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결혼은 무효
2. 이 결혼은 무효
‘와우’, ‘휘익’. 동시에 터진 짧은 탄성과 휘파람 소리 또한 묵직한 공기에 금세 파묻혀버렸다.
숨 막히는 정적, 싱긋 올라갔던 태하의 입매가 싸늘히 내려갔다.
“그게 무슨 X같은 소립니까?”
“그렇게 말해 줘서 다행이에요.”
피식, 태하는 두 번째로 웃었다. 차디찬 실소가 턱 아래로 낮게 흐른다.
남편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이젠 또 다행이다?
“다시 말해봐요. 내가 그쪽의…….”
차마 ‘남편’이란 말도 나오지 않아 태하는 오른손을 어이없게 폈다가 접으며 미간을 바짝 좁혔다.
손끝을 따라가던 은서의 눈은 손이 접히기 무섭게 태하의 말을 완성했다.
“남편이요.”
답과 함께 숙이는 고갯짓 또한 확고한 답이었기에 태하는 입술 끝을 가볍게 올렸다.
29년 동안 그 어떤 여자에게도 단 한 가닥 설렘조차 느껴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자기의 성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되돌아보며 고민까지 했는데, 결혼?
“요즘 기자들이 내 프로필 깠나? 아니면 어디 정신병동 문이라도 열어놓은 건가?”
그제야 태하의 눈치를 보며 웃지도 않던 좌중들이 키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진짜 미쳤나 봐.’, ‘약 한 거 아니야?’ 노골적인 야유와 비웃음. 그러나 사람들의 비아냥이 들리지도 않는지 은서는 미동도 없었다.
태하는 더 볼 것도 없이 테이블을 가린 불투명한 유리벽까지 걸어 나왔다.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해, 모두.”
일행을 향해 단단히 경고한 그는 은서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와요. 망신당하기 전에.”
조금 전만 해도 다쳤다던 발은 꽤 멀쩡했다. 그의 뒤를 수행 기사가 바삐 따랐다.
“차, 준비해요.”
여러 개의 테이블을 지나 로비로 나온 태하는 그제야 뒤를 돌았다. 쿵쿵거리던 음악 소리는 문이 닫히자 희미하게 사라졌다.
“난 여기서 갈 겁니다. 황당한 얘긴 못 들은 거로 하죠.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서 봐주는 겁니다.”
“권태하 씨잖아요.”
허. 태하는 혀를 한 번 차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섰다. 어찌나 빠른지 은서는 따라가기도 벅찼다.
“차 왔습니다!”
보안요원의 말에 태하는 더 볼 것도 없어 주차장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차에 올랐다. 시트에 앉자마자 태하는 윈도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출발하죠.”
눈치를 보던 김 기사가 액셀을 밟으려는 순간, 오 분의 일쯤 열린 창틈으로 다급히 서류가 밀려 들어왔다.
손목을 다칠 뻔했는데도 은서는 팔을 빼지 않았다.
“뭡니까?”
“서류요! ……혼인 확인 서류요!”
필사적인 목소리에 거의 닫혔던 창이 서서히 내려왔다. 둘 사이를 막았던 답답한 선팅이 벗겨지자 짙은 남자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태하는 여전히 불신하는 눈빛으로 은서를 살뜰히 감시하며, 가운데가 깨끗하게 접힌 서류를 편다.
그러기를 단 몇 초.
서류를 읽어내리는 동안 반듯한 미간이 급격히 좁혀지는가 싶더니 짙은 눈썹이 지독하게 꿈틀거렸다.
< 송은서 배우자, 권태하 >
이게 무슨.
주민등록번호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으며 송은서는 그보다 한 살 어린 여자였다.
태하는 비스듬하던 턱을 반듯이 들었다. 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다시 내렸다.
좁은 공간으로 남자가 들어오자 은서는 몇 발짝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이봐요. 송은서 씨, 나 알아요?”
“이제는요. 그러는 권태하 씨는 정말 나를 몰라요? 정말?”
가늠하려는 눈빛이 칼을 간 것처럼 날카로웠다. 뼈마디 마디, 핏줄 사이사이 들어차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견고한 눈빛.
앳돼 보이는 여자는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좀 전과 달리 잘게 떨리는 눈망울은 침착한 목소리와 달리 불안했다. 꼭 무언가 잘못한 사람처럼.
그렇겠지, 사기꾼일 테니까.
“송은서 씨. 목숨 두 개예요? 아니면 집에 돈이 많나?”
“네?”
“수습하려면 둘 중 하난 내놔야 할 텐데. 뒷감당 가능하냐고?”
“…….”
“내가 지금 당신 같은 부류를 처음 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데.”
“…….”
“누가 보냈어요?”
“무슨 말이에요?”
“어디서 이런 거 배웠냐고 묻잖아.”
“지금 뭔가 착각을 하시는 모양인데, 배우다뇨? 뭘요?”
“결혼 사기. 이런 거 하면 돈 좀 된다고 들었나? 아니면 스토커야?”
은서의 입술이 뜨악 벌어졌다. 남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거다.
결혼 사기.
이곳을 오기 전 했던 숱한 의심들.
혼인신고는 할머니가 혼자 벌인 일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불편하고 까다로우며 상대의 개인정보를 철저히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할머니가 혼자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이 든 할머니를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의 남자라면 뭔가를 노리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아주 형편없는 놈, 그도 아니면 정상적으로는 결혼할 수 없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사람.
어쩌면 장기매매? 아니면 인신매매?
그러나 결혼하고 석 달이 다 되어가도록 남편이란 사람은 그녀를 찾기는커녕 연락조차 없었단 사실에 혹시 그 남자도 누군가의 농간에 휘말렸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왔다. 장기가 털릴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녀의 의사나 감정은 이 결혼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온갖 흉흉하고 복잡한 생각에도 결론은 하나였기에.
집이든 파티장이든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거다.
뭐가 됐든, 이 결혼을 물러야 한다.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뭘까요? 내가 사기 치는 걸까?”
“겉만 봐서 모르는 게 사기꾼이잖아요. 어쩌면 그쪽이 사기를 치는 걸 수도 있고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겉이 멀쩡하다고 해서 아쉬운 게 하나도 없으리란 법은, 없죠.”
태하는 코웃음을 치며 은서의 쪽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제가 하고 싶은 얘기예요. 전 정말 가진 게 없거든요. 줄 수 있는 것도 없다고요.”
“송은서 씨, 잘 들어요. 난 기회를 줬고, 기회를 놓친 건 당신입니다.”
“저기요, 뭘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전요, 이 결혼 무르려고 찾아온 사람이에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문서가 거짓이어도, 또 이 문서가 진짜여도 당신은 내 변호사를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아니, 저기요. 제가 그쪽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은서의 손에 쥔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한 건.
손안에서 부르르 떨리는 화면을 바라보던 그녀는 태하와 휴대폰을 번갈아 보고는 좀 망설이더니 곧 뒤를 돌았다.
“여보세요?…… 집이요?”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커져 태하의 귀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수리요? ……그럴 리 없어요. 잘못 아셨……지금 바로 갈게요.”
그를 향해 다시 돌아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경황없어 보였다.
“다시 올게요.”
통보처럼 마지막 말을 마친 은서는 서둘러 뒤를 돌았다.
황급하게 뛰어가는 여자를 보며 태하는 몇 미터 뒤에 선 비서에게 일렀다.
“최 팀장. 저 여자 쫓아요. 동선마다 체크하고, 특별한 일 있으면 보고하고. 뭐 하는 여자인지 알아내요. 필요하다면 사는 곳까지.”
최 팀장이 가버린 뒤에도 태하는 여전히 달려가는 은서의 뒤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결혼이라.
그렇게 비소하며 돌아서는데, 불현듯 어깨가 달궈진 송곳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뭐지. 벌레에 물렸나?
다시 또 찌릿. 흐읏.
태하는 왼쪽 어깨를 감싸 쥐며 차체에 기댔다.
견갑골 쪽 근육이 조금씩 욱신거리더니 이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작열감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빠르게 퍼졌다.
따가운 바늘이 살갗을 너덜대도록 헤집고 화염에 휩싸인 것 같은 뜨거운 통증이 핏줄을 끊어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태하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차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활활 타오르는 어깨를 감쌌다.
호흡이 어려웠다.
기억하는 시점부터 2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처음으로 느끼는 극심한 통증. 23년 전 견갑골에 문신으로 새겨진 글자가 뜯겨나갈 것처럼 격렬히 반응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거 뭐야. 뭐가 이렇게.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
수행 기사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태하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고통을 참느라 목에 툭 불거진 핏대와 하얗게 질린 얼굴이 곧 쓰러질 것 같아 수행 기사는 태하의 팔을 제 목 뒤로 걸었다.
“이리 기대세요. 이리로!”
그러나 얼마 못 가 태하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회색 하늘이 온통 까맣다. 정점의 끝에서 넓게 퍼지며 흩날리는 가벼운 눈송이가 뺨의 열감에 금세 사라졌다.
하얀 눈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식은땀이 배어 나와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온몸을 관통한다.
“회장님께 알리겠습니다!”
다급한 기사의 말에 태하는 필사적으로 기사의 넥타이를 그러쥐고 눈앞으로 잡아당겼다. 바짝 조인 목덜미로 겨우 뱉은 밭은 음성이 귀를 쩍쩍 갈랐다.
“그 여자, 그 여자 얘긴 전하지 말아요. 걱정하…… 걱정…….”
타원으로 좁혀지던 눈앞이 이윽고 흐려졌다. 점으로 남았던 흰 빛이 사라지자 까만 장막이 순식간에 시야를 덮쳤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 * *
“하아, 하아, 하아.”
강원도 끝 쪽 솔내 마을.
막차가 끊겨 다음날이 되어서야 버스에서 내린 은서는 집을 향해 부리나케 뛰었다.
버스를 탄 내내 초조하게 긁히던 손바닥은 겨울이었어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 짐 안 빼주고 어디 갔어요? ]
[ 무슨 말씀이세요? 짐이라뇨? ]
[ 오늘까지 짐 빼주기로 했잖아요? 사정사정해서 몇 달 봐줬더니 아직도 안 빼고 있으면 어떡해요? 곧 수리 들어가야 하는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
분명, 전세 기간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석 달 전에 계약을 종료하고 전세금을 반환받은 것이다.
할머니는 그 돈을 현금으로 받았고, 돈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기를 당한 건지, 아닌 건지 그조차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할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이미 끝나버린 전세 계약, 돌려받은 전세금은 흔적조차 없고. 비슷한 시기 이뤄진 혼인신고,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
결혼, 권태하, 사기.
그녀 인생에 결코 있어선 안 되는 단어들이 그녀를 혼돈으로 이끌었다.
언젠가 2년 다니고 접었던 대학을 다시 다녀보겠단 희망도, 번역사가 되기 위해 통번역대학원을 다녀보겠다던 꿈도 모두 다 사라졌다.
나라에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돈은 할머니 병원비와 생활비로 충당하기도 벅찼고, 그나마 명문대생이라고 과외로 벌었던 돈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아프다고 하면서도 곧 죽어도 서울로는 오지 않겠다던 할머니를 위해 모든 꿈을 잠시 접었었다. 잠시 그래도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삭제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정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유일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을 뿐인데, 통장에 남은 돈이라고는 장례를 치른 뒤 남은 삼백이 전부.
불행의 망령이 발목을 잡고 까마득한 수렁으로 끌어당기는 기분.
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딱딱한 얼음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하얀 재처럼 흩어졌다.
집마저 없으면, 그것마저 없으면. 정말 어떡해야 하지.
겨울의 한낮, 인적 없는 농로를 쉼 없이 달리는 은서의 뺨엔 마를 새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