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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배신당한 용사는 악의 제국으로 간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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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몇시간 잠든게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몸의 컨디션부터가 확연히 달랐으니까.머릿속을 뚫고 지나가는 듯 했던 이명이 확실히 약해졌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감기던 눈이 이제는 멀쩡했다. 뇌에서 명령을 내려도 몸이 움직이기까지 미세한 딜레이가 있었는데 그 텀이 훨씬 줄어들었다.‘…진짜 얼마나 지난 거지?’십년 가까이 혹사 수준으로 험하게 굴려왔던 몸이다. 저번에도 몇주 가까이 쉬지 않고 버티다 잠에 든 적이 있었다. 내리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나도 피곤한 느낌이 여전했다.지금의 몸상태가 최상이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큰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걸 봤을 때 어쨌든 하루 잠들었다고 나올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일은 어떻게 됐지?’문득 잠들기 전 술김에 통신 아티팩트를 던져 깨버린 일이 떠올랐다. 순간 화가 치밀어 부숴버렸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었다.혹시 잠에 든 사이에 긴급한 위험 사태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으니까.‘일단… 다시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국왕과의 다툼은 그와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무고한 생명의 죽음은 최대한 막아야 하지 않겠나.소통 수단은 있어야 한다. 대화의 창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리안은 숲을 빠져나가려 몸을 돌렸다가 멈춰서고 뒤를 돌아봤다. 복잡한 눈으로 봉분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너무 실망하지 마. 조금 늦어지겠지만 복수는 반드시 할 거니까.”왕은 일방적으로 말을 바꾸며 약속을 저버렸지만. 그래도 대화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설득해볼 것이다.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그땐 국적을 옮기는 한이 있어도 목표를 이뤄야겠지만.'카데마 왕국에서 이루는 게 제일 좋긴 할 테지만 다른 선택지도 나쁘지는 않았다. 일하는 과정에서 동부의 여러 왕국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놓았으니까.스스로의 가치는 십년동안 온갖 험지를 구르며 몸소 보여줬다고 생각하니. 손을 내미는 국가가 하나쯤은 있지 않겠는가.“다음 번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찾아올게.”당연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안은 무덤 근처에 무성히 자라난 잡초들을 칼질 몇번으로 정리하곤 숲을 빠져나갔다.통신용 아티팩트는 왕궁에서 지급받았던 물품. 게다가 왕과 얘기도 나눠봐야 하니. 리안의 목적지는 수도였다.슈우웅!한번 땅을 박찰 때마다 근처의 배경이 달라졌다. 이대로 계속 나아간다면 수도까지도 오랜 시간이 들지 않을 것이었다.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는데.“…?”리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순간 피부에 닿는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마나의 밀도가 열배 넘게 짙어졌다.누군가가 펼친 마력 장막 내부로 진입한 것이었다.안력을 집중해 공간을 살펴보니 장막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지름이 거의 1킬로미터에 달했다. 그가 알기로 왕국 내부에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실력자는 없었다.눈에 더욱 신경을 몰두하자 수백 미터 바깥의 광경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장막의 중심. 바람결 위에 올라타 공중을 질주하는 그녀는 리안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늘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긴 귀의 여인. 제국의 주요 인물이 등재된 인명부에서 본 적이 있었다.하이엘프 칼리파. 악명높은 제국의 수뇌부 안에 당당히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거물이었다.‘저 자가 어째서 여기에?’리안은 혼란을 느꼈다. 어째서 제국의 실력자가 왕국의 영역 한복판을 휘젓고 다니는 거지? 설마, 제국이 협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켰나? …내가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것이길래?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으나 혼자만의 고민으론 단 하나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이 모든 일들의 전말을 알기 위해선.우선 칼리파를 잡아들여야 했다.결론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초 내외의 짧은 찰나. 땅을 박차 공중에 떠올랐던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발에 마력을 실어 허공을 박차자 공간이 뒤틀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리안의 몸이 포탄 쏘아지듯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갔다.도약 한번만에 칼리파의 목전에 도달했다. 그녀의 눈 위로 경악이 서렸다.용사를 찾기 위해 카데마 왕국의 북쪽을 들쑤시고 다니다 마침내 탐지에 성공했다. 찾아낸 즉시 그를 따라잡으려 했으나.눈을 깜박이는 일순 사이에 역으로 리안이 그녀의 앞에 도착해있던 것이다.“!!”칼리파가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리안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올렸다.칼리파는 드넓은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허튼 수작을 부리기 전에 확실히 무력화시켜야 했다.제압하는데 필요한 무력 이상의 힘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리안이 주먹을 쥐었다. 거대한 마력이 손 안으로 응집했다.일격에 중상을 입혀서 순식간에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직후 칼리파가 보인 행동에 그는 주먹에 넣었던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공격을 시도하는 줄 알았던 두 손이.필사적으로 리안을 지나치고 하늘로 향했기 때문이었다.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자세. 교전 의사가 없음을 몸으로 직접 드러내는 행위.‘…뭐지?’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잠깐 당황에 빠져 있는 사이. 칼리파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급하게 소리쳤다.“하, 항복!”그녀는 혹여나 리안이 생각을 바꿔 다시 주먹을 뻗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반항할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어떤 처분이든 무조건 받아들일 테니, 말로 하시죠! 말로!”…진짜 뭐지?리안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 상대가 저자세로 나오니 굳이 상처입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바닥으로 착지하자 칼리파도 따라서 땅으로 내려왔다. 리안이 말을 걸었다.“폭풍의 칼리파. 제국 중정의 국장이 왕국엔 어쩐 일로 온 거지?”“그, 그… 후우.”덜덜 떨던 칼리파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정연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왕국의 영토를 넘어서 여기까지 온 건 틀림없이 분명한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약을 어기게 되더라도 용사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거기까지.”리안이 말을 끊었다. 어수룩해 보여도 실상은 복마전 자체인 제국 사회에서 스스로의 힘만으로 입신양명에 성공한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주도권을 한번이라도 빼앗겼다간 금세 휘말리고 말 것이었다.“넌 내가 하는 질문에만 대답하면 된다. 쓸데없는 사견 붙이지 말도록.”“앗. 네, 넵!”칼리파가 입을 다물었다.“두번째 질문이다. 오늘은 며칠이지?”“어… 오늘은 대륙력으로 1624년 11월 19일입니다!”“19일….”시신을 안치한 숲에 도착했을 때를 기준으로 대략 일주일 정도 흐른 건가. 눈을 뜨고 곧바로 짐작하긴 했으나 그의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몸이 상쾌하다 싶더라니.리안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질문했다.“아까 말했지. 나한테 할 말이 있어 국경을 넘었다고. 그게 무엇이지? 설마 전쟁을 선포하려고 온 건가?”그 물음에 칼리파가 기겁하며 말했다.“아닙니다! 전쟁이라뇨! 제국은 협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한번 맺은 약속을 절대 깨지 않으니까요!”“?”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선지 그녀의 말이 무언가를 어필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하지만 고작 느낌일 뿐이었다.“협약을 잊지 않았다기엔 너무 대놓고 협약을 어겼는데.”“그… 그건….”쩔쩔매는 모습에 한숨을 내쉰 후 재차 질문했다.“다시 묻지. 넌 무얼 목적으로 왕국에 들어온 것이냐?”당황하던 그녀가 두 눈을 반짝였다. 왕국에 진입하고 많은 위기를 맞았으나 어떻게든 뚫고 여기까지 왔다. 그 끝에 바야흐로 기회가 찾아왔다.향후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척도가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리고 입을 열었다.“용사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으로 오시겠습니까? 저희는 파렴치한 어느 왕과는 다르게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입을 싹 닫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근시일 내에 마계 원정대를 꾸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그녀의 머릿속엔 마계 원정 말고도 따라올 부차적인 보상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나라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만큼 천문학적인 계약금, 여태까지의 제국 내 급여 체계를 무시하고 주어질 막대한 봉급. 최소 공작급 귀족 작위 수여에 국가귀빈급 초호화 대우 보장.리안이 원한다면 각기 다른 매력의 미녀들로 궁전 하나를 꽉 채워 그만의 하렘도 차려줄 수 있었다.결단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미 황제의 인가까지 받아왔다. 정 믿지 못하겠다면 죽음의 신 앞에 영혼을 담보로 걸고 진실의 맹세까지 할 수 있었다.하지만 칼리파가 장황하게 이 모든 조건을 늘어놓기도 전에 떨어진 리안의 확답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불가.”리안이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았다.“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너희 제국을 왜 가지? 내가 넘어가는 순간 동부에 전쟁이 선포될 것은 안 봐도 뻔한 이야기일텐데. 그리고, 마계 원정을 거절당했다는 소식은 어디서 들었지? 설마 몰래 뒷공작을 펼지고 있었던 건가? 이런. 내 앞에서 협정을 위반한 사실을 벌써 두 번이나 들켰군.”“어, 어….”칼리파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뻥긋거렸다. 생기있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 모습은 연합의 보고서에 적혀 있던 정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과는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이에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도 떠오르긴 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리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칼리파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그리고. 국왕 폐하와의 불화 때문에 왕국을 떠나더라도, 동부에 나와 우호적인 관계의 왕국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제국으로 넘어가겠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무단으로 국경을 침범한 것은 왕국법에 의거해 처벌을 받을 테니 그렇게 알도록.”“…에?”풀이 죽은 채 멍하니 듣고 있던 칼리파는 리안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무언가 잘못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리안이 눈을 좁혔다.“왜, 설마 함부로 왕국을 침범했으면서 제안을 핑계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나?”“아뇨! 그게 아니라…! 그….”칼리파는 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뭐가 잘못됐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표정. 몇초동안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혹시… 요 며칠간 동부 왕국에 있었던 일을 모르시는…?” “? 그게 무슨 소리….”리안은 질문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말의 요란한 발굽소리가 귀를 때렸다. 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칼리파의 얼굴이 한번 더 굳었다. 기사 무리의 정체는 그녀를 쫓는 추격대였다.리안을 찾기 위해 마력을 펼치고 이동했다보니 금세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특유의 빠른 기동력으로 도망치긴 했으나. 리안에게 붙잡혀있는 과정에서 시간이 소요되자 거리가 좁혀져 결국 따라잡히고 만 것이다.어느새 거리가 가까워졌다. 추격대의 선두에 있던 기사가 외쳤다.“드디어 따라잡았다! 제국의 수뇌, 폭풍의 칼리파! 그리고 그 옆에는….”기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용사? 당신이 왜 여기에?”리안은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수도로 이동하는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마력 수갑 가지고 있나? 무력화를 도와줄 테니 호송해서 데려가도록.”추격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직접 호송했겠지만 그들을 발견한 이상 리안이 데리고 갈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제국의 고위 인사를 체포하는 일엔 분명 크나큰 공적이 걸려있을 터. 훗날 그들에게 있어 큰 도움이 되리라.헌데 기사는 리안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지그시 노려봤다.“우연히 발견했다고요. 확실합니까? 제국의 수뇌랑 내통하는 광경을 들킨 게 아니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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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의 말은 그가 도저히 상상도 못한 헛소리였기에.“내가 내통했다고? 제국 중정의 수장이랑?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말이 안될 건 또 뭡니까. 왕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잠적했다가 일주일만에 나타나서는, 제국의 최고위층 인사 중 한명인 칼리파와 함께 있다니. 의심할 만 하지 않습니까.”이어진 기사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잠시. 리안의 얼굴이 재차 일그러졌다. 칼리파야 정보국의 국장이기도 하고, 왕국에 스파이를 심어두었다 하니 왕과의 다툼을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헌데 일개 기사가 대체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인가?“정 무고를 증명하고 싶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시죠.” 기사가 칼리파를 가리켰다. “처형하십시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차피 명분은 먼저 국경을 넘은 저쪽에 있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목을 베더라도 큰 항의는 없을 겁니다.”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칼리파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몸을 살짝 떨었다.“이봐. 왕국의 영토로 들어온 이후 인명피해를 일으킨 적 있나?”“…네, 네?”“왕국 내에서 사람을 죽였냐고 물었다.”칼리파가 고개를 들어 리안의 눈을 마주쳤다.“…아뇨, 없습니다. 맹세컨대 도망만 다녔어요.”“그런가.”리안이 시선을 돌려 적대감어린 기사의 얼굴을 쳐다봤다.“항복한 적을 굳이 죽여서 손에 피를 묻히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지.”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한다.“그건 안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