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악
파악
리안이 칼리파를 죽이지 않겠다 말한 건 순전히 그의 취향때문만은 아니었다.먼저 국경을 넘어서 혼란을 끼쳤다고 해도. 인명 피해나 저항 과정 없이 순순히 항복한 그녀를 재판도 거치지 않고 현장에서 즉결처형한다? 필히 제국의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리안은 전쟁을 원하는 상대에게 사소한 빌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허나 그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인지.“하!”기사가 조소를 터트렸다.“역시 아닌 척 하면서도 본색은 숨기지 못하는가. 됐습니다. 내가 직접 하면 되니까.”기사가 손을 뻗었다. 뒤에 있던 병사가 무기를 건넸다.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투창용 창이었다.“거기 서서 지켜보기나 하십시오. 홀로 고결한 척 하는… 더러운 위선자야.”그가 창을 든 팔을 뒤로 쭉 뻗었다. 반대쪽 팔은 앞으로 펼쳐 칼리파를 가늠했다.교본에 나오는 정석에 가까운 투창 자세. 날카롭게 연마된 창끝이 가슴에 적중한다면 최소가 치명상. 높은 확률로 즉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기사의 모습을 지켜보며 리안은 생각에 빠졌다. 자세를 잡는 과정에서 로브가 뒤로 젖혀지며 기사단 정복이 드러났다. 가슴에 달린 훈장이라곤 없고 새싹 모양의 뱃지 하나뿐.막 발아하려는 새싹은 왕국 기사단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신입한테만 지급되는 증표다. 그가 신참 기사단원이라는 증거.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투창의 자세는 교본에 가까웠으나 자신의 신체 능력과 특성을 살리진 못했다. 체내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헌데.‘…대체 무슨 생각이길래.’병사 몇명밖에 이끌고 오지 않았으면서. 수준 차이가 압도적인 자신과 칼리파를 상대로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적의를 선명히 드러내는가?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기사가 마침내 창을 던졌다. 뾰족한 창이 칼리파의 심장을 꿰뚫을 목적으로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리안은 칼리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방어막을 펼쳐 막아내는 것도, 투창보다 빠르게 움직여 피하는 것도. 그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칼리파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잠시 뒤의 미래를 예상하는 듯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슈우욱!창이 칼리파의 몸을 관통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리안이 손을 뻗었다.눈을 감은지 몇초가 지났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칼리파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살 떠올렸다. 직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용사님?”넓은 등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을 리안이 대신 막아선 것이다.“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사악한 제국의 수뇌를 살리겠다고 손까지 희생하다… 니….”마침내 실체를 밝혀냈다는 듯 소리치던 기사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전력을 다해 내지른 투창이.리안의 손끝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뻗은 검지 손가락 하나조차 꺾지 못한 채.믿기지 않는 모습에 그의 사고가 순간 정지했다.어떻게?분명 국왕 폐하께선 용사의 무력이 실은 조작된 것이며, 그의 업적은 다른 이름없는 영웅들의 공적을 훔쳐 만들어진 거짓이라고 만민 앞에서 선포했는데….손가락 하나로 투창을 막아내는 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왕실기사단의 단장도 하지 못할 신기였다.“아무리 생각해도.”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창을 막아낸 용사의 손가락엔 한방울의 피도 맺혀있지 않았다.“이해가 가지 않아.”리안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대체 넌 얼마나 강하길래 내 앞에서 그런 망언을 일삼는 것이냐? 내가….”그의 눈이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그리 심한 모욕을 듣고도 넘어갈만큼, 우스워 보이더냐?”기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을 깬 소음은 그의 몸 뒤쪽에서 일어났다.이히힝!!말들의 울음소리. 뒤이어 병사들이 낙마하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겁에 질린 말들이 주인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친 것이었다.용사는 계속해서 다가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막아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뒤쪽의 소란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고통스러워 흘리는 신음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는 걸 생각하면 정신을 잃은 게 분명했다.기사는 급하게 마나를 끌어올려 용사를 살폈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허나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훈련된 군마를 겁먹은 당나귀처럼 우습게 도망치게 만들고, 병사들을 기절시킨 것으로 모자라.기사인 자신까지 꼼짝 못하게 만든 정체불명의 힘의 정체가.아무런 마력도 담기지 않은, 그저 개인의 기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리안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순간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풀썩 쓰려지려는 기사의 몸을 리안이 붙잡았다. 기사의 몸을 땅에 조심스럽게 눕혔다.뒤에서 지켜보던 칼리파가 물었다.“죽이지 않으시는 건가요?”“왜, 내가 죽였으면 좋겠나?”순간 칼리파의 등뒤로 땀이 흘렀다. 무심한 듯한 대답이었으나 그 말 안엔 뼈가 담겨 있었다.역시 제국인들의 성정은 잔혹하기 그지없다는.그녀는 급하게 변명했다.“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화가 난 것처럼 보이셔서…!”“화가 났지.”리안이 칼리파를 보았다.“신참 기사가 아니라, 이 자에게 추격을 명한 그 윗선에.”처음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가니 알 수 있었다.기사의 로브, 제복, 신발 모두 새로 지급받은 신품이라기엔 지나치게 낡았다는 사실을.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제국 중정의 일인자, 폭풍의 칼리파. 왕실기사단을 통째로 끌고 와도 잡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강자다. 헌데 고작 기사 하나에 병사 몇명 데리고 잡으라니 말이 되나.가슴에 가문의 휘장도 달려있지 않다는 것은 그가 평민이라는 증거.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실상을 유추하기란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칼리파가 국내에서 발견됐으니 추격은 해야겠는데, 만약 쫓는 와중에 칼리파에게 역공을 당한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니.서로 나서기 싫어 이리저리 떠넘기다가 결국 거절할 능력도 없고 아는 게 많지도 않은 막내급 단원한테 넘어온 것이리라.리안은 힘없이 풀린 기사의 손바닥을 보았다. 굳은 살과 찢어진 흉터로 가득한 손은 그동안의 노력이 얼마나 고됐는지 가늠하기 충분했다. 하긴, 귀족 기사들의 온상인 왕실 기사단에 평민의 몸으로 들어가려면 일반적인 노력으론 불가능했겠지.씁쓸함에 입술을 깨문 리안이 칼리파를 돌아봤다. 아까 추격대의 훼방으로 풀지 못한 의문의 답을 듣기 위함이었다.“말해봐라. 내가 쉬고 있던 며칠 사이에 왕국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시작은 용사님이 옆나라 왕세자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오라는 말도 안 되는 임무를 거절하고 난 후였는데요….”칼리파가 아공간을 열었다. 그녀의 마법 주머니 안엔 동부 연합이 벌인 일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가 있었다.굳이 떨리는 마음과 목으로 이해도 잘 안되게 상황을 전달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겠지.잘 정리된 보고서를 리안에게 전달했다. 내용을 쭉쭉 읽던 리안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이어 여러 왕국에서 발행한 용사를 까내리는 비방용 기사의 스크랩북까지 건넸다. 그 효과는 컸다.“……!”스크랩북을 받아든 리안이 첫면에 크게 오려진 기사들을 보자마자 동공이 크게 요동치더니.그의 손등 위로 핏줄 다발이 선명하게 돋아난 것이다. 힘을 얼마나 준 것인지 꽉 잡은 종이는 꾸겨지다 못해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칼리파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눈치만 봤다. 비록 적이긴 하나 칼리파는 리안을 선망하고 있었다. 그야, 용사 아닌가. 역사에 새겨질 살아있는 전설. 그녀뿐만 아니라 제국민들 중에서도 용사를 좋아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위험을 무릅쓰고 왕국까지 포섭에 나선 이유. 거기엔 리안을 직접 만나기 위한 동경심도 섞여 있던 것이다. 허나 직접 마주본 리안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무서웠다.날카로운 눈매, 차디찬 태도, 날선 반응. 그는 숨기려는 의지도 없이 명백히 이쪽을 적대하고 있었으니까.솔직히 칼리파로서는 억울했다. 제국의 폭거는 그녀가 부임하기 전의 일이었다. 제국이 한창 전쟁 전쟁 전쟁을 외치던 당시 칼리파는 숲속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런 전쟁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제국도 협약 이후엔 건실하게 내정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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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의 적대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가.‘집가고 싶다.’ 칼리파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의 앞에서 그녀의 억울함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음의 야심찼던 포부와는 달리 지금은 그냥 어서 돌아가 쉬고싶은 마음뿐이었다.“칼리파.”“네, 넷! 넵!”갑작스런 리안의 호명에 그녀는 급히 대답하다가 혀를 씹고 말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으나 다행히 리안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중정의 수장이라면 위장 신분과 도구 정도는 지니고 있겠지.”칼리파는 잠깐 고민했다. 제국을 적대하는 리안에게 사실대로 얘기해도 되나 긴가민가했던 것이다.다만 그녀는 용사를 속일 용기도, 뒷감당할 자신도 없었기에 결국 진실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있습니다. 엄청 많아요….”다행히 리안은 책을 잡으려 꺼낸 말이 아니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것 좀 빌려야겠다.”“혹시 용도가…?”“정체를 들키지 않고 수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필요하다.”“…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칼리파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지 무전기를 꺼내들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리안은 그녀를 지켜보다 몸을 돌려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눈앞에 제국의 인물이 있기에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심정이었다.모든 왕국에서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신이 사실은 고문과 학살을 즐기는 정신이상자이며, 피와 불을 탐하는 전쟁광이고, 남들의 공을 갈취해 그 자리에 오른 기생충이라고.지난 십년동안 이런 음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태까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중들의 함성과 환호, 열광에 파묻혀 금세 사라지고 말 잡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온갖 흑색선전이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이 등장했으며, 리안을 향한 불길이 꺼지지 않고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왕국에서 그는 순식간에 역적이 되었다. 연합은 자신을 마왕보다 더한 주적으로 여기는지 아예 사회적인 말살을 시도했다. “…….”가슴 속에서 깊은 허탈감이 치솟았다. 수많은 재앙을 상대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눈코 뜰새 없이 살아온 십년. 비록 목표는 물거품이 되었다곤 하나.결과가 좋지 않다고 과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지난 세월동안 살린 셀 수 없는 생명들은 리안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요 자부심이었다. 헌데 그 모든 노력과 헌신이 합당한 사유로 항명 한번 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산산조각나고 있었다.문득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너나, 나나….”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신세가 다를 게 없구나.”각고의 노력으로 왕국 기사단에 들어갔지만 결국 출신의 한계로 사지에 내몰린 이 기사나.십년의 헌신을 보답받지 못하고 반기를 드러냈다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는 자신이나.비참한 꼴은 서로가 다를 게 없이 똑같지 않나.‘…어느 왕국을 가도 마찬가지인가?’머릿속에 그려졌다. 잡힐 것 같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는, 닿을 듯 하나 사실은 머나먼.희망이란 허상을 미끼로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 쓸모가 다하는 순간 버려지는 참담한 미래가. “저…용사님? 준비가 다 끝났는데요…. 저기요?”청아한 목소리가 리안을 상념에서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자 칼리파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앗!!”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죄, 죄송, 대답을, 그,안하시길래, 어, 으….”자기가 다가와놓고 왜 저러는 걸까. 리안은 붉게 물든 긴 귀를 파닥거리는 칼리파의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으, 네. 뭐든지요….”“하이엘프인 네가 어째서 제국에서 일하게 된 거지? 평생을 대수림에서 살아도 별 문제는 없을 텐데.”칼리파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대답했다.“큼, 돈이 필요했거든요. 대수림은 너무 낙후됐어요. 발전하려면 많은 자원이 있어야 해요.”“…동족을 위해서라는 건가?”“그렇게 말하면 좀 부끄럽긴 한데… 뭐, 그런 셈이죠?”리안이 살짝 놀란 눈으로 칼리파를 쳐다보았다.“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라더니, 보고서가 잘못되었군.”“…네? 대체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출처가 어디죠?!”그렇게 묻는 칼리파의 눈빛은 누구 하나 죽일 기세였다. “질문은 내가 한다니까.”리안은 반문을 가볍게 흘리고 넌지시 하나 더 물었다.“…그래서, 대수림은 발전했나?”“네. 몰라볼 정도… 어?”칼리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그런데 그건 왜… 혹시, 제국에 관심이 있으신…?”“…글쎄, 여유도 많지 않으니 출발이나 하지. 속도를 조절할 테니 따라오도록.”리안이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칼리파의 눈이 환희로 물들었다.처음에 제안을 듣지도 않고 단박에 거절한 것과 달리 그녀의 의문에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제국에 대한 적대감도 눈에 띄게 옅어진 듯했다.…정말로 용사 리안의 제국 전향이 머지않은 것이다!“…네! 따라가겠습니다!”칼리파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여실히 묻어나왔다. 리안은 대답없이 몸을 날렸다.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아직까지 제국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그래, 아직까지는.’두눈으로 확인하는게 먼저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정녕 연합이 자신을 저버렸는지. 직접 알아볼 것이다.만약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를 농락한 칼리파와 제국 일당에게 죗값을 물 것이고.‘내용이 사실이라면.’그땐….리안이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왕국의 수도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