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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배신당한 용사는 악의 제국으로 간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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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에 가까이 다가서자 먼저 인파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드높은 성벽. 거대한 성문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지금 줄을 선다면 오늘 안에 들어갈 수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물론 그 옆에 따로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입구가 존재하긴 했으나. 원래 한 나라의 수도란 전역의 사람들이 모이는 법이었기에. 그쪽도 마차가 길게 늘어서있기는 마찬가지였다.입성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했는데.그게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음을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이쪽으로 오시죠. 로브는… 일단 계속 입고 계시고요.”위장을 풀고 제복 차림을 드러낸 칼리파가 행렬을 무시하고 검문 대기열의 맨앞으로 향한 것이다.리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반신반의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의 경험상 귀족들은 자기들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존재였다. 헌데 대놓고 새치기를 시도하는 칼리파를 보면서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모두 그녀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쳐다볼 뿐이었다.‘…하긴. 나름 제국의 수뇌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거물이니까.’이상할 것은 없었다. 리안의 앞에서 계속 저자세로 임했기에 잠시 감각이 무뎌졌을 뿐. 이 드넓은 제국에서 그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적었으니까.성문 입구에 도착하자 검문을 진행하던 경비병들이 크게 외치며 일제히 경례했다.“제국에 영광을!!”칼리파는 간단히 경례하곤 즉시 본론을 꺼냈다. “제국에 영광을. 마차를 준비하도록. 바로 황성으로 가야 한다.”“즉시 대령하겠습니다!!”경비병들이 일사불란히 움직이더니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차를 끌고왔다. 철갑을 두른 흑마가 이끄는 회색의 철마차. 마부로 보이는 이가 나서 외쳤다.“제국에 영광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칼리파는 별 대답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리안은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을 띄며 그녀를 뒤따랐다.잠시 후 마차는 황성을 향해서 출발했고, 눌러썼던 후드를 내린 리안은 좀 어이없는 눈길로 칼리파를 쳐다봤다.시선에 담긴 속뜻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그… 저도 숲에서 막 나왔을 땐 익숙하지 않았는데… 원래 제국이 규율이 강해서….”횡설수설하는 모습.“…아무런 말도 안 했다만.”“…넵.”그녀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큼. 제도에선 일정 고도 이상으로 이동하는 게 금지여서 느려도 부디 이해해주세요. 물론 지키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당장 신분을 숨기고 있는 처지니까요.”“이해한다. 편하게 가면 좋지.”리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넓은 대로변엔 수많은 행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으나 땅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라곤 단 한 개도 찾아볼 수 없었고, 끝없이 세워진 건물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무채색 계열로 통일되어 있었다.제도에 오기까지 지나오며 스쳐봤던 도시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드라켄하임은 제국의 색채가 무엇보다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힘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극단적 강자존의 사상이.‘마음에 들진 않지만… 괜히 대제국이 된 게 아니군.’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왕국에 불과했던 드라케스가 불과 수십년만에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거듭난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고.피와 쇠와 불의 성지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것이다.빠르게 대로를 뚫고 지나가 황성에 도착했다. 마차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은 본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그 이후로는 걸어서 움직여야 했다. 목적지까지 거의 다 도착하자 칼리파는 우선 여독부터 푼 다음 황제를 만나러 가도 괜찮냐고 물었다. 쉼없이 움직이며 리안도 몸이 찝찝했던 참이었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정원을 지나 마차에서 내리자 묵색의 거대한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 중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넘긴 여인이 나서 물었다.“칼리파님, 용무가 있어 급히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은 잘 해결하셨는지요.”“응. 잘 마쳤어.”“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이 분은?”여인의 눈이 뒤에 선 리안에게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며 다시 얼굴을 가린 상태였기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칼리파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순간 리안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깃들었다. 허나 놀람은 잠시였고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린 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황실의 시종장 메이린이라고 합니다. 계시는 동안 일말의 불편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리안님,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황실의 시녀들은 철저히 검증을 마치기 때문에 어디 이야기가 새어나갈 걱정도 없고요. 전 보고부터 올려야 해서 잠깐 따로 움직일 테니 쉬고 계세요.”칼리파는 목례 후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리안은 메이린의 안내를 따라 성의 안쪽로 이동했다.성 내부 또한 바깥과 마찬가지로 복도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환한 전등이 걸려 있고 벽 사이사이 온갖 장식들이 걸려 있어 어둡다는 느낌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는 여전히 존재했다.그러나 메이린의 안내 끝에 한 방 앞에 들어서자 리안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어두운 복도와는 달리 방 안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밝은 벽지에 테이블 위 꽃병엔 화사한 꽃들이 조화롭게 꽂혀 있었고 새하얀 침구류는 먼지 한톨도 찾아볼 수 없이 깨끗했다.“황성을 방문한 귀빈께 주어지는 방입니다. 머무르시는 동안 편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그녀가 말을 이었다.“먼 길을 쉼없이 달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아니, 우선 목욕부터 하고 싶군.”리안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원래 그는 악당을 상대할 때나 말을 놓지 평민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존대를 사용하는 편이었다. 그야 초면에 반말을 찍찍 뱉는 건 너무 무례하지 않나. 뭐 그런 이유로 메이린한테도 처음엔 존대를 사용했는데.말을 뱉자마자 그녀가 새하얀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간청했다. 제발 말을 낮춰달라면서.-제게는 존대를 하시면서 칼리파님께는 평대한다면 칼리파님의 위신이 우습게 보일 겁니다.-…내 그렇게 하지.리안은 그녀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칼리파를 만났을 땐 그녀를 적으로 생각했기에 예의를 차리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그게 계속 이어졌다. 하긴 누구는 존대 누구는 평대 섞어가며 대하는 것도 좀 애매하긴 했다.위계서열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제국의 특성상 이런 부분은 확실한 듯싶었다.‘뭐… 어쩔 수 없지.’제국에 전향하기로 결심한 이상 문화의 차이가 어색하더라도 차차 적응해나가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그렇게 마음먹은 리안이었으나 그 다짐은 불과 몇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깨질 수밖에 없었다.“내 분명 혼자 씻겠다 말했다.”“하지만….”“반론은 듣지 않겠다.”쾅!시녀들의 손길을 뿌리친 리안이 빠르게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하늘 아래 남녀의 차이가 유별한데.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이에 맨몸을 드러내라니 말이 되나.물론 왕국에서도 몇몇 왕족이나 귀족은 목욕까지 하녀들에게 전담시키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평민 출신인 리안은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익숙치 않군….”말 그대로 이런 대우는 익숙하지 않았다. 한창 용사로 동부의 왕국 이곳저곳을 떠돌 시기에도. 왕들은 리안에게 일만 시킬 뿐이었지 귀빈 대접은 해준 적이 없었다.이동 중에 보이는 냇가나 계곡에서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후….”욕조에 손을 넣자 딱 기분좋을 정도로 온수가 데펴져 있었다. 손을 떠올리자 물 위에 잔뜩 띄워진 꽃잎과 입욕제의 거품이 같이 퍼올려졌다.벽 한편엔 한눈에 보아도 비싸보이는 향유가 세 병이나 구비되어 있었다.리안이 두 눈을 감쌌다. 살아생전 이런 호사는 처음이었다.“정말 익숙치 않아….”***여차저차 목욕을 끝낸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빈틈없이 채워진 식탁 위엔 육해공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로 가득했다.무엇을 먼저 먹을까. 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가장 앞에 놓인 스테이크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식탁의 모든 음식들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 많던 요리들을 홀로 모조리 먹어치운 것이다.리안이 멍하니 입맛을 다셨다. 여태껏 주식으로 삼아왔던 돌빵이나 육포 쪼가리, 사냥으로 잡아 대충 구워먹었던 토끼 고기와는 차원부터 다른 진미였다.옆에서 대기하던 메이린이 물었다.“요리를 더 가져올까요?”“…아니. 괜찮다.”“주방장도 리안님이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드셨다는 사실을 알면 더없이 기뻐할 겁니다.”“…그럼 한 판만 더.”그는 식탁을 두번이나 더 갈아치운 후에야 비로소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이후 메이린은 휴식을 위해 물러나 있겠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종을 울리라 말하고 방을 나갔다.리안은 뭔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가 다시 한번 놀랐다. 내가 구름 위에 올라온 건가 순간 착각할 정도로 촉감이 부드러웠던 것이다.용사로 활동할 적에는 그냥 이동하다 보이는 나무의 기둥을 등받이삼아 잠을 청하는 게 일상이었다. 도시 내에서 머무를 때에도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 딱딱한 침대 위에서 주로 밤을 보냈고.이렇게 부드러운 침상 위에 몸을 올리는 건 처음이었다. 몸을 뉘이는 순간 침대 속으로 파묻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푹신함이었다.‘…험하게 자란 내가 이런걸 누려도 될까?’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드러눕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며 즉시 단잠에 빠져들 것이라고.보송보송해보이는 베개는 당장 머리를 갖다대고 누우라며 유혹하는 것 같았다.리안은 멍하니 침상 위를 쳐다보다가 문득 흠칫 몸을 떨었다.“…아니, 순간 홀릴 뻔했군. 리안, 정신 차려라.”긴장을 풀지 말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이름을 되뇌이며 뺨을 쳤다. 제국의 영입 제안을 받고 넘어온 것은 맞지만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연합의 대접이 시원찮으니, 인재 대우는 누구보다 확실한 제국으로 건너오는게 어떠냐는 제안만 받았을 뿐. 자세한 얘기는 나누어보지 않았다.제국이 과연 자신한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어째서 일평생 꿈꿔온 대륙통일이라는 야욕까지 포기해가면서 그를 포섭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하나도 알지 못했다.무엇보다 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제와의 독대. 마음에 드냐 안 드냐와는 별개로 그는 역사에 남을 정복자였다. 이는 당장 수십년 전과 지금의 대륙 지도를 비교하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제국의 건국제로서 범인은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심계를 가지고 있을 터.지금의 과도한 환대도 만남 이전에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있었다.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이리저리 휘둘리다 잡아먹히고 말리라.리안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와라.”메이린인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그녀가 아니라 칼리파였다.“잘 쉬고 계신가요?”“그렇다. 방이 좋더군.”“만족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보다,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시간? 시간이야 일도 없으니 상관 없다만, 그건 왜… 아.”리안은 말을 하다 말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칼리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설마가 맞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네. 폐하께서 만남을 바라세요.”“…바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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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앉아서 백날 고민해봤자 그를 잘 알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수밖에.무엇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나. 어렵다고 미루는 행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냥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칼리파의 인도를 따라 복도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