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도 몰랐던 내 결혼
1. 나도 몰랐던 내 결혼
“너…… 넌, 이미……결혼을, 했, 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할머니. 제가 결혼을 했다뇨?”
“그 남자와 자면…… 자면, 넌……, 너는…….”
고목 껍질 같던 복순의 손이 빛바랜 병상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이이이!!”
번쩍. 해가 중천에 뜬 낮, 은서는 눈을 떴다.
겨울의 지독한 냉기가 불투명한 창 안으로 흩어진 방 안, 은서는 목을 서늘하게 적시던 냉기를 쫓기 위해 이불을 바짝 끌어모았다.
도대체 무슨 꿈이 이래. 결혼은커녕 남자친구 한번 없던 내가 결혼을 했다니.
‘할머니 유언 때문인가.’
은서는 치매를 앓았던 할머니의 황당한 유언을 떠올리다 쫓기듯 잔상을 지우고는 벽 위에 붙은 나무 시계로 눈을 돌렸다.
오후 1시 25분.
한 달이 다 되도록 미뤘던 할머니의 사망신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은서는 나무상자 몇 개를 이어 붙인, 침대라 하기도 궁색한 낮은 침상에서 발을 내렸다.
냉골과 다름없는 찬 기운이 순식간에 발바닥을 뚫고 정강이를 타고 오르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은서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구석구석 이불을 꼼꼼히 덮어둔 뒤 문을 열었다. 화장실 겸 목욕탕은 마당을 딛고, 계단 두 개를 더 내려가야 나온다.
찬물로 대충 씻은 그녀는 낡은 기둥 못에 걸린 거울을 보며 크림 뚜껑을 열었다.
“아…… 이것도 없네.”
피부에 바를만한 것도 이젠 다 떨어졌기에 은서는 수건으로 얼굴 한 번을 더 쓸어내린 뒤, 거울에서 창백한 표정을 걷어냈다.
날이 상당히 추웠기에 그녀는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두툼한 점퍼와 머플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마을 어귀, 작은 가게 앞에 면사무소로 가는 버스가 선다.
은서가 ‘솔내 상회’ 앞을 막 지나는데, 미닫이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홱 열렸다.
“은서니?”
큰 소리로 그녀를 부른 이는 가게 주인인 부녀회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좀 괜찮아?”
“……네.”
“얼굴이 반쪽이 됐네, 그냥.”
할머니의 일을 묻는 거라 은서는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괜찮은지 아닌지 자신도 잘 모르겠어서.
“에이그, 어찌 그리 복이 없는지. 아직 어린 사람이. 쯧쯧. 복순 할매는 그리 멀쩡하더니 어떻게 며칠 사이에 그렇게 되나? 좀 들어와. 날 추운데 차라도 좀 마셔. 버스 오려면 15분은 기다려야 하잖아.”
일부러 권한 것을 거절할 수 없어 안으로 들어서니 가게 안 평상엔 동네 사람들이 모여 화투를 치고 있었다.
은서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아랫지방에서 왔다던 정실네가 대추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어떻노? 니 진짜 마음이 없는 기가?”
“뭐 말씀하시는 거예요?”
은서가 눈을 깜빡이자 한쪽 다리를 접고 화투를 치던 이장댁이 화투장을 바닥에 탁 내려놓고는 은서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 성태 있잖아.”
“……성태? 조 씨 아저씨요? 조 씨 아저씨가 왜…….”
말이 끝으로 달려갈수록 의도가 대충 짐작이 돼 말끝이 흐려졌다.
마을에 하나뿐인 처녀 은서와 마흔넷의 총각 조성태를 이어주려는 저 징글징글한 오지랖.
성태 모는 가끔 주전부리도 주고 부식 거리도 주며 할머니의 환심을 샀고, 내심 고마워하던 할머니는 그 흑심을 알고 나서야, 은서에겐 결혼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성태 모와 한바탕 대거리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던 터인데.
할머니가 세상에 없긴 없는 모양이다.
“저, 집 정리되면 여기 곧 떠날 거예요.”
“왜? 집이 여긴데 가긴 어딜 간다고?”
“공부 다시 하려고요.”
“공부는 무슨! 네가 아무리 공부를 잘했다고 해도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쉽나? 성태 나이 많다고 그러는 거 알어. 근데 열두 살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열여섯이요.”
은서가 손을 두 번 쫙 폈다 접으며 이를 물고 웃었다. 그나마 이렇게 웃는 것은 아팠던 할머니를 몇 번쯤은 살피고 돌봐주었던 그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
“그거나, 그거나 같다 아이가, 야야. 할머니도 가고 없는데 어찌 살라카노. 자고로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뒤가 든든한 법이데이. 와? 너는 명문대 다니고, 성태는 대학 문턱도 못 갔다고 눈에 안 차는 기가?”
“그게 아니고요. 제가 단 한 번도 아저씨를 그…….”
말하기도 민망해 은서는 입술을 물어 난감함을 삼킨 뒤, 마저 말을 이었다.
“그, 남자 같은 거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조차.”
“가스나. 찬바람 씽씽 몰아치는 거 보게. 너 잘되면 동네잔치하고, 오랜만에 동네 신바람 나고 그 덕에 우리도 성님한테 옷도 좀 얻어 입고. 무엇보다 너 나가면 동네에 손해가 막심하다 이 말이다.”
“그래. 은서야, 서울 간다고 좋은 놈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성태 돈도 좀 모았대.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거 일도 아니래. 봤지? 그 팔 불끈불끈한 거. 남자는 그저 힘이 좋아야 밤일도……. 형님, 맞지요?”
“그렇지, 그렇지.”
“짓궂어들. 처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제야 부녀회장이 굳어진 은서의 눈치를 보며 아주머니들을 말렸다.
“저, 가볼게요.”
“아직 차 시간 남았잖아?”
은서는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한 컵을 쟁반에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그 뒤로, 지켜만 보던 성태 모의 역정이 낫으로 찍듯 날아들었다.
“왜?! 우리 성태가 어디가 어때서?! 은서 니, 그러는 거 아니다. 천애 고아 뭐 볼 게 있다고, 우리 성태면 감지덕지하지!”
단전에서 치고 올라오는 단단하고 묵직한 토막. 은서는 울컥거리는 걸 내뱉지 않으려고 목구멍이 아프도록 겨우 밀어 넣어 삼켰다.
* * *
면사무소 안은 한적했다.
창구의 직원은 꽤 싹싹하게도 사망신고 후엔 얼마간 가족관계 서류를 발급받지 못하니 몇 장을 미리 발급받는 것도 좋겠단 말을 했다.
몇백 원도 아쉬운 처지였지만, 할머니가 여전히 살아 있는 착각에 지불할 만큼은 충분했다.
서류상 엄마면서 실제론 할머니였던 묘한 관계.
“여기 있습니다.”
은서는 직원이 건네준 서류를 찬찬히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까만 눈동자가 큰 글씨를 지나 표의 틀 안으로 들어서는데.
뭐지?
은서는 눈을 감으며 머리를 잘게 털고 다시 눈을 떴다. 며칠 밥을 제대로 안 먹었더니 드디어 헛것이 보이나 보다.
은서는 눈을 눌러 비빈 뒤 다시 서류를 위부터 꼼꼼히 살폈다.
그런데…….
은서의 반달 같은 눈이 종이 위에 크게 확대됐다. 얼결에 뒤로 물러나다가 발마저 헛디뎠다. 땅이 몇 미터 아래로 푹 꺼지며 정신마저 아득해진다.
배우자? 이게 뭐야? 배우자라니!
그러다 은서의 머리를 강타한 메마른 음성.
[ 너…… 넌, 이미……결혼을, 했, 어……. ]
그럴 리 없어. 할머니의 말이 사실일 리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한테 남편이 있었어. 도대체 언제!”
* * *
서울 청담동.
쿵쿵쿵쿵. 시끄러운 음악이 화려한 파티장을 가득 채웠다. 여러 개의 테이블 사이로 춤을 추는 젊은 남녀들. 여기저기 부딪치는 요란한 술잔들.
세련된 의상으로 쫙 빼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지인을 찾거나 인맥을 쌓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파티는 서운 건설 장남의 생일 파티였다.
또래의 젊은 기업가와 연예인, 인플루언서들이 가득 찬 파티였지만, 가장 주목받는 테이블은 다른 곳에 있었다.
호텔로는 대한민국 최고인 GK 그룹의 외아들이자 GK 호텔의 대표 권태하.
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테이블의 중심은 단연 그였다. 그는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던 GK 쇼핑을 2년 만에 업계 3위로 올려놓고 호텔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그래.’, ‘나중에.’ 겨우 이 몇 마디가 다였지만, 그가 잔을 들면 같이 따라 잔을 들었고 그가 웃으면 같이 따라 웃었다.
태하는 이를테면, 유강그룹 내외의 은밀한 취미 같은 가십이 오가는 이런 자리를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자리가 자리니만큼 사업에 도움이 되는 소스를 종종 흘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피하진 않았다.
“그런데 권 회장님은 왜 너한테 들어오는 선마다 모조리 퇴짜를 놓으시는 거야? 너야, 아니면 회장님이야?”
“글쎄.”
“너도 까였지?”
누군가 던지는 말에 미성투자 차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도 이 자리에 있고 싶니? 안 껄끄럽냐? 그렇게 태하가 좋아?”
“저 오빠는 재계 1위 태진의 고명따님도 거절한 사람이야. 쪽팔리기로 말하자면 그 언니가 더 쪽팔리지. 근데 태하 오빠, 진짜 왜 거절했어요? 그 언니만큼 좋은 조건 어디 있다고.”
태하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막 술잔을 드는데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 한 명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태하의 경호원 겸 수행기사였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집 앞에 찾아온 걸 이 간호사가 보고 알려준 모양입니다. 오늘 대표님을 못 보면 경찰을 부른다고 했답니다. 중요한 얘기라고 꼭 오늘 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변이 시끄러워질까 봐 일단 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태하가 눈을 돌리자 한 여자가 불투명한 유리벽 안으로 주춤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두툼한 패딩, 촌스러울 정도로 동여맨 값싸 보이는 머플러. 어깨에 매달린 낡은 에코백과 화장기라곤 하나 없고, 대충 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초조한 손가락.
온몸에서 풍기는 가난과 불행의 냄새. 그 냄새를 가리는 건 오로지 눈동자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뭐라도 하면 곧 물 듯이.
“권태하 씨가 누구……?”
“권태하, 왜 찾습니까?”
일행은 굳이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 태하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볼일이 있어서요.”
“저한테 말하면 돼요. 보아하니 권태하 얼굴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 사람과 직접 말하고 싶어요.”
좌중의 눈이 이젠 여자에게 쏠렸다. 파티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범’이란 말도 과분한 초라한 옷차림.
저런 모습을 하고 파티장까지 찾아와 권태하를 찾다니. 호기심 어린 눈들이 여자를 빤히 훑는다.
“말해봐요. 그 조건, 내가 충족시킨 것 같으니까.”
“그럼 그쪽이…… 권태하 씨?”
에코백을 단단히 틀어쥔 여자의 두 손이 창백할 정도로 경직됐다. 멍청한 편은 아닌 모양이라며 태하는 고개를 까딱이며 긍정했다.
“혹시, 저 모르세요?”
“아는 사이였나요? 아니면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인가?”
“혹시나 했는데……. 실례지만 할 말이 있어요.”
“말해요.”
“여기 말고 다른 데서요.”
“여기서. 보다시피 일행도 있고, 중요한 얘기 중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신분조차 밝히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는 주의라서.”
태하가 일행을 의식적으로 스윽 훑었다. 테이블의 사람들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송은서라고 합니다. 이젠 됐나요?”
여자는 꼿꼿했다.
후, 파티장까지 찾아와 곧 시작될 사업 얘기를 방해한 것도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돌아버리겠네.
나직한 웃음과 함께 태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색 구두가 바닥을 지그시 누르고 곧이어 날렵한 긴 다리가 테이블을 우아하게 빠져나왔다.
포마드로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올 블랙 슈트의 남자.
키는 190이 좀 안 되려나.
이런 분위기의 남자를 본 적 없던 은서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나무라도 된 듯 그제야 발이 얼어붙었다. 음영 진 얼굴의 이목구비는 반듯하게 또렷했고 어디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눈매는 예리하고 눈빛은 사람을 얼어 붙일 정도로 서늘하다. 입매는 시원스럽고 진중한데 태도는 여유롭다. 거친데 없이 우뚝 솟은 콧대는, 날렵하고 뚜렷한 턱선과 함께 남자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고집이 참 세네요. 그런 말 종종 듣죠? 그런데 어쩌죠. 지금 발목을 다쳐서 멀리 나가긴 좀 그런데.”
태하는 슬랙스를 걷어 흰 붕대가 감긴 왼쪽 발목을 보여줬다. 얼마 전에 스키를 타다가 미끄러지는 사람을 피하려다 생긴 부상이었다.
가벼운 것이었으나 자리를 이탈해서 여자의 말을 들을 정도로 가벼운 건 또 아니었다.
여자의 정체는 어쩌면 GK 취업에 실패한 취준생일 수도 있었고.
“그럼, 무슨 말을 하든 날 원망하진 마세요. 가지 않겠다니까 여기서 말할게요. 전 지금 뵈는 게 없거든요.”
태하의 얼굴에 설핏 스친 건 의구심이었다. 여자의 표정이 꽤 절실했기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쪽이.”
은서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가 한숨 쉬듯 나머지 말을 터뜨렸다.
“내 남편 같아요.”
시끄러운 음악이 뚝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