해룡 레비아탄 토벌. 망자왕 펠가인 봉인. 대미궁 정복. 차원의 틈 폐쇄….오랜 시간 악명을 떨치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던 재앙들 중 태반이 용사의 검 앞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재앙의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그가 활동하는 영역 바깥에 있거나. 죽음이 두려워 잠적했거나.그뿐이랴.아직 남아있는 쪽수를 확인하면 알 수 있듯 그는 전설적인 위업을 제외하고도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해냈다. 문서의 앞에 놓인 일들이 워낙 큰 업적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약해 보일 뿐. 그것들도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종의 한계를 초월한 듯 압도적인 무력. 하지만 제국이 가장 경계하는 그의 진가는 따로 있었다. 리안은 전장의 신이었다.몇년 전.대륙의 남부와 서부를 정복하고 십수년 간 내부 정리에 들어가 있던 제국은 마침내 대륙일통을 위해 동부에까지 야욕을 드러냈다. 하지만 야심차게 각오를 밝히며 출정한 것과는 달리 그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는데.그들이 퇴각한 이유는 단 하나. 용사의 존재 때문이었다.전력상 한없이 우세한 전투. 변수가 있다면 용사 하나뿐. 제국 군부는 병력을 나누어 놓았다가 리안이 1전선에 나타나자 즉시 5전선에 총공세를 벌였다. 1전선과 5전선의 거리 차이는 약 600키로미터. 용사가 아무리 대단한들 몸은 하나 아니겠는가. 군부는 양동 작전을 펼쳐 야금야금 동부를 집어삼킬 계획이었다.그런데 용사는 고작 두시간만에 5전선에 나타나 제국군들을 모두 패퇴시키고 다시 두시간만에 1전선에 복귀해 수비까지 성공해냈다. 훗날 그때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성 하나가 회고하길 진짜 미친 새끼를 보는 줄 알았다고.대륙 제일의 무력에 행동력까지. 리안은 중증 수준의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제국의 발호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가파른 성장세가 최근들어 팍 꺾여버린 이유가 동부 왕국 연합을 수호하는 저 용사 때문이었다.“…정말 어이가 없네.”서류철을 내려놓고 책상에 놓인 다른 문서를 집어들었다. 리안이 카데마 왕국의 알현실에서 국왕 에밀과 나눈 얘기가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적힌 대화록이었다.그녀가 문서를 탈탈 흔들었다. 이걸 처음 읽었을 땐 진짜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아니, 여태까지 용사가 한 일들이 몇 갠데 그게 다 무보수였다고?게다가 그 개고생의 대가로 들어주기로 한 소원마저 말을 바꿔서 안 들어준다고?칼리파는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카데마 왕국의 15대 국왕 에밀 폰소 카데마. 그가 병신이란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왕국의 부흥을 이끈 명군이라며 칭송받지만.전부 용사 리안이라는 역사에 남을 영웅이 운좋게 자기 나라에서 태어난 덕을 봤을 뿐이고 실상은 술과 여자에 빠져 매일매일 향락을 즐기는 무능한 암군.이미 여러 번의 조사로 확정이 나있었다. 종합 평가 D급. 무능하지만 제 손으로 나라를 망칠 정도로 무능하진 않고 운은 좋으니까 내려진 평가였다.근데 그 평가에서 한단계. 아니 두단계는 낮춰야 할 것 같았다. 설마 주머니에 담긴 보석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땅에 떨어트리는 병신이었다니.깊게 고민할 것도 없다. 용사와 왕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아… 머리 아파….”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지금까지의 행적으로 판단한 용사의 성향은 절대선. 이유는 모르겠으나 리안의 도덕성엔 타협이 없었다. 그는 과하리만치 무고한 자들이 피해를 입는 일을 싫어했고 악인을 혐오했다.제국주의, 군국주의, 확장주의를 주 모토로 삼고.힘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극단적인 실력주의를 추구하는 제국과는 정반대였다.약자들이 흘리는 피는 얼마가 되었건 신경쓰지 않는다. 전쟁, 전쟁, 오로지 전쟁.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제국은 그 사상을 바탕으로 대륙의 남부와 서부를 모조리 먹어치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게 독이 되었다.명실상부한 대륙 최강자. 용사 리안이 제국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이다.국왕과의 관계는 산산조각난 것 같지만 그는 명백한 선인이었고 동부의 사람들 사이에서 구원자로 칭송받고 있었다. 설령 소속을 옮기더라도 그 안에서 적을 바꾸지 제국으로 오진 않을 것이었다.“진짜 어떡해야 하나….”처음이었다. 리안은 용사 직무를 맡고 나서 살인적인 난이도의 임무를 수행해오면서 군소리 한번 낸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맡은 일에만 충실했고 불화 한번 일으키지 않았다. 십년만에 유일하게 찾아온 기회. 이후에 이런 찬스가 또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제국의 목표인 대륙일통은 거의 불가능해져.’ 용사 정도의 강자라면 육신이 초인의 경지에 도달했을 터. 평범한 사람들보다 아득히 긴 수명을 지녔을 테니까.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마음같아선 동부 연합의 다른 왕국들도 개짓거리를 펼쳐서 용사와 사이가 틀어졌으면 좋겠지만 왕들이 전부 다 머저리도 아니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왕국 곳곳에 침투한 제국의 첩자들을 이용해 일부러 불화를 일으키는 것도 안 된다. 만약 들킨다면 격분한 용사가 즉시 제국으로 진격해 수뇌부들을 참살할 것이다.수년 전 동부 전장에서 말도 안 되는 신위를 목격한 이후 제국은 판단했다. 그를 그냥 내버려두기로.리안은 무고한 자들이 입는 피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제국을 고깝게 여길 뿐 직접적인 공격 행위를 펼치지 않았다. 제국도 굳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않았다.벌집 안의 꿀은 분명 달콤할 것이지만.특별한 방도 없이 섣불리 건드려봤자 된통 쏘이기만 할 뿐이니까.아예 접촉 자체를 금하는 게 제국이 용사를 대하는 방침이었다.“으으….”잘근잘근… 그녀가 손톱을 짓씹던 와중이었다. 쾅!문이 거세게 열리며 벽을 후려쳤다. 요원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국장님! 이거 한번 보셔야겠습니다!!”“씨, 깜짝이야. 뭔데 그게?”그가 호들갑을 떨어재끼자 칼리파는 뭔가 하는 표정으로 요원이 건넨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이게 뭐야… 신문?”종이뭉치의 정체는 동부의 여러 왕국에서 방금 막 발행된 따끈따끈한 신문 다발이었다. 신문은 정보 기관에서 민간에 드러나도 괜찮은 정보만 선별해서 다루기에 특별하지 않은 내용이 실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마저도 90퍼센트는 정보국이 미리 알고 있던 정보였고.따라서 칼리파는 별로 흥미가 없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신문을 펼쳤는데.“…!!!”가장 첫면에 대서특필된 헤드라인에 시선이 닿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