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짐
조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왕좌 위.“용사는? 아직도 연락이 없나?”“예, 그렇습니다.”“쯧쯧….”에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한번 쓴맛을 보여주면 금세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아니면 난생 처음 겪어보는 대중들의 적개심에 어쩔줄 몰라 얼어붙어 있던가.“먼저 연락을 넣어볼까요?”“…아니. 계속해서 수위를 올리게.”둘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앞에 찾아와 구차하게 빌며 복종하는 최후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신하가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에밀은 연초를 꺼내 한모금 깊게 빨아들였다.원래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자중하는 편이었지만 최근들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알현실엔 어차피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들만 있으니 대놓고 피워도 딱히 상관없는 거 아닌가.숨결에 희끄무레한 연기가 섞여나왔다. 갈피를 잃은 에밀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흐릿한 동공 위로 한 남자의 형상이 그려졌다.이마에 피가 흐를 정도로 세게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으며 용서를 갈구하는 리안의 모습이.“…하하, 그래. 손을 더 싹싹 빌어 보아라….”늦게 찾아오면 찾아올 수록 놈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업적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무너지겠지.그제야 깨닫고 마는 것이다.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위대하신 에밀 폐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천하기 그지없는 놈이구나. 하고.“네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순간이… 기다려지는구나.”에밀은 상승되는 기분에 문득 음심이 동했다. 오늘 밤은 아주 성대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전번에 눈여겨보았던 연극이 있었지.’ 연극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미색이 하나같이 뛰어났다. 언제 한번 불러들이려고 했었는데. 그걸 오늘로 할까.에밀이 시종을 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바깥의 근위기사가 들어왔다.“폐하. 알버트 후작이 찾아왔습니다.”기사의 한마디에 흐릿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알버트? 이십년 전쯤 은퇴한 그 재상?”“예.”…그 노인네가 갑자기 뭣하러?에밀은 눈살을 찌푸렸다. 곰곰히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지금 문앞에 기다리고 있나?”“예. 그렇습니다.”“…쯧. 오늘 업무는 여기서 마치려고 했더니만. 들어오라 하게.”후작은 작고한 선왕의 친우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d3kza0VLSVdxajZ6L09aWC8xUnR2TWErTWxBTWF6MHlBMFBXQXMrMWFMdTEzcWJQVUIwd2ZvRFJCTkF4NkMwRA
기사가 나감과 동시에 후작이 들어왔다. 쾅!알현실의 문을 쪼개져라 거세게 밀면서.“폐하! 이게 도대체 뭐하는…! 폐하?”후작이 말을 하다 말고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에밀을 쳐다보았다.“에밀 폐하… 맞습니까?”“그럼 내가 아니고 누구겠소. 그리고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게 무슨 소란이오?”에밀이 마뜩잖은 눈빛으로 후작을 쳐다봤다.오래전 아내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마음에 변화가 불었는지 관직에서 물러난 그였다. 한적한 시골에 별장을 구매해 그곳에서 유유자적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는데.어째서 기별도 없이 찾아와 큰 소리를 질러대는가.“…풍채가 늠름해지셨습니다. 헌데 갑자기라니요? 그러면, 이런 소식을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소리입니까?”후작이 품에서 웬 종이 다발을 꺼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신문이었다. 후작은 신문을 펼쳐 일면에 대문짝하게 걸린 기사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미치광이 용사 리안, 당장 그를 잡아들여 감옥에 박아넣어야 한다…. 대체 왜 이런 허무맹랑한 낭설로 용사를 공격하는 겁니까! 그는 우리 왕국의 제일 큰 보물입니다!”에밀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었는데, 역시 들어줄 필요도 없는 개소리였다.“하! 보배? 세상 어떤 보물이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반항하는가! 다 내가 뜻이 있어서 그러니 아무 말 말고 물러나시오.”허나 후작은 축객령에도 물러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아뇨! 이 방법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폐하와 용사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그가 여태까지 왕국에 보내온 헌신까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누구보다 충절스러운 그를 이렇게 대우하다니, 돌아가신 선왕 폐하께선 그렇게…!”“그만!!”에밀이 버럭 소리질렀다. 그는 후작의 말을 끊어버리고 외쳤다.“그가 혼자였다면 지금의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 같소? 그 명성을 얻게 된 게 다 누구 덕분인데! 그리고 어느 충신이 왕에게 바락바락 고개를 들고 소리를 높이나?”에밀이 후작을 노려보았다.“그리고, 후작이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거요? 한참 전에 현직에서 물러난 퇴물 주제에! 후작이 한창 재상으로 일할 당시 왕국은 주변국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한 약소국이었소. 헌데 지금은? 그 제국도 이제 우릴 함부로 대하지 못해!!”호흡이 부족한지 그가 숨을 가다듬었다.“…그 전성기를 이끈 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나요. 위대한 성군, 에밀 폰소 카데마라고! 거리의 백성들은 매일 내 이름을 연호하는데, 후작이 대체 무슨 내막을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요?”후작이 지그시 에밀을 쳐다보았다.“…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왕국의 부흥을 이끈 건 폐하가 아니라 용사….”“그 입 다물라!!”에밀이 크게 소리쳤다. 역린이라도 밟힌 것일까.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마 위로 핏줄이 꿈틀거렸다.“아버지의 친우라는 사실을 참작해 예를 차려줬더니 기어코 선을 넘어 나를 능멸하려드는군!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소, 근위대! 당장 후작을 끌고 가라!”“폐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당장 잘못을 바로잡아야! 폐하…!”문이 열리더니 근위기사가 들어와 후작의 몸을 붙잡았다. 후작은 계속해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버텼지만 역시 노년에 접어든 몸으로 기사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이거 놓게. 내 두 발로 걸어 나갈 테니까.”기사에게 붙들려 복도를 이동하던 후작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구속에서 벗어난 그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궁을 빠져나가 뒤를 돌아보았다.왕성엔 값비싼 예술품들과 정교한 조각상들이 가득했다. 이십여년 전 수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모습과는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그가 재상으로 활동했던 시절보다 왕국이 부유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넘쳐나는 황금빛은 왕의 눈을 멀게 만들었으니까.후작은 젊을 적의 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신하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고, 스스로의 모자람을 인정하며 배울 줄 아는 청년이었다.허나 지금은 감언이설과 주지육림에 빠져 단순 옳고 그름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무지렁이가 되어 있었다.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정원을 거니는 와중이었다. 후작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가슴께까지밖에 올라오지 않는 옷을 입고,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복도를 지나는 여인들. 왕궁에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었다.이에 지나가는 하인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니 들려온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왕과 자주 사치스런 연회를 즐기는 정부들이라나.“…내가 너무 늦게 올라왔구나.”후작이 후회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 국정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용사의 등장으로 왕국은 쾌속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었기에,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헌데 겉만 멀쩡했을 뿐 속이 이렇게까지 썩어 문드러져 있을 줄은….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느긋하고 여유로운 전원생활에 취해 확실히 알아볼 시도도 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까.“선왕 폐하….”미리 알았다면 진작 수도로 올라왔을 것이다. 달콤한 말만 일삼는 간신들을 축출하고 왕국을 위해 한몸 바쳤을 것이다.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었고.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의 물결을 후작은 피할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겐 나라의 안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충언을 올릴 용기도, 수많은 정적과 대립할 힘도, 그 모든 일을 실행할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그저 한 명의 나약한 노인만 자리에 남아 서있을 뿐.“…왕국을 떠나야겠구나.”능력있는 자는 귀하게 대우해야 한다. 받은만큼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당연한 법칙.허나 왕국은 그 이치를 신분제라는 틀에 갇혀 아주 오래 전부터 어겨왔다. 제도를 정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안락함에 취해 고치지 않았다.모든 붕괴는 자그마한 균열에서부터 시작되는 법.한 줄기 금일 적 발견했더라면 쉽게 보강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늦어버렸다.균열은 벽 전체로 번져있었으니까.섣불리 건드렸다간 오히려 파멸을 앞당기기만 하는 꼴이 되리라.“…가산을 정리할 준비를 해야겠군.”애시당초 한 사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룩할 수 있었던 쾌거였다.막대한 행운 위에 올라타 분에 넘치는 성장을 누렸으면서 하락을 대비하지 않았으니.어쩌면 파국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을지도.“가문으로 가주게.”댐이 무너진 후에 뒤늦게 후회하고 울부짖어봐야 이미 모든 게 휩쓸려나간 후일 터.하루빨리 이민할 나라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후작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자식이 없어 왕국에 몸을 매인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뿐이었다.*“바로 출발하지.”마음을 먹은 이후엔 곧바로 움직였다.왕국엔 더이상 아무런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고. 선택을 내렸으니 굳이 질질 끌고 싶지도 않았으며.무엇보다 제국과 내통했다는 사실이 상부에 전달되기 전에 움직이고 싶었다. 국경의 수비가 까다로워질 수도 있으니까.물론 국경 전체를 막으려면 인원수는 그만큼 분산될 테니 구멍이 숭숭 뚫린 경계망은 손쉽게 뚫을 수 있을 것이겠지만.제국의 영토로 넘어가는 모습조차 보여주기 싫었다. 하마터면 양국간의 분쟁으로 번질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제국 측 인물과 만난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게 전향의 증거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직접 제국령으로 향하는 모습을 들킨다면 그건 달랐다. 심증과 물증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을 틈타 몰래 국경을 넘었다. 제국의 땅에 진입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칼리파에게 제국의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전해들었기 때문이다.도시를 경유하지 않고 지나쳐 계속해서 내달렸다. 중간중간 짧은 휴식만 취하고 다시 이동하기를 반복했다.그렇게 며칠이나 걸렸을까.“이제 다 도착했어요!”칼리파가 환희에 차 소리쳤다. 지평선 너머, 여태껏 지나오며 보았던 대도시들의 랜드마크같은 높은 건물들이 수도 없이 많이 보였다.“드디어….” 리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드라케스 제국의 심장부. 피와 쇠와 불의 성전이라는 이명을 가진 묵색의 대도시.마침내, 제도 드라켄하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