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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버리는 쪽은 누구

비밀 동거 연애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3. 버리는 쪽은 누구

“안녕하십니까?”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우영은 ‘솔내 상회’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평상에 담요를 펴고 앉아 화투를 치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도시에서 온 이방인의 모습은 꽤 준수했고, 이름난 관광지도 아닌 이곳에서 그의 등장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우영은 온장고에서 캔 커피 하나를 꺼낸 뒤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지갑을 꺼냈다.

“계산이요.”

부녀회장은 지폐를 받은 뒤, 금고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건넸다.

“잔돈은 됐습니다.”

우영은 주인의 입꼬리에 화색이 도는 것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마을에 혹시 송은서 씨라고 사나요?”

송은서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확인했고, 이건 그저 태하가 내린 분부에 충실히 임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여자인지 확인하는 것.

“은서?”

“형님, 은서 말하는갑네.”

“은서는 왜요?”

아까와 달리 경계를 띤 눈빛에 우영은 싱긋 미소 지었다.

“뭘 좀 놓고 가서 찾아주려고요.”

“어디서 왔는데요?”

“서울이요.”

“서울?”

“공부 다시 한다더니 그거 알아보러 갔었나? 걔 외국말인지 뭔지, 만날 번역만 했잖아.”

“그럼 성태는 어쩌고? 이러다 정말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 아닌가?”

웅성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어딘지 께름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성태’ 분명 남자의 이름이다. 어쩌면 VIP가 원하는 정보일 수도 있고.

“성태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우영은 캔 뚜껑을 따, 한 모금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대화에 합류했다.

“거, 은서랑 결혼할 사람이다.”

아.

“결혼할 사람이 있었군요. 혹시나 했는데.”

“그럼, 있지. 왜요? 설마 서울서 은서 보러 온 거요?”

“뭐, 겸사겸사요.”

그 말에 지켜만 보던 성태 모가 나섰다. 아무래도 이러고 있다간 멀끔한 서울 총각에게 은서를 뺏길 것 같았다.

“이봐요, 서울 총각. 남의 동네 처녀 눈독 들이지 말고 가시게. 가뜩이나 농촌 총각 결혼할 사람 없다고 외국으로 다니면서 눈 빠지게 헤매는 판인데. 은서는 내 며느리요, 어릴 때부터 다 말이 된 사이라, 이 말이오. 말이 나와 말이지, 보아하니 총각은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데 뭣 하러 은서는 탐하는지 모르겠네.”

“그럼, 그럼. 이미 두 사람 사이 말이 다 끝난 사이지. 은서 할머니 죽고 이제 걔 혼자라서, 둘이 결혼하고 같이 살날만 남았다니까. 은서가 가진 게 없어서 그게 좀 문제지, 성태는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그래요.”

대충 돌아가는 판이 보였다.

은서와 성태는 이전부터 결혼이 약속된 사이다. 그리고 은서의 할머니가 죽으며 혼자가 된 여자가 안쓰러워 성태는 곧 그녀와 결혼하려고 한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송은서는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태하를 목표로 뭔 짓을 한 건 아닐까?

불행히도 태하는 이런 시골 촌부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도,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니었을 텐데.

무모한 짓을 벌였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고용주인 태하를 너무나 잘 아는 우영은 은서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며 남은 커피를 한 모금에 비우고 캔을 으그러뜨렸다.

“실례했습니다.”

우영은 태하에게 보고할 생각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곤 찬 바람을 맞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휴대폰을 꺼냈다.

신호가 울리자 다소 나른한 태하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침묵 속에 은서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태하는,

‘바로 갈게.’

그를 알던 중, 거의 들어본 적 없던 싸늘한 어조로 말을 남겼다.

또한 그 말은 서울 올 생각 말고 은서를 계속 지켜보란 말이었기에, 우영은 하는 수 없이 어제 봐두었던 은서의 집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전화를 끊은 뒤, 태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베개 쪽으로 상체를 밀어 올렸다. 격통은 간헐적으로 찾아왔고, 황당하게도 은서에게 가겠다는 말을 남긴 시점 거의 사라졌다.

기절은 잠깐이었고, 별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링거와 붕대까지 제거하고 병원을 나섰다.

나서기 전에 아버지 권 회장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으나, 분명 소식이 전해질 거란 생각은 했다.

태하는 수행 기사의 만류에도 직접 운전대를 잡고, 우영이 찍어준 주소로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꽤 먼 거리였다.

성태라고 했나.

남자가 있으면서, 그런 주제에 겁도 없이.

사기를 친 것도 어이가 양 뺨을 치는데 양다리, 게다가 손에 쥔 두 개의 떡 중에 버리는 쪽이 권태하.

하. 미치지 않고서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

태하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영의 말에 의하면 서류는 위조된 것이 아니었다. 혼인신고는 은서의 할머니가 한 것이었고, 어쩌면 그 배후에는 송은서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결혼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나에게 돈이라도 뜯을 작정이었겠지.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할머니가 죽었고, 성태와의 결혼 얘기가 급물살을 탄 거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와의 서류 정리가 필요했던 거고.

아니야. 역시 이상하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완벽한 혼인신고를 한 사람이 그 정도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게다가 어떻게 개인적인 정보를 모두 알 수 있었을까. 이쪽의 누군가 조력자가 있는 건가?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도로를 끝없이 질주했다.

* * *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태하가 우영을 만난 것은 흰색 외관의 단층 짜리 마을회관 앞에서였다.

시골의 저녁은 서울과는 달라 날이 저물자 칠흑 같은 어둠이 짐승 같은 아가리를 벌리고 새카만 혀를 드리웠다.

“왜 여기야?”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우영은 오늘 하루 몇 군데를 돌며 마을에서 모은 정보를 브리핑했다.

“전세 계약이 끝난 모양이야. 송은서는 그 점은 전혀 몰랐던 것 같고. 오늘부터 새로 바뀐 집 주인이 수리를 시작할 거란 말에 부랴부랴 짐을 싸서 나온 거고. 당장 짐을 들고 갈 데가 없으니까 오늘 하루 마을회관에서 묵는 거래.”

“그렇게 갈 데가 없나.”

“찾아오는 친척도 없어. 솔직히 이번 일 아니면 매우 평범해. 범죄 이력도 없고 평판도 좋아. 그런데 할머니가 송은서한테 지독할 정도로 못되게 굴었나 봐. 근래엔 좀 나아졌었고. 게다가 할머니는 죽기 전에 치매 증상도 보였다는데.”

태하는 낮게 혀를 찼다.

“그보다 성태인지 뭔지와 결혼한다는 거 보니 당장 거취가 바뀔 것 같진 않고. 혹시 도망간다 해도 주민번호도 아는데 네 능력에 추적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쯤 해서 올라가고 내일 다시 조사 시작하는 건 어때?”

그래도 태하가 미동도 하지 않자 우영은 애꿎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탁탁 두드리며 염려의 말을 전했다.

“지금 갈 거 아니면 저녁이라도 먹고 오든지. 쓰러졌다면서. 물론 결혼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네가 쓰러진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그도 그럴 것이 태하의 부친 권 회장은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고, 또 사랑한 만큼 많은 것을 완벽하게 가르쳤다.

지적인 부분뿐 아니라 체력적인 면에도 ‘혹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태하를 단련시켰다.

수영, 검도, 테니스는 기본이고, 사격, 복싱, 격투기, 펜싱, 호신술 등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지인들 사이에서 ‘인간 병기’라고 불리던 태하가 아니던가.

감기조차 비켜 가는 강철 체력이었는데, 그런 태하가 쓰러졌다니. 오랜 친구 우영이 걱정할만했다.

“그래, 사는 곳 확인했고. 너도 피곤할 테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신을 상대로 이런 대담한 일을 벌였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겨우 이런.

“가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헤드라이트가 고요한 마을회관 벽을 돌아 방향을 틀었다.

누군가 라이트 불빛 안에 서서 두 팔로 눈을 가리는 모습이 보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태하의 눈이 사이드미러로 그 남자를 좇았다. 남자는 주춤주춤하더니 마을회관 정문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이 시간에도 마을회관을 이용하는 사람이 꽤 있는가 보다.

“송은서가 혼자 짐을 옮겼다고 했나?”

“응. 짐도 몇 개 없었지만, 그마저도 혼자 아주 낑낑대더라고.”

“왜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원래 시골은 늘 바빠.”

“너 같으면, 여자친구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짐까지 혼자 옮겨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어떻게 하긴, 휴가를 내서라도 도와야지.”

“그렇지, 그게 맞는 거지. 그리고 마을회관에 묵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아, 좀전의 그 남자는 성태였나? 그럼 이제 송은서를 집으로 데리러 가는 건지도.

기분, 참 더러웠다. 게다가 다시 시작된 것 같은 미약하게 후끈거리는 불쾌한 통증.

두 사람은 마을을 떠나기에 앞서 물과 커피를 사기 위해 솔내 상회에 들렀다. 부녀회장은 낮에 온 손님, 우영을 기억하며 살갑게 맞았다.

“이제 올라가는가 봐요.”

“네, 이제 올라가려고요.”

“한 사람이 더 온 모양이네.”

“친구요.”

부녀회장은 훤칠한 태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금고에 돈을 집어넣었다.

“그래, 은서에게 물건은 잘 전해줬어요?”

“아직 못 전했습니다.”

“아이고, 어디 있는지 못 찾은 모양이네. 그 물건 나한테 줘요. 내가 전해 줄게.”

부녀회장이 손을 내밀자 우영은 난감했다. 줄 게 없었으니까.

“아뇨, 아뇨. 제가 나중에 따로 전하겠습니다.”

“은서한테 정말 마음이 있는가 봐요. 굳이 만나서 전하려는 걸 보면.”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태하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러나 아랑곳도 없이 부녀회장은 아라비안나이트 셰에라자드라도 된 듯 줄줄 말을 늘어놓는다.

“맘 있으면 남자답게 밀어붙이기도 해야지. 그렇게 물러터지면 못 써요.”

“애인 있다면서요.”

부녀회장은 심드렁한 우영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있긴 뭐가 있어요.”

“아까 어르신들이 그러셨잖아요. 결혼할 사람 있다고.”

“성태? 에이이, 아니에요. 마을 형님들이 괜히 성태가 장가도 못 하고 마흔이 넘도록 저러고 있으니까 괜히 붙여주고 싶어 그러는 거지. 성태는 은서를 어찌해보고 싶은 모양이지만, 은서는 마음조차 없습디다.”

“…….”

“나이 차가 얼만데. 도둑놈도 아니고. 열여섯이에요, 열여섯! 뭘 그렇게 눈독을 들이는지. 욕심도 정도껏 부려야지. 하여튼 은서 혼자 된 거 알고 망할 놈이 또 저리 설치네. 은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쳐다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라니, 아휴. 은서가 어떤 앤데, 그리 착한 애를.”

두 남자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태하의 뇌리에 마을회관 정문으로 비칠대며 걸어가던 남자가 번개 치듯 떠올랐다. 술을 진탕 마신 것이 틀림없어 보이던 남자.

젠장.

태하는 엄습하는 불안감에 들었던 물건을 놓고 다급히 몸을 돌려 차로 뛰었다.

견갑골에 흐르던 찌르르한 통증이 더욱 강해졌다.

도대체 빌어먹을 통증은 왜 또.

그 시각 은서는 회관 안쪽에 있는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등으로 문을 막는데 필사적이었다.

“은서야아! 송은서어어!!”

과격한 고함이 얇은 문을 뚫고 은서의 온몸을 소름 끼치게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