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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편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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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편의 자격

얼마 전, 여행객에게 회관을 숙소로 내주며 청년회장이었던 성태가 이장에게 열쇠를 반납하지 않은 것을 몰랐던 은서는 욕실 앞에서 성태를 딱 마주했다.

까만 머리카락에서 흰 목덜미로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게걸스럽게 쳐다보던 눈동자.

사납게 번뜩이는 빨갛게 선 핏발을 눈앞에서 인식하는 찰나, 은서는 있는 힘껏 성태를 밀어내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현관이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그 길을 택했겠지만, 하필 현관은 성태의 뒤쪽이었고 그녀가 택한 결과는 이성적인 판단의 최고치였다.

술에 취해 뭉그러진 발음이 들려온 건 그때부터였다.

112에 신고할 휴대폰은 거실에 있었고, 방의 창은 방범을 위한 창살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어디도 도망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녀가 한 일은 누군가 지나가다 들으라고 창문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은서야, 문 좀 열어 봐아! 도대체 왜 날 피하는 건데에!!”

‘아저씨, 정말 왜 이래요.’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으나 성태를 자극할까, 은서는 터지는 울음조차 가까스로 삼켰다.

그러고는 차갑게 머리를 식히려 노력하며 방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은서야! 한 번만, 이 문 좀 열어보라고 씨X! 이 문 내가 그냥 망치로 때려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어! 좋은 말 할 때 나오라고!!”

밀대였다. 방 한구석에 물걸레를 끼워 바닥을 닦을 때 쓰는 밀대가 사선으로 세워져 있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가벼운 둥근 막대지만 어릴 때 할머니에게 맞아봐서 안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휘감던 차갑고 무자비한 감각. 맞는 순간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몇 조각으로 바스러지는 고통.

저거면 한 대 후려치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이 시각에 마을회관 쪽을 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운이 좋다면 술에 취한 성태를 따돌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숨는 것과 달리기만큼은 어릴 때부터 특화돼 있었다. 화가 난 할머니를 따돌릴 때 쓰던 기술.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나와아!”

쿵! 발로 문짝을 후려치는 소리였다. 그 반동에 은서의 엉덩이가 덜컥 밀려났다.

“어차피 너, 갈 데도 없잖아. 다 해 먹고 갔다며 그 늙은이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음습한 소리가 기괴하게 공간을 그러쥐었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툭 튀어나오고 한기가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한 번만, 은서야, 나 좀!”

은서는 문에서 떨어져 밀대가 있는 곳까지 엉금엉금 기어갔다. 소리의 이격이 좁혀지는 것으로 보아 곧 문이 열릴 기세였다.

은서는 성태의 어디든 가격할 참으로 밀대를 잡자마자 헤드에서 막대를 돌려 빼기 시작했다.

퍽! 발로 문을 차는 소리와 함께 합판으로 된 문의 가운데에 길쭉한 금이 생겼다.

잠시 멈칫했던 은서는 손을 더 빠르게 회전했다. 다시 쿵! 세로로 난 금이 비끗 벌어지며 합판이 쩍 쪼개졌다.

문만 열어봐라. 너부터 죽여버릴 테니까.

은서가 연습으로 막대를 공중에 휘두르는 순간, 황소 같은 힘에 손잡이가 문을 이탈하더니 쾅!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은서가 막대로 허공을 힘차게 갈랐다. 따앙!

“으어억!!”

정확하게 어깨를 맞은 성태가 고통의 신음을 냈다.

그러나 은서가 재차 휘두르려고 막대를 위로 올리던 찰나 두툼한 손이 막대를 삽시간에 가로채 바닥에 내던지곤 은서의 어깨를 잡고 코너로 몰았다.

지이이익, 발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은서의 몸이 속절없이 밀렸다.

“이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탐욕스러운 눈빛이 은서를 구렁이처럼 휘감는데, 와장창!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공기를 예리하게 찢었다.

성태의 고개가 사태 파악을 위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순간, 반대쪽으로 머리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가슴팍에 검은 구둣발이 떨어지고 그대로 나가떨어진 성태의 목덜미가 종잇장처럼 짓이겨졌다.

“하, 새끼. X같이도 논다.”

차갑게 내린 억양을 끝으로 빛을 등진 목소리의 주인은 벽 위로 단단한 그림자를 세웠다.

권태하였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밭은 신음을 흘리며 성태는 죽어가는 가젤처럼 사지를 파들댔다.

엄습하는 고통에 두툼한 두 손이 태하의 발목을 사력을 다해 쥐었지만, 그 손마저 다른 발에 사정없이 걷어차였다.

붕 떴다 떨어지는 팔이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오르며 비정상적으로 꺾였다. 눈꺼풀이 경련하며 말렸다.

“끄윽, 끅. 끅. 누구, 누군……데…….”

“송은서 남편.”

온기 한 점 없는 서늘한 눈동자가 사위를 장악했다.

“죽여, 태하야.”

뒤로 들어온 우영이 태하의 일렁이는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술을 더 떴다. 그러곤 초점 없는 눈으로 주저앉아 달달 떨고 있는 은서에게 저의 재킷을 벗어 덮어줬다.

“눈은 왜 감는데? 기도해?”

발아래 깔린 성태의 눈이 공포로 희번득 벌어졌다.

한참 위 남자의 표정은 피 냄새를 맡은 짐승 같았고, 어둠에 잠식된 목소리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아냈다.

정말 여기서 죽는구나.

빈약하게 붙은 숨이 고르지 않았다. 환히 밝았던 전구 빛이 회색으로 점멸하고 불그죽죽한 관자놀이에 굵게 선 핏대가 불끈불끈 뛰어올랐다.

자그작자그작 목덜미를 짓이기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생생하다. 구두 밑창에서 나는 흙냄새는 무덤의 냄새였다.

“태하야. 네 이름 1면에서 보고 싶지 않은데. 그럼 나, 바빠져.”

우영이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자 잠시 망설이던 발이 힘을 주어 찍어누르곤 목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커억 컥, 컥. 성태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막혔던 숨을 사납게 토하며 가쁘게 공기를 들이켰다.

혈색이 돌아옴과 동시에 태하가 한 발을 내딛자 그의 발을 주시하던 성태가 화들짝 몸을 물리며 웅크렸다.

“가요.”

태하는 재킷째로 은서를 품에 안아 들었다.

맘에 들진 않지만, 도저히 걸으란 말이 나오지 않아서.

“우영아, 넌 여기 수습하고 올라와. 차는 보내줄게.”

“차는 됐고. 그보다 그 팔로 운전할 수 있겠어?”

그제야 태하의 눈이 오른팔에 붙은 우영의 눈을 따라 움직였다. 셔츠 소매의 팔 아랫부분이 선명한 붉은 색으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아픈 것도 몰랐다. 아드레날린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그보다 견갑골의 끔찍한 통증에 비하면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를 괴롭히던 전례 없던 통증은 완전히 멎었다.

태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회관을 나섰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품에 안겨서도 은서는 숨소리 한 번을 크게 내지 않았다.

우영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시트를 완전히 뒤로 눕혔다. 은서에게 벨트를 매어주고 그녀의 신발을 내려놓은 뒤에 우영은 문을 닫았다.

“회장님껜 어떻게…….”

태하가 입술 위로 두 번째 손가락을 올렸다.

“조용히.”

“어디로 갈 거야?”

“호텔은 보는 눈이 많아 아버지께 보고될 가능성이 크고. 대책 없이 경찰에 갈 수도 없고. 권태하가 혼인 사기 당했다는 소문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잖아.”

“그래서?”

“보안 철저하고 소문날 일도 없는 곳으로 가야지.”

우영은 알아들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은데 상처는 치료하고 가.”

“내가 알아서 할게. 저 새끼나 처리해.”

우영이 방향을 틀어 사라지자 태하는 운전석에 곧장 올랐다. 그러고는 넥타이의 매듭을 끌러 이로 물었다. 그리고 커프스단추를 풀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다.

상처는 팔꿈치 아래로 나 있었다. 5센티쯤 예리하게 찢어진 길쭉한 상처였다.

마을회관은 굳게 잠겼었고, 쿵쿵 문을 걷어차는 마찰음이 벽을 뚫고 들려왔다. 열린 창 사이로 문을 차는 굉음이 거칠게 쏟아졌다. 그 사이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막대를 든 겁에 질린 한 여자가 보였다.

망설이지 않았다. 태하는 슈트 재킷을 벗어 팔에 두어 번 휘감았다. 그리고 방범 창살이 없는 거실의 창을 그대로 꿰뚫었다.

창살에 붙은 유리 조각을 대충 걷어내고 벽을 지렛대 삼아 훌쩍 뛰어넘었다. 그때 벤 모양이다.

“제가 할게요.”

언제 일어났는지 은서가 시트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눈을 내린 태하는 거절 대신 넥타이와 함께 팔을 내밀었다.

은서는 차분하게 상처의 위쪽에 타이를 꼼꼼하게 감았다.

“긁힌 부분이 심해요. 가다가 응급실에서 치료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정돈 아닌데요.”

“어떡해…….”

꽤 끔찍한 걸 본 듯 찡그린 미간이 바쁘게 움직였다.

얇은 살갗을 뚫고 따뜻한 체온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꾸밈 하나 없는 단정한 손가락이 단단한 팔 위에서 신중하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실크 재질의 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매듭이 자꾸 풀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한숨보단 헛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 모양인데, 제가 대신해 준다고 나서기까지 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닌 모양인지.

집중한 은서의 미간이 도도록하게 올라왔다. 두어 번 더 실패한 끝에야 겨우 모양이 완성됐다.

은서가 팔을 놓자 태하는 팔을 한 번 툭 털고는 핸들에 손을 얹었다. 서서히 방향을 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은서가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태하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왜 도와주셨어요? 절,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사기꾼으로 의심할 땐 언제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묻지 않겠지만 자신을 도와준 이유는 묻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짧지 않은 침묵 뒤의 답은 쉽고 간결했다.

“집도 없어서 마을회관에 간 사람이잖아. 도망가면 개고생해서 찾아야 하니까.”

“아, 그렇지. ……그렇겠네요.”

은서는 자조하듯 입꼬리를 늘였다.

“그런데, 틀렸어요. 난 도망치고 싶어도 갈 곳이 없거든요. 최악이죠.”

“그럼 오늘은, 이리로 도망치든가.”

너무나 고요해 숨소리도 대화가 되는 차 안. 단단하게 선 태하의 시선 위로 은서의 시선이 공명하며 천천히 스며든다.

“진짜 어디 가는 거예요?”

“왜요, 경찰서라도 갈까 봐?”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은서는 웃지 않았다.

“경찰서도 괜찮아요. 지금 제겐 유치장이라도 필요하거든요. 이젠 어딜 가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상관이 없다?”

“네.”

정말 사기꾼은 아닌 모양인지. 될 대로 되라는 눈빛은 박제처럼 건조했다. 비스듬히 내린 시선을 따라 태하의 음성이 묵직한 반향으로 돌아왔다.

“내가 어디 갈 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