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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마법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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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마법사 (5)

“에버문 전 단장님께선 늘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국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하고도 늘 부족하다 말하셨죠.”“...”“그 분께 가족이라도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평생 마법에만 매달리시느라 결혼도 못 하셨죠.”부단장님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앗... 아아...”내 눈가도 촉촉해졌다.역시 동정...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그래도 말년엔 루나리스 양처럼 좋은 손녀이자 제자를 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전 단장님도 많이 자랑스러워했겠죠.”“음, 제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마법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나는 최대한 겸손한 척 돌려 말했다.“솔직히 저보다 의욕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이 제국엔 널렸을 것 같은데.”지난번에 영주님을 돌려보낼 때 써먹었던 바로 그 초식이었다.하지만 상대는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하하! 의욕 있는 사람이야 많겠죠. 하지만 감히 장담컨대, 루나리스 양보다 재능 있는 사람은 제국에서도 몇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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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황실 마법사단에 들어오는 신입들 평균이 상급 마법을 겨우 쓰는 수준이라느니.보는 눈이 까다로운 에버문 전 단장이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검증된 거라느니.부단장님은 내가 준비해둔 온갖 핑계를 사전에 차단했다.“하아. 부단장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그런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에요.”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어, 나는 그대로 드러누웠다.뭐, 꼬우면 억지로 끌고 가보든가!“그 마음은 저도 잘 압니다. 누구나 젊을 때는 자유를 꿈꾸는 법이죠.”부단장님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허공에 둥둥 떠 있는 책, 뭉근하게 끓는 가마솥, 그리고 침대에 널브러진 내 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유유자적 연구나 하면서 지내는 삶이라니, 솔직히 조금 부럽습니다.”다만, 루나리스 양.잠시 말을 끊으며,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하다.“언제까지고 이 숲에서 편히 지낼 수만은 없을 겁니다. 조만간 더 성가신 일이 닥칠지도 모르니까요.”“성가신 일이라뇨?”“이미 루나리스 양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벌써?“마탑과 황실의 마법사들이 ‘와이번 무리를 홀로 쓸어버린 어린 마녀’에 대해 관심을 보이더군요.”머지않아 다른 마법사나 군부, 심지어 황실에서도 루나리스 양을 찾아올 거라며.자신과 달리, 그들은 조금 강압적일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은 숫제 협박에 가까웠다.물론, 이것도 나한텐 안 통한다.“까짓 거, 다른 나라로 가버리죠, 뭐.”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부단장님은 웃음을 터뜨렸다.“루나리스 양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진 않군요.”“어째서죠?”“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귀찮은 거.”나도 모르게 푸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 사람, 나를 너무 잘 안다.“그래서 말인데, 루나리스 양에게 아주 현실적인 차선책을 제안하려 합니다.”부단장님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마치, 지금이 진짜 본론이라고 말하는 듯.“황실 마법사단에서 평생 일하는 것 대신, 황도에 있는 엘테리온 아카데미에서 4년 정도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평생이 4년으로 줄었다.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못해도 90% 이상의 파격적인 세일이다.아무것도 몰랐다면 아주 조금 혹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나로서는 최악의 제안이었다.다른 곳도 아니고, 앞으로 온갖 사건사고가 벌어질 게 뻔한 엘테리온 아카데미다.건물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건 예삿일에.후반부에는 저주받은 드래곤이 미쳐 날뛰는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라고?심지어 <아카데미의 근성 법사>는 완결이 나지 않은 소설이었다.내가 마지막으로 본 연재분 뒤로도 분명 온갖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졌겠지.“차라리 황궁에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아카데미는 좀...”“오! 정말 황실 마법사단에 들어와 주시겠다는 겁니까?”“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내 단호한 반응에 부단장님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이상하군요. 아카데미에 가는 걸 꺼려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 생각엔 이보다 나은 조건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반대로 제가 묻고 싶네요. 저를 엘테리온 아카데미로 보내려는 이유가 뭔가요? 제게 뭘 시키려는 거죠?”“별다른 건 아닙니다만...”부단장님은 그리 운을 떼며 크흠- 헛기침을 했다.“실은 올해 3황녀님께서 엘테리온 아카데미에 입학하실 예정입니다.”“3황녀님이라면...?”“셀레스티나 벨하르트 황녀님입니다.”“쿨럭!”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이름에 제대로 사레들리고 말았다.셀레스티나 벨하르트.독자들에게 불리기를, 황녀 선배.<아카데미의 근성 법사>의 메인 히로인이자, 주인공 파티의 핵심 멤버인 그녀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사근사근하면서도 똑부러진 누님 캐릭터가 꽤 매력적이었던 게 인상에 남아있다.그 황녀가 엘테리온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바로 이 시점이었구나.애매한 시간선이 단번에 명확해졌다.셀레스티나 황녀는 주인공 카일보다 한 살이 많으니, 지금은 원작의 사건들이 벌어지기 약 1년 전이었다.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부단장님이 재차 말을 걸었다.“그래서 루나리스 양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간단합니다. 엘테리온 아카데미에 입학해주시면 됩니다.”“...”“원하는 강의를 골라 듣고, 하고자 하는 연구를 자유롭게 하십시오. 다만 간간이 3황녀님이 아카데미 생활을 잘 하고 계신지, 혹시나 위험에 처하지는 않는지 확인만 해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러니까 이거, 사실상 나더러 황녀님 지켜달라는 거잖아.“황녀님 호위 역할은 좀 부담스러운데요.”“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정식 호위가 여러 명 붙어 있으니 루나리스 양까지 호위 역을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그럼 왜 굳이 저까지 끌어들이시려는 건가요?”“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그리 말하는 부단장님의 입가에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역시 이건 거절해야만 한다.엘테리온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도 문제인데, 주연급 인물과 엮이는 건 더 큰 문제다.소설은 멀리서 팝콘 뜯으며 지켜보는 게 재밌는 법이다.직접 체험하는 건 하나도 재미없다.무엇보다 6년을 넘어 7년째 어떻게든 사수해온 내 침대 라이프, 이런 식으로 날려버릴 순 없어...!그때, 문득 머릿속에서 원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카일과 그의 동료들이 마주치는 여러 사건 중에는 터무니없이 스케일이 큰 것도 더러 있었다.이건 근성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정말 꿈도 희망도 없다고 혀를 내두를 때면.어디선가 치트키 같은 존재가 불쑥 나타나, 압도적인 마법으로 상황을 단숨에 정리해버리곤 했다.이런 편의주의적 전개가 어딨냐며 댓글에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치트키 캐릭터가 은근 인기가 많더랬다.정식 이름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대신 ‘수석’, 혹은 ‘잿빛 마녀’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말수가 적고 성격이 까칠해, 웬만한 사람들과는 눈길조차 섞지 않던 괴짜.그래도 셀레스티나 황녀와는 아주 드물게 대화를 나누던...어라?문득 방 한쪽에 놓아둔 전신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허리까지 내려온 잿빛 머리카락을 지닌 상급 마법사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여기에 셀레스티나 황녀의 관계자라는 속성까지 추가된다면.“이런, 씨...!”등줄기에 식은땀이 쭈욱 흘러내렸다.분명 원작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마을 소녀 A에 불과하다고 믿었는데.꿈도 희망도 없는 아카데미 생활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 나, 주인공 파티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아카데미물의 치트키 캐릭터였다.어쩐지 마법이 세상에서 제일 쉽더라니. 이게 다 타고나서 그런 거였네.나는 눈을 질끈 감고선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만약 내가 없다면.가진 거라곤 근성과 정의감뿐인 개복치 주인공 카일은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온갖 억까를 당한 나머지 죽을 게 뻔했다.그럼 원작 후반부에 벌어질 재앙이나 다름없는 사건들을 막아낼 사람도 없어지겠지.귀찮은 일이 아주 많이 귀찮은 일이 되어 내게 되돌아올 게 눈에 선했다.“하아...”조졌다.“흐아아아...!”이거, 입학을 안 할 수가 없다.“갸아아악!!”“...루나리스 양?!”결국 애초부터 나한테 선택권이라는 건 없던 거였다.*해가 뜨기 전에 내 눈이 먼저 떠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숲은 이슬로 촉촉이 젖어있었다.새벽바람이 퍽 쌀쌀했지만, 아주 조금 봄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진짜 가는구나...”나도 모르게 한숨이 툭 튀어나왔다.이 오두막에 정이 든 것은 아니지만, 막상 떠나려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허전했다.“4년 뒤에나 돌아오려나.”물론 방학 기간에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오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나는 다시 한 번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특히 침대 쪽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내가 하도 오래 누워있던 탓에 중앙이 움푹 패인 매트리스를 보니 괜히 쓴웃음이 났다.“아카데미에 가져갈 수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기숙사에 개인 침대를 반입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그보다 애초에 저 큰 침대를 어떻게 들고 갈 건데? 여기에 이삿짐센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손에 쥔 가방에 힘을 줬다.짐이라고는 낡은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가방 안에 들어간 것이라곤 옷 몇 벌과 한창 재밌게 읽고 있던 고전문학책 한 권이 전부다.생필품은 일절 챙기지 않았다.필요한 건 황실 예산으로 적당히 살 생각이다.할아범이 남긴 유산을 쓴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마지막으로 품에 끌어안은 건 오랫동안 사용했던 내 애착 베개다.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두고 갈 수 없다.내 숙면의 지분 90%를 차지하고 있는, 아주 소중한 보물이다.오두막을 등지고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처음 보는 얼굴이 꽤 많다.아는 얼굴도 몇 번 보고 만 게 대부분이다.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한 손에 꼽는다.“루나, 사실 황도로 가는 거 별로 내키지 않는 거지?”그때, 마을 사람 중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괜히 우리들 지켜주려다가 일이 이렇게 돼서...”“에이, 제가 어디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다들 가고 싶어 안달 난 엘테리온 아카데미로 가는 거잖아요.”이거, 출세한 거라니까요?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그때, 멀리서 리아가 목발을 짚으며 내게 다가왔다.“루나 언니가 나보다 먼저 황도로 가게 될 줄은 몰랐어.”명랑한 목소리에 걱정과 아쉬움이 섞였다.“그러게. 나도 내가 마을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지금이라도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눕고 싶달까...”내 투정에 마을 사람들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리아만큼은 웃다 말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언니 나 없으면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을지 모르겠네...”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 코끝도 시큰거렸다.“나 걱정되면 너도 빨리 아카데미 와.”와서 디저트 좀 만들어줘.겸사겸사 내 일도 좀 도와주고.“...응.”“내가 준 약 잘 바르고, 검술 연습도 열심히 하고.”“...알았어, 언니.”리아는 내 품에 쓰러지듯 안긴 채, 기어이 눈물을 터뜨렸다.“루나 언니이이... 고마워, 흐흑! 보, 보고 싶을 거야아아...”나는 부단장님이 끌고 온 마차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리아의 등을 쓸어주며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