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마법사 (2)
숲 속의 마법사 (2)
“아야야... 언니, 여기 아직도 빨갛지 않아? 좀 봐봐.”리아는 살짝 삐끗한 발목을 핑계 삼아 그대로 내 침대에 눌러 앉았다.“네 발목은 그냥 네가 넘어져서 그런 거잖아.”“그치만 마법에 놀라서 넘어진 건 사실이잖아.”리아가 생글 웃으며 말했다.저걸 보면 진짜 아픈 사람이 맞나 싶다.“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슬슬 좀 내려가지?”“싫어어어~ 여기 푹신해서 기분 좋단 말야.”리아는 이불을 포옥 끌어당기며 행복한 얼굴을 했다.“하아... 마음대로 해.”세상 귀여운 여자애라 봐줬다.시커먼 사내놈이 저러고 있었다?그럼 인정사정없이 등짝에 파이어스톰 냅다 갈겼지.리아는 그대로 이불 위를 이리 뒹굴, 저리 데굴, 굴러다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슬슬 갈게.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야 돼서.”“무슨 일 있어?”“응. 요즘 숲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나 봐. 늑대 같은 야생 동물이 마을까지 자꾸 넘어온다고 어른들이 걱정하시더라고.”리아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내 쪽을 돌아보았다.방금 전까지와 달리, 퍽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언니도 조심해. 자기 전에 창문 잘 닫고.”“걱정 마.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이 집에 쳐들어올 수준의 마수면 애당초 문단속을 하는 의미가 없다.그보다도.“애 맞잖아. 나보다 작으면서.”“하긴, 내가 너보다 가슴이 많이 작긴 하지.”“무, 무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얏?! 키 얘기라구, 키!!”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빽 소리를 질렀다.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리아, 너야말로 조심해. 마을에 늑대 쳐들어오면 괜히 나서지 말고 어디 숨어 있고.”“에이~ 웬만한 어른들보단 내가 더 셀 걸?”“하긴, 그것도 그러네.”리아는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럼 내일 봐.”문이 닫히고, 익숙한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창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어째선지 잠이 오지 않았다.낮잠을 잔 것도 아니고, 평소보다 마법을 많이 썼으니 피곤할 법도 한데.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괜히 한숨을 쉬었다.-요즘 숲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나 봐.낮에 리아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솔직히 전혀 공감이 안 됐다.사실 숲이 이상하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늑대가 울부짖고, 새들이 푸드덕대고. 밤만 되면 온갖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인데, 뭐.물론 이제는 적응했다. 시골 마을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다만 오늘따라 리아의 경고가 묘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어선...”몸을 일으켜 커튼을 살짝 젖혔다.창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린다.저긴... 마을이 있는 방향인데?“축제라도 하는 건가?”창문 틈으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개가 짖는 소리 같기도 했고, 사람의 비명 같기도 했다.아니, 어쩌면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별거 아닐 거라고.애써 혼잣말을 중얼거려보지만 그래도 뭔가 계속 찜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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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귀찮게.”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대충 걸치고 오두막집을 나섰다.이건 그냥 산책이다.잠이 안 오니까, 바람이나 쐴 겸 좀 걷는 것뿐이다.슬리퍼를 질질 끌며 숲길을 따라 걸었다.마을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한밤중에 굳이 나와 걸어가기엔 영 내키지 않는 거리였다.“괜히 나온 거 아냐?”차가운 밤공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그래도 기왕 나왔으니까. 괜찮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가자.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더 걸으니, 시야 끝에 수상한 그림자가 잡혔다.“...저건 또 뭔데?”커다란 날개를 가진 무언가가 밤하늘을 맴돌았다.처음엔 한 마리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뒤이어 다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두 마리, 세 마리, 넷...잠깐, 이건 좀 많은데?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마을을 밝히던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순간,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잠이 싹 달아났다.떠오른 건 딱 하나뿐이었다.저 마을에, 리아가 있다는 것.루나리스는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급하게 떠오른 탓에 슬리퍼가 벗겨졌다.서늘한 바람이 맨발을 스쳤지만, 지금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이대로 집에 돌아갔다간.평생 꿈자리가 사나울 테니까.*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마을을 습격한 건 수십 마리에 이르는 와이번 무리였다.-키에에엑!!-카아악!!이쯤 되면 이미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재해였다.“어째서... 와이번이...!”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리아는 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눈앞에 있는 와이번을 노려봤다.다른 녀석들에 비해 몸집이 작은 어린 와이번이라 해도 리아보다 두 배는 컸다.와이번이 이를 드러내며 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리아는 숨을 삼키고 재빨리 몸을 낮췄다.날카로운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가슴이 뛰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리아는 발을 단단히 땅에 디딘 채 균형을 잡고, 온 힘을 실어 검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흐으윽...”칼끝에 단단한 가죽이 닿았다.마치 단단한 바위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손목이, 어깨가, 온몸이 떨렸다.리아는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었다.-서걱.근육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와이번의 날갯죽지가 깊게 베였다.녀석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비명과 함께 땅 위로 고꾸라졌다.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고쳐 쥐었다.날카로운 칼날 위로, 그녀의 머리칼과 닮은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이제 겨우 한 마리.그것도 가장 작고 약해 보이는 녀석 하나를 처치했을 뿐이다.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절망적이었다.여전히 수많은 와이번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루나 언니는 괜찮을까...’숲속 오두막에 혼자 있을 소중한 언니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이 시간이라면 분명 깊게 잠들어 있을 텐데. 제대로 도망이나 쳤을지 모르겠다.어떻게든 깨우러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고개를 돌리자 시뻘건 불덩이가 그대로 리아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어느새?!’리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타오르는 불꽃이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빗겨갔다.하지만 불길이 옮겨 붙은 나무 기둥이 그대로 우지끈, 무너져 내려 리아를 덮쳤다.“아아악!!”신경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왼쪽 다리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눈앞이 새까맣게 질렸다.정신을 못 차리는 리아의 머리 위로 와이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날카로운 이빨이 끈적이는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시, 싫어!”리아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아픔에, 공포에 사로잡혀 손끝 하나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이대로 끝이라는 절망적인 생각에 질끈 눈을 감은 순간.“왜 그러고 있어.”익숙한 목소리가 리아의 귀에 닿았다.“평소엔 잘만 뛰어다니면서, 이거 하나 못 피하면 어떡해.”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하지만 은근한 걱정이 섞인, 나른한 목소리였다.리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을 덮치려던 와이번이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모습이다.그리고 바로 그 앞에.리아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희미하게 흔들리는 잿빛 머리칼과 작고 여린 뒷모습.하지만 어째선지.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등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루나 언니...!”여긴 어떻게 온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다른 와이번이 루나리스를 덮쳤다.위험하다고, 경고를 전할 새도 없이.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동시에 와이번의 육중한 몸체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염동 마법의 응용이었다.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시야의 중심에 서 있는 게 자신이 오래도록 봐온 ‘루나 언니’라는 것이다.루나리스가 몸을 돌려, 리아를 바라보았다.차갑게 굳어 있던 쪽빛 눈동자에 온기가 스며들었다.그녀는 리아에게 다가와, 무릎을 살짝 굽혔다.“조금만 자고 있어.”루나리스는 피가 엉겨 붙은 리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주었다.그 무심한 루나리스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눈 뜨고 나면...”속삭이듯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리아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루나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이어 말했다.“전부 끝나 있을 거야.”그 말과 함께, 나태한 마녀가 기지개를 켰다.작고 가녀린 손끝에서부터.엄청난 양의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주변 불길과는 대비되는,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검은 연기로 뒤덮였던 밤하늘 위로.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마법진이 수없이 펼쳐졌다.“이 순간만큼은 내 마법이 엉망으로 나가는 게 꽤 쓸모 있긴 하네.”루나리스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듣고 리아는 쓰게 웃었다.밤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인 마법이 ‘엉망’이라니.하긴, 집앞 마당에 큼지막한 구덩이를 파놓고서도 기껏해야 학생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니까.참 언니답다고 생각하며, 리아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이건 대체 무슨...!”기사들과 함께 뒤늦은 마을 지원을 온 에이브릴 남작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하늘 위로,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마법진이 수도 없이 펼쳐졌고.그 마법진으로부터,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끝없이 쏟아졌다.-콰앙! 쾅!!마을을 습격했던 와이번들이 얼음 덩어리에 맞아 힘없이 떨어졌다.몸이 으깨지거나 얼음송곳에 뚫린 모습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맙소사...”“저 정도면 상급... 아니, 최상급 마법인가...”에이브릴 남작은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곁에 있는 부관에게 물었다.“마탑에서 지원군을 보내준다고 했던가?”부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따로 연락은 없었습니다.”“하긴 마탑이 이런 외진 시골마을에 인력을, 그것도 차기 마탑주 급 대마법사 인력을 파견할 리가 없지.”그렇다면 대체, 저 압도적인 마법은 대체 뭐란 말인가?곧, 얼음 폭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타다 만 건물 잔해가 눈에 띄었다.다만. 와이번 무리가 습격한 것 치고는 생각보다 마을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그 마법이 아니었으면...’에이브릴 남작과 기사들이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곳곳에 와이번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거대한 얼음덩어리에 몸을 꿰뚫려 바닥에 박혀있는 녀석.무거운 바위에 짓눌려 으깨어진 녀석.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마치 무언가에 쥐어 짜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한 각도로 비틀린 녀석들이다.“우욱!”“이런 끔찍한...!”그 끔찍한 장면에 아직 경험이 적은 몇몇 젊은 기사들이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에이브릴 남작 역시 얼굴을 찌푸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하지만 언제까지고 충격을 받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정신들 차려라. 지금부터 생존자를 찾고 부상자들을 살핀다.”“네, 남작님!”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즉시 움직였다.에이브릴 남작은 기사들이 마을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선, 마을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확인해야 한다. 대체 누가 이런 마법을 사용한 것인지...’얼마나 걸었을까.희미한 안개와 서리의 장막 너머로, 작고 왜소한 실루엣이 드러났다.잿빛 머리카락이 차분히 내려앉은 몸 주위로, 푸른빛의 기이한 스파크가 어지럽게 튀었다.‘설마 저 소녀가?!’마을 앞에서 본 대규모 마법을 펼친 당사자가 저렇게 어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주변 정황을 보면, 저 소녀 외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에이브릴 남작이 소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려 했다.그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식은 쪽빛 눈동자가 남작을 향했다.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눈동자였다.자신이 행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그저 무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시리도록 살벌했다.에이브릴 남작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그리고는 정중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마을을 구한 이를 향해 예를 표했다.‘어째서 이런 시골 마을에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숲속에 묻혀있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재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