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rawler

숲 속의 마법사 (1)

침대 위의 대마법사 — novelpia.com · All chapters

숲 속의 마법사 (1)

내 일상에 쉬는 시간이란 없었다.평일엔 새벽까지 납땜질.주말엔 편의점 아르바이트.그렇게 살다가 과로로 쓰러졌다.공장에서 쓰러지던 마지막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하나였다.‘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그 소망은 엉뚱하게 이루어졌다.눈을 뜨자 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세계였다.그도 그럴 게 이곳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짬을 내어 읽었던 웹소설, <아카데미의 근성 법사> 속 세계였으니까.그 사실을 깨달은 건.하필이면 ‘나’를 키워준 사람을 떠나보내던 날이었다.*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문고리를 잡으려다 무심코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허리까지 내려오는 잿빛 머리에 물처럼 투명한 눈동자.SNS가 있었다면 셀카 몇 장만 올려도 팔로워를 쓸어 담을 가녀린 외모의 미소녀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이게... 나?”심각한 인지부조화가 왔다.내가 기억하는 나와 전혀 닮지 않았다.외모도, 체형도.심지어 성별마저도.루나리스 에버문.지금의 내게 붙은, 낯설고도 어색한 이름이었다.이 세계의 바탕이 되는 소설 <아카데미의 근성 법사>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이름이기도 했다.즉, 나는 원작이 존재하는 이 세계의 정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마을 소녀 A로 환생한 것이다.“오히려 좋은 건가...”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문을 열었다.텅 빈 집 안은 엉망이었다.바닥 곳곳에 두꺼운 마법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책상 위엔 온갖 수식이 난잡하게 적힌 양피지 더미가 쌓여 있었다.그 사이에 바지런히 놓인, 금빛 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황실 마법사 후보자 추천서][대상자: 루나리스 에버문]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툭 나왔다.이제 보니 나, 마을 소녀 A가 아니라 황실 마법사 후보 A였다.머릿속으로 소녀의 기억이 스쳐갔다.새벽같이 일어나 꾸역꾸역 마법식 외우고.점심 먹자마자 소화시킬 새도 없이 마나 명상.오후 내내 실험 보조에.저녁엔 마법서 필사 숙제까지....판타지 버전 과로사 루트, 제대로 타고 있었다.“할아범.”아무도 없는 빈 방을 맴도는 목소리.그 위로 자신이 없어도 마법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겹쳤다.나라면 꼭 자신의 뒤를 이어 황실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라던 응원도 어렴풋이 들렸다.그게 순수한 응원이라고 착각했던 때도 있었다.하지만 전생을 자각한 지금은 명확히 보인다.할아범, 그거 칭찬 아니었잖아.그냥 나 당신 뒤 잇게 하려고 가스라이팅한 거였지.“미안한데, 황실 마법사는 무리야.”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마법을 쓰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럽다.“이번 생도 일만 하다 죽기는 싫어서 말이지.”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불꽃이 책상을 향해 날아갔다.누군가에겐 수천 골드 이상의 가치였을지도 모를 추천서가 양피지와 함께 순식간에 타들어갔다.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잿가루를 보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전생 몫까지 합쳐서 뒹굴거리기.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살기.그래, 이번 생엔 반드시—“눕방 고수가 될 거야.”원작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 A라면, 그 정도 자유는 있잖아?다행히 이 세계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사는 방법이 존재했다.마법.판타지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는 그거, 맞다.마나를 이용해,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이 능력이면 충분히 꿈을 이룰 수 있다.서재를 쭉 훑어보다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마법서 한 권을 뽑아들었다.[무(無) 속성 상급 마법서: 염동 마법과 공간 마법의 기초] 염동 마법.멀리 떨어진 물건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마법이다.이거라면.“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을 수 있어...!”*삐걱, 끼이익—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 시간에 여기 올 사람이라곤 딱 한 명뿐이니까.“역시 오늘도 침대랑 한 몸이네, 루나 언니.”문틈 사이로 붉은 단발머리 소녀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역시나, 소꿉친구 리아였다.“들어올 때 노크 좀 해.”나는 책에 두 눈을 박은 채 무심하게 중얼거렸다.“매번 했지. 그런데 언니, 한 번이라도 대답해준 적 없잖아.”“...없었던가?”

d3kza0VLSVdxajZ6L09aWC8xUnR2SEp2Nk84UElDVmFjWk9CZkJ6VCtSWUVxdzVxc1pLbTJVUVhQMEZTY0VaYg

“단 한 번도.”리아는 웃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익숙한 일상이었다.“마법 공부해?”“그럴 리가.”마법 공부라면 손 뗀 지 오래 됐다.머리에 쥐날 일 있어?“그럼 무슨 책 읽는 거야?”“고전문학.”“언니는 맨날 그런 어려운 것만 보더라. 재밌어?”“그냥 시간 때우기.”사실 정말 재밌는 건 아니었다.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는 이세계에서 침대 위에 누워 할 수 있는 일이 독서밖에 없었을 뿐이다.그나마 다행이라면, 여기서 ‘고전문학’이라 불리는 것들이 전생에서는 ‘판타지’로 분류되던 책들이라는 것 정도일까.물론 언제까지고 책만 볼 수는 없으니 슬슬 다른 취미도 생각해봐야겠지만.“그러지 말고 밖에 나가서 햇볕도 쐬고 그래.”“귀찮은데...”“그러다 진짜 침대랑 한 몸 된다?”“오. 그거 좋네. 내 평생 소원이야.”날 빤히 바라보는 리아의 시선이 느껴진다.곧 에휴- 귀여운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언니, 그러다 정말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산다?”“혼자 사는 게 최고야.”아무리 내가 여자로 산지 벌써 6년째라지만, 남자랑 부대끼고 사는 건 생리적으로 무리다.“...그래, 그럴 줄 알았어.”리아는 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품에 안고 온 바구니를 챙겨 일어났다.그리곤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근데 오늘 아침은 챙겨 먹었어?”“...적당히 알아서 먹었어.”“언니, 또 대충 쿠키나 몇 개 주워 먹었겠지.”뭐야, 얘 우리 집 감시하나?괜히 찔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톡, 톡, 톡. 리드미컬한 칼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솔직히 리아가 해준 밥이라면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먹을 만했다. 요리, 정말 잘한다.특히 리아의 에그타르트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먹어본 음식 중 제일 맛있다.어떤 놈팽이가 우리 리아를 데려갈지는 모르겠다만, 내 마법을 버티지 못하는 녀석한테는 절대 넘겨주지 않을 거다.“아, 언니. 나 올해 엘테리온 아카데미 입학시험 보려고 해.”...라고 다짐했는데, 하필이면 망할 아카데미가 우리 리아를 뺏어간단다.“알지? 황도에 있는 가장 큰 아카데미 알지? 거기 졸업장만 있으면 평생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대.”“그래? 좋겠네.”“언니는 아카데미 들어갈 생각 없어? 나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됐어. 귀찮게 뭘. 돈도 많이 들잖아.”“언니 마법 실력이면 충분히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냐?”“뭐... 그렇긴 하겠지만...”내가 아카데미를 들어갈 일은 절대 네버 없다.그도 그럴 게 엘테리온 아카데미는 온갖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는 원작 소설의 메인 무대니까.마음 같아서는 리아가 간다는 것도 말리고 싶다.“리아, 나 에그타르트-”“언니, 밥 먹기 전에 군것질은 안 돼.”“너무해애...”*점심을 먹고 나서는 소화를 시킬 겸 가볍게 대련을 했다.리아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대비한 실전 연습이기도 했다.귀여운 동생인데,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딱히 에그타르트에 혹해서 넘어간 건 절대 아니다.물론 몸을 움직이는 건 리아뿐이다.나는 침대에 기대 누운 채 염동 마법으로 목검을 움직였다.탕- 탕-나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나는 읽던 책을 한 쪽으로 치워두고 창밖을 내다보았다.‘확실히 늘었네.’처음에는 내가 움직이는 목검에 리아가 정신없이 휘둘리기만 했다.지금은... 거의 엇비슷한가?이 정도면 장학금은 무난하게 타먹을 것 같다.그때 리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후우... 이젠 이걸로는 별로 연습이 안 되는 것 같아.”“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슬슬 식곤증 때문에 졸리기도 했고, 이대로 자버릴까 싶던 참이었다.“근데 언니.”하지만 리아는 쉴 생각이 없어보였다.쯧. 누가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건강한 아웃도어파 아니랄까봐.인도어파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다.“혹시 나한테 공격 마법 좀 써줄 수 있을까?”...어? 뭐라고?“갑자기 공격 마법은 왜?”“왜, 아카데미 가면 마법학부 애들이랑 붙을 수도 있잖아. 미리 경험 좀 해보고 싶어서.”“귀찮은데...”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곧 리아의 몸이 부드럽게 떠올랐다.“어? 자, 잠깐만... 꺅?!”그대로 레일 없는 롤러코스터 한 번 시원하게 태워주었더니 리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깔깔 웃으며 좋아했다.“아하하! 이거 재밌는데? 좀만 더 빠르게... 가 아니라! 진짜 공격 마법 말이야!”이마 위로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염동 마법 말고... 진짜 공격 마법?“다른 마법은 좀... 그런데...”말을 더듬기가 무섭게 리아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흐흥~ 언니, 설마 다른 마법은 못 쓰는 거야?”...이 꼬맹이가?“다쳐도 난 몰라.”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았다.동시에 가장 쉬운 공격 마법의 수식을 머릿속으로 암산했다.매직 미사일.하급 수준도 안 되는 기초 마법이라면 설령 사고가 터진다고 해도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곧, 손끝에서 작은 빛이 피어올랐다.“...어? 언니, 잠깐만. 뭐, 뭔가... 이상하지 않아?”빛이 점점 크기를 키워나가더니 이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이래서 다른 마법은 안 쓰려고 한 건데.“...리아? 잘 피할 수 있지?”“뭐, 뭔데? 잠깐... 꺄악?!”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기가 무섭게.빛이 창밖을 향해 튕겨 나갔다.콰아아앙-!!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이게 고작 기초 마법의 위력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리아는 구덩이 바로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벌벌 떨고 있었다.“...오, 살았네.”“살았네, 가 아니라! 방금 진짜로 죽는 줄 알았잖아!”“생각보다 좀 강하게 나갔어.”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적당히 얼버무렸다.“...이게 앞으로 네가 상대할 마법학부 장학생 수준이야.”“거짓말 치지 마! 내가 아무리 마법은 잘 모른다지만 이게 어떻게 학생 레벨인데?!”“아무튼 고의는 아니었어.”진짜다. 이건 정말 사고가 맞다.그도 그럴 게 내 마법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까.바로 염동 마법을 제외한 모든 마법이 과출력으로 나간다는 점이다.대충 기초 마법을 쓰면 중급 수준의 마법이 나간다고 보면 된다.이거, 하나도 좋은 게 아니다.고위력의 마법이 나가는 만큼 마나도 많이 잡아먹는다.무턱대고 난사하다가 마력 탈진 걸리기 딱 좋다.고등급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고등급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르다.이게 다 염동 마법을 배우기 위해 빠르게 상급 마법사가 되겠답시고 욕심을 부린 탓이다.기초를 제대로 다지지도 않고 속성으로 마나량만 냅다 늘렸으니 하자 있는 마법사가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마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엔 이미 늦었다.아니, 너무 귀찮다.어차피 염동 마법으로 딸깍 인생 살기 위해 마법 배운 건데. 이미 목적은 다 이뤘다.리아에게 5성급 매직 미사일이 날아간 것과 같은 사고는 정말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다....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