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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용사는 악의 제국으로 간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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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이 방을 나서 복도를 걸었다. 미리 조치를 취해둔 것인지 복도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황제가 머무르는 제전까지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들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하는 정도로는 충분했다.빌헬름 리아키스 폰 드라케스.사생아로 태어나, 왕위 계승권을 지닌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왕위에 오른 찬탈자. 그는 막 즉위하고 혼란스러운 내부 정세를 안정시키려 역으로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이웃 나라 왕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당시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으나 결과가 그가 옳았다고 증명했다. 개전 3년만에 상대 왕국의 수도에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며 무력통일을 이뤄낸 것이다.그는 승전 축제에서 스스로를 황제라 자칭하며 정복욕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주변 왕국들은 서서히 황제를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제국은 동시대의 나라들보다 몇 수는 족히 더 앞서있었다.당시 천대받던 대장장이같은 직종을 우대하고, 경쟁에서 밀려 오지로 숨어들어간 이종족들에게 터전을 내주어 포용하면서. 대폭적인 무력 향상을 이뤄낸 것이다.태생에 따라 한계가 정해져 있는 다른 왕국과 달리. 제국은 실력만 있다면 올라갈 수 있는 높이에 끝이 없었기에 수많은 강자들이 그의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 결과 제국은 수십년만에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영토를 다스리는 최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황제는 미치도록 유능한 인물인 동시에.‘…그만큼이나 잔혹한 인물이지.’생각을 이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제전의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불을 뿜는 용이 음각된 석문은 황제의 면모를 일부나마 보여주는 듯했다.“여기서부턴 혼자 가셔야 합니다.”칼리파의 말을 따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명의 사람이 보였다. 검을 든 채 이쪽을 지그시 노려보는 기사 하나와, 뒷짐을 진 채 서있는 노년의 남자.…황제.그는 특이하게도 황좌에 앉아있지 않고 내려와 황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천천히 몸을 돌렸다.“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군. 용사 리안. 음… 반갑다고 말을 해야 할까.”그를 처음 마주하고 느낀 감정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보인다는 것이다.이제 막 육십 초반에 접어들었다고 들었는데. 그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더욱 세게 맞은 것인지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외견으로 알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황제의 눈은 권태로운 듯한 감정을 띄고 있었으나, 그게 끝이 아니라 정체를 유추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 또한 섞여 있었기에. “…글쎄.”리안이 잠시의 유예를 가지고 뒤늦게 대답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기사가 검을 뽑아들었다.“무엄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채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기사는 입을 다물더니 납검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끼어들지 말라. 너야말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데 함부로 말을 끊느냐.”“…죄송합니다.”“그리고 용사라면 그럴 자격이 있지. 단신으로 동부 전체를 수호하는 구원자 아닌가.”그가 리안에게 말했다.“대신 사과하겠다. 무례를 용서해주었으면 좋겠군. 기사단장이 충심이 과해서 말이지.”“…….”리안은 말없이 황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수하가 섣불리 행동하게 내버려둘 인물이라고는 생각들지 않는다. 분명 어떤 의도가 있기에 보인 행동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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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의도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변함없이 무표정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그냥 내 방식대로 해야겠군.’굳이 상대가 노리는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으리라. 리안은 굳이 이리저리 뜸들이며 간보는 방법을 선호하지 않았다.“황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좋다. 얘기해보도록.”“목표였던 대륙일통을 포기해가면서 날 여기까지 불러들인 이유가 뭐지? 대체….”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왕국을 떠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고민해왔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질문을.“무엇을 바라길래 사실상 원수나 다름없는 나를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거지?”그 물음이 정곡을 찌른 것일까. 황제는 잠깐동안 아무 말 없이 이쪽을 지그시 쳐다봤고.“……”짧은 침묵 끝에 그가 굳게 다문 입을 뗐다.***몇십분 전.황제는 황좌에 몸을 기댄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용사가 귀빈실에서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보고를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그래. 슬슬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팔걸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킨 후 천천히 황좌 밑 계단을 내려왔다. 충절스러운 기사 라인하르트가 황급히 달려오며 옆을 부축했다.“폐하! 앉아 계시지 왜 일어나시는 겁니까!”“당연한 것을 묻지 마라.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데 앉아있어서야 되겠나.”“…….”라인하르트는 몰래 이를 악물었다. 제복 너머로 만져지는 팔의 두께가 무척이나 앙상했던 것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한창 동부 정복을 선언할 때만 하더라도. 그의 걱정 따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셨단 말이다.“…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는 제국의 숙원을 무너뜨린 대적입니다. 무력만큼은 인정하나, 그를 영입하는 순간 대륙일통의 비원은 멀어질 뿐만 아니라 영영 사라지게 되는데. 대체 왜 그를 영입하시려는 겁니까.”그의 말에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현실을 직시해야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실패했다.”라인하르트가 울컥해하며 소리쳤다.“실패라니요! 소국의 사생아로 시작해 역사에 두번 다시 없을 대제국을 세우셨습니다! 폐하께서 실패자라면 이 세상에 어느 누가…!”“라인하르트.”이름을 부르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는 법이지. 알지 않나. 나는 태양 아래 누구보다 높은 하늘을 날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태양에 닿기 위해, 더 높이 날아오르려 시도했고….”담담한 어조였으나,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실패했지. 그 순간 난 패자가 된 거다. 과거의 영광 따위, 결국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마지막에 선 승자뿐이니까.”한번의 패배도 없이 승승장구해온 그였기에 패배가 더욱 쓰라렸다. 한 발짝. 더도 말고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모든 걸 거머쥘 수 있었는데. 만년의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회고될 영원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었는데.정상에 닿기 직전 비탈길을 굴러떨어져 목표에서 멀어지는 심정이란.“그렇다고 실의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의 신민들은 내 등만 쳐다보고 있으므로.”강자존의 법칙을 모토로 제국을 세운 황제였지만 그도 사실 알고 있었다. 제국은 강자의 존재가 아닌 약자의 희생이 있었기에 클 수 있었다는 걸.“그들은 바보가 아니며….”신민들이 희생을 감내한 이유는 자신들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능력있는 자가 대우받으리라는 방침. 헌신한만큼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제국을 위해 일한 것이었다.“내겐 기대에 부응할 의무가 있으니까.”제국은 동부 전쟁의 패배로 발생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게다가 승리를 상정하고 돌입한 총동원상태가 패전으로 끝이 났기에 산업 전반이 무너질 위기였다.배상금에 더해 파산까지 막느라 국고가 텅텅 비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철권에 짓눌려 고개숙였던 멸국의 후손들이 제국이 내상을 입은 순간을 틈타 스멀스멀 왕국 재건을 노렸다.여러 악재가 겹치고 겹쳐.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강철의 거성이 흔들리고 있었다.“당연히, 쓸모없는 자존심을 부리기보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선…!!”“그만.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 이전까진 맞았을지 몰라도 패배한 순간부터 나는 틀린 거다.”힘을 제일로 삼았던 제국은 그 사상을 바탕으로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약육강식을 추구하여 탄생한 그들이었기에 역으로 확실한 한계가 존재했다. 더 강한 적을 상대하는 순간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시대가 바뀌었다. 무력과 전쟁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시대는 끝났다.”용사 리안. 살아 숨쉬는 무의 총아. 그의 등장으로 흐름이 변했다. 지금껏 대륙의 최강자로 위세를 떨치던 자들은 진정한 절대자의 등장에 고개를 숙였고. 그가 두눈 뜨고 지켜보는 한 더이상의 전쟁은 용납되지 않을 테니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이제 힘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제국의 근간을 뜯어고치려 시도했으나….“…이후로는 너도 알고 있겠지.”“…예.”라인하르트가 무겁게 답했다. 그 방법이 먹혔으면 지금처럼 폐하께서 세월의 여파를 몇배로 맞지 않았을 것이다.군부의 장성들은 수십년동안 반복해온 전쟁과 승전으로 얻은 영광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굳건한 기반이었던 군부가 지지를 철회하자 황제의 힘은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약화된 황권으로는 제국에 닥친 거대한 위기를 헤쳐나갈 방도가 없었다.“아무리 발버둥쳐도, 건국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과욕을 부리다 제국을 말아먹은 망군 신세를 피할 수 없을 판이었다. 그런 내게 찾아온,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희망이다.”“폐하….”“난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이른 새벽. 곤히 잠들어있는 와중 느닷없이 칼리파의 연락을 받아 잠에서 깬 상황에도.그녀의 말을 듣고 떠오른 감정은 짜증이나 당황이 아닌 오직 기쁨뿐이었다. 방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희열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깊은 구덩이에 며칠을 빠져있는데 죽기 직전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었다.용사 리안. 그는 힘을 숭배하는 제국의 신조를 침해하지 않는 무력의 화신임과 동시에. 제국이 다음 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평화의 상징이었으니까.‘그와 동부의 관계가 어긋난 이유는 왕들의 무능한 대처 때문이랬지.’칼리파가 실낱같은 빈틈을 노리고 위기를 무릅써가며 어떻게든 만들어온 기회였다. 만약 제국으로 소속을 옮기기 위해 황성까지 들어온 리안을 잘못된 대처로 놓친다면 그는 황제의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난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개똥밭도 구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 일은 아무 것도 아니지.”“…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해했으면 됐다. 어제 말했던 계획이나 준비하고 있도록.”황좌를 향해 등을 돌린다.“이제 도착한 것 같으니까.”대화를 나누는 동안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제전의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머지않아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리안의 것이었다. 뒷짐진 채 기다리고 있다 걸음이 멈추자 몸을 돌리며 말했다.“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군. 용사 리안. 음… 반갑다고 말을 해야 할까.”그의 호감을 사야하는 입장인데도 존대하지 않은 이유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보겠다. 반목하는 사이였으면서 대륙의 절반을 다스리는 대제국의 황제가 처음부터 극진한 태도로 나온다? 그가 용사였어도 의심만 커질 것이다. 그리고 리안에게서 자연스럽게 반말을 유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글쎄.”리안의 단답이 끝나자마자 발끈하는 라인하르트.“무엄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그가 뭐라 대응하기 전에 재빨리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한다.“끼어들지 말라. 너야말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데 함부로 말을 끊느냐.”“…죄송합니다.”“그리고 용사라면 그럴 자격이 있지. 단신으로 동부 전체를 수호하는 구원자 아닌가.”다시 시선을 돌려 리안을 응시하며 말하길.“대신 사과하겠다. 무례를 용서해주었으면 좋겠군. 기사단장이 충심이 과해서 말이지.”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태도를.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다.“…….”하지만 어색한 연기의 촌극으로 산전수선 다 겪은 용사를 속이긴 무리였는지.리안은 좁아진 눈으로 말없이 이쪽을 응시했다. 의복 아래 몸이 땀으로 젖어갔다.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연다.“황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꿀꺽.저도 모르는 사이에 목울대라 울렁였다. 역시 만만하지 않다. 이쪽의 수를 모두 꿰뚫어보고 있는 것인가.“좋다. 얘기해보도록.” 하지만 상관없다. 처음부터 호락호락할 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제국 제일의 실무진들이 모여 샌 밤이 며칠인가. 예상 질문 수백 가지가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허나.“목표였던 대륙일통을 포기해가면서 날 여기까지 불러들인 이유가 뭐지? 대체… 무엇을 바라길래 사실상 원수나 다름없는 나를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거지?”‘……?’마지막 질문을 듣고 살짝 당황한 눈으로 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왜 이렇게 잘해주냐니?’그에게 극진한 대우를 해주려는 것은 맞다. 제국이 파산하지 않는 선 아래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안겨주려 재상과 몇시간씩이나 대화를 나누었으니까.‘…아직 아무 것도 안 줬는데?’맞긴 한데 토의만 했을뿐 그는 아직 아무 것도 해준게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