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
결심
처음 신문이 발행되고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도는 용사에 관한 여러 가십으로 열띤 분위기였다.당연한 것이었다. 고작 하루이틀로 가라앉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화제였으니까.동부 왕국들의 구원자이자 수호자로 칭송받던 영웅의 이면. 경악스러운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열광해 마지않았던 용사 리안이 실은 추악하기 그지없는 범죄자였다니?백성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지금까지 보냈던 열성적인 신뢰를 등에 업고 몰래 이런 짓을 벌이다니. 생각지도 못한 배신이었다.기사를 처음 읽고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대부분 혼란과 당황이었다. 그야 여태까지 용사가 한 일이 몇 갠데 쉽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립을 지키는 자들이 주류였다.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논란들이 연이어 쏟아졌으며, 폭로한 사람들의 신분이 전부 믿을 만한 사회적 명사인 데다, 비단 카데마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에서까지 용사의 실체를 까발리고 있었기에.서서히 용사가 악인이라는 주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화룡점정으로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방점을 찍은 건 다름아닌 용사의 행적이었다.논란이 최초로 제기되기 단 하루 전. 십년동안 한번의 펑크도 없이 임무를 수행해온 리안이 사상 처음 무단으로 일을 내팽개치고 잠적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정황 상 모든 증거가 하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뒤에서 몰래 악행을 이어나가다 꼬리가 너무 길어져 끝내 밟히자 숨어버린게 분명했다.터무니없는 대처에 국민들이 느꼈던 경악은 그대로 분노로 승화했고, 이제 수도에서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용사를 향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커져 결국 극에 달한 것이다.그리고, 막 수도에 입성한 리안은 그를 향해 쏟아지는 도시 전체의 분노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왼쪽.“더러운 위선자 놈. 이제라도 실체가 드러난 게 다행이지.”오른쪽.“빌어먹을 새끼. 여지껏 응원했던게 후회스러울 정도야.”앞.“천하의 둘도 없을 쓰레기를 에밀 폐하보다 위대하다고 지껄이던 놈들 다 어디 갔냐?”뒤.“마왕이랑 전쟁?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전쟁이 고프면 혼자 쳐들어가라 그래. 마왕한테 확 죽어버리면 그건 기쁘겠네.”거리의 어디로 몸을 돌려도 악담이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리안을 향해 증오를 드러내고 있었다.꽈아악.주먹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리안의 오감은 남들보다 아득히 월등한 수준이었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전투에 있어 크나큰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으나 지금은 그게 역으로 독이 되었다. 근방의 몇몇이 뱉는 비방뿐 아니라.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폭언이 고스란히 귓가에 들려왔기 때문이다.개중엔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싫은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도 적지않게 섞여있었다. 차마 사람들이 지나는 대로에서는 내뱉지도 못할 말들. 저주에 가까운 독언이었다.“…….”리안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칼리파에게 대략적인 분위기는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그가 상정했던 수위 이상으로 수도의 분위기는 격화된 상태였다.‘아니, 사람들이 왜 이렇게….’그리고 칼리파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분명 몇 시간 전 보고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격화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순식간에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질 수가 있나?또다른 배후 세력이 개입한 거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순간이 아니었다.칼리파가 조심스레 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안타깝게도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 표정을 보기 힘들었다.혼미한 마음을 어떻게든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쉽지만은 않았다.“어… 일단 대략적인 분위기는 일단 어느 정도 살핀 것 같으니… 일단 식당같은 데라도 들어갈까요?”“…….”리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파는 우두커니 멈춰선 그를 이끌고 조용한 분위기의 식당을 찾아나섰다.파르르. 귀가 작게 떨렸다. 왕국과의 관계 악화는 분명 제국에게 있어 좋은 일이었지만.이거 여기서 더 잘못됐다간 다른 의미로 좆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들이 들어간 곳은 번화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여관이었다.술집이 제대로된 영업을 시작하기엔 이른 늦은 오후의 시간대. 내부는 조용한 분위기였다.칼리파는 따뜻한 흰빵과 수프, 통닭 구이와 피클. 그리고 벌꿀주 두 잔을 주문한 후 고개를 힐끗거리며 앞자리를 살펴봤다.리안은 수도에 진입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두 팔을 괸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그… 원래 우민들이 잘 휩쓸리고, 속아넘어가는 거 아니겠나요….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그녀는 말하면서 의문을 느꼈다. 용사를 회유하기 위해 온 자신이 어째서 왕국민들을 감싸고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단지 이대로 간다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본능의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맛있게 드십시오.”장사 준비를 위해 미리 음식을 만들어놓고 있던 것인지 여관 주인이 빠르게 음식을 내왔다. “일단 배고플 텐데 식사라도 좀 하시죠…!”리안이 칼리파의 말에 깍지를 풀고 스푼을 쥐었다.그때 문을 열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그들은 모두 남자로만 구성된 무리였는데, 단골인 모양인지 앉자마자 술부터 시키더니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자네 동부상단에서 나온 신문 봤나?”“봤지. 리안 그 씨발놈의 강간마 새끼. 그놈 때문에 목매단 아녀자만 두자릿수라는데.”우뚝.수프를 떠먹으려던 리안의 팔이 굳었다. 칼리파의 경우엔 뭐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는 새하얘진 얼굴로 제발 닥치라고 그들 무리를 향해 필사의 눈빛을 쏘아냈지만.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시선이 닿을 리가 없었고.자기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용사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태평하게 떠들었다. “미친놈이 슈타니엘 공작 영애까지 건드리려고 했다던데. 침실에 알몸으로 숨어들었다나. 다행히 미수로 끝나서 다행이지, 아주 끔찍한….”“그런 적 없다.”칼리파로서는 막을 새도 없었다. 리안이 남자가 입을 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음?”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로브를 움푹 뒤집어쓴 사내가 서있었다.“하늘에 맹세코 아녀자들을 건드리지 않았고, 침실에 숨어 덮치려든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영애였다.”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 그게 무슨. 그보다 당신 대체 뭐요?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는….”칼리파가 황급히 쫓아와 리안을 잡아당기며 상황을 중재했다.“죄송합니다! 이분이 술에 좀 취하셔서요!”“허, 참. 별 일이 다 있나.”그녀가 급하게 여관주인을 불렀다.“여기! 주문 계산이랑 방 하나만 주세요!”*외간 남자와 침실에 들어와 있다. 그것도 단둘이.원래라면 얼굴이 붉어지다못해 터질 듯 새빨개졌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방안에 감도는 기운은 핑크빛 기류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내부의 분위기는 싸늘하고 날카로웠다.칼리파는 마치 살얼음판 위에 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리안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저… 괜찮으신….”“괜찮다.”…어라? 칼리파가 눈을 깜박였다. 위태로울 것만 같았던 리안의 목소리가 의외로 평온했기 때문이다.…설마 분노가 극에 달하자 역으로 초탈해진 건가? 겉만 나아졌을 뿐 속은 썩어문드러지는 중이고? “정말로 진정됐으니 걱정 마라. 난 멀쩡하니까.”의심스러운 눈빛을 느꼈는지 리안이 재차 강조했다. 칼리파가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단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처음엔 분노했다. 자신을 향한 모함이 짧은 시간 사이 더욱 더 크게 불어나 있었으니까.하지만 그 감정은 머지앉아 가라앉았다. 애초에 알고 있지 않았던가? 동부의 왕국들이 신문은 물론 세력을 이용해 대중들을 선동하고 여론을 조작했다는 걸.아무렴 속은 사람보단 속인 사람의 잘못이 더 크지 않겠나.물론.그게 국민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회의감이 드는군.’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지식으로 모두 거짓이라고는 확정지을 수는 없어도, 주장 중 태반이 쉽게 판명할 수 있는 순수 날조라는 사실을.애초에 십년 전만 해도 약소국이었던 왕국이 동부의 대표적인 강국으로 부상한 데 누구의 공이 가장 컸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았을 텐데.왕국을 위해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날밤을 새는 일은 세지도 못할 정도로 흔한 일이었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었던 적도 수두룩했다.몸을 헤쳐가며 살아온 십년의 세월.마땅히 이뤄졌어야 할 약속이 배신으로 부서지고 기나긴 시간을 쏟아부은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음에도. 최대한 온건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이 꼴. 연합의 왕들은 통제를 벗어난 자신의 목에 완전한 목줄을 채우기 위해. 그간 쌓아온 위신을 하루아침에 땅바닥으로 처박았다.더욱 슬픈 사실은 리안의 존재로 하여금 많은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래도… 나의 헌신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야.”그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는 이유? 간단하다. 자신의 가치가 일말의 손해도 감수하기 싫을 만큼 높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독 안에 든 쥐처럼 이미 손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고 생각해 소중하다고 여기지 않거나.뭐 이제 와서는 둘중 어디가 됐든 상관없었다.리안은 자신이 과연 이런 수모를 견디면서까지 동부에 남아있어야 하는지. 연합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니까.고민을 끝내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제국은… 어떤 곳이지.”칼리파가 꿀꺽 침을 삼켰다.중정의 국장으로 일해오며 몇년 동안 쌓은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넘어오기 직전이었다.아마 조금만 더 달콤한 말로 구슬리면 즉시 제국으로 전향하리라.하지만 왜일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직감만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나마 리안을 지켜보면서 내린 판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속임수는 결단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관계의 말로가 무엇인지. 바로 앞에서 목도하지 않았나. “솔직히…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실력주의를 모토로 삼고 전쟁으로 세를 불린 나라이기에 힘이 모든 가치의 위에 존재한다고 믿죠. 약자는 수탈당하고, 강자는 약탈하고. 또 그 모든 과정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구조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죠.”리안이 조용히 칼리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하지만, 나아지고 있어요. 확실하게. 전쟁 이후 폐하께서는 무력만으론 결국 한계를 마주한다는 사실을 느끼시고 제국의 속성을 재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시고 있습니다. 대수림 출신의 절 등용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고, 평화의 상징이신 리안님을 포섭하려 온 것도 제국이 더 나아지기 위한 방법이었고요.”한차례 숨을 가다듬고, 마지막으로 말한다.“그리고, 맹세컨대 저희 제국은 인재에 대한 대우만큼은 어떤 나라보다 확실해요. 직접 상대하며 그 무위를 뼈저리게 느낀 만큼 리안님의 가치를 낮게 여기는 일 또한 없을 거고, 무엇보다 제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의 등에 칼을 꽂는 파렴치한 짓 따위 절대 하지 않을 거에요.”그녀의 어필이 끝나고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칼리파는 1초가 한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등줄기엔 땀이 서리고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거의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던 정적 끝에.리안이 물었다.“내가 제국으로 향한다면… 제국은 전쟁을 벌일 것인가?”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모두 사라졌음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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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택이 참혹한 혈겁을 불러오진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제국과 연합간의 전쟁. 병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리안이 필사적으로 방어선에서 제국의 군세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동부 연합도 이미 제국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만약 그가 연합을 떠난 대가로 제국이 쳐들어온다면.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등을 돌린 값으로 대륙의 동부가 셀수없이 많은 피로 붉게 물든다면.과연 그 참상을 보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허나.리안의 고뇌는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듯. 칼리파는 리안의 고민에 쐐기를 박았다.“제가 왕국으로 넘어오기 전, 황제 폐하께 받아온 확언이 있었습니다.”리안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파는 그 설마가 맞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황제의 이름을 걸고,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고. 용사가 제국으로 넘어오게 되어 승전이 확실시된다 하더라도, 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일으킬 무력 충돌은 없을 거라고.”“…하하.”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리안은 웃음을 흘렸다. 내면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것인지. 제국은 그가 선택을 주저하는 걸림돌을 모조리 없애주고 있었으니까.‘…그만큼 확실히 조사를 하고 왔다는 것이겠지.’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또한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무수한 덕을 본 왕국과 연합은 리안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있는데, 사사건건 방해하고 발목을 잡기만 했던 제국이 그를 훨씬 더 귀중하게 대해주고 있었으니까.용사니 구원자니, 거창한 호칭으로 불리지만 리안도 결국엔 사람이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은 세공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그를 무시하고 낮잡아보는 곳보다.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해주는 쪽을 더 좋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선택지에 상정하지도 않았던,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었던 방법이.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점점 더 커지더니 어느새 마음속 제일 우선순위에 올라오게 되었노라고.“…그래. 좋다.”리안의 말에 칼리파가 놀라며 반문했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서렸다.“…그 말씀은?!”십년동안 왕국을 위해 몸을 갈아가며 개처럼 일한 대가는 배신과 모함이었다.“전향하겠다는 소리지.”이런 취급을 받고도 왕국에 남아있을 수 없으니.“제국으로.”떠나리라. 내 진가를 알아주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