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시험의 마법사 (1)
입학시험의 마법사 (1)
“이제 슬슬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부드러운 미소 너머, 부단장님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나를 향했다.“왜 마음을 바꿔, 아카데미로 가시겠다고 한 건지 말입니다.”“딱히 큰 이유는 없어요. 부단장님의 제안을 거절해봤자 다른 사람들이 또 귀찮게 굴 테니까요.”나는 체념하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나도 안 가도 됐으면 끝까지 버텼지.하지만 어떡해. 이 망할 원작이 세계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데.응~ 너 아카데미 안 가면 다 죽는 거야~ 하고.“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카데미가 제일 나은 선택지더라고요.”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게 정말 슬픈 일이지만.“하하, 확실히 맞는 말씀입니다.”부단장님은 내가 적당히 둘러댄 말을 듣고서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으로 바라보았다.창문 너머로 따스한 햇살에 반짝이는 들판과 평화로운 마을들이 지나쳤다.“루나리스 양, 엘테리온 아카데미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대충 이름만 들어봤어요.”실은 잘 알고 있다.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지.“그렇습니까? 흠, 어쩔 수 없군요. 루나리스 양을 위해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간단히 설명해 드리죠.”아,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하지만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단장님의 지루하고 현학적인 설명이 시작됐다.“선대 폐하께서는 다양한 재능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평민에게도 기회를 제공하시고...”한 문장 한 문장이 자장가처럼 스며든다.나는 하품이 나오는 것을 손등으로 슬쩍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창밖에서 쏟아지는 볕에 머리가 따끈하게 익기 시작했다.“...경제학부, 외교학부, 총 다섯 개의 학부로 이루어져 있고...”...아, 더는 못 버티겠어.온몸이 노곤해지더니, 부단장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눈꺼풀이 저절로...감겨... 와...“...검술학부를 제외한 나머지 학부는 필기시험과 면접보고... 그 후에 실기시험을...”이대로 베개에 머리를 묻고서... 흠냐아...“잠깐, 루나리스 양. 제 말 듣고 계십니까?”...아.“어, 음... 안 졸았어여... 듣고 있어쒀여.”진짜로 안 졸았다.잠깐, 아주 잠깐 눈만 붙였을 뿐이다.“정말입니까? 그럼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해보시겠습니까?”“뭐... 대충 학부 다섯 개 있다는 거랑 입학시험 얘기하고 있었잖아요.”“자면서도 들을 건 다 듣고 있었군요.”그니까 이미 다 아는 얘기라고 했잖아요.나는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그런데 설마 저도 입학시험 봐야 해요?”“당연하죠. 설마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갈 생각이셨습니까?”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부단장님을 보고 있자니 내가 더 어이가 없었다.“황녀님 호위하러 억지로 가는 건데, 시험도 보라는 건 좀...”“억지라니요? 제 발로 오셨잖습니까.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루나리스 양은 호위도 아니고 말이죠.”“강요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나 할까...”“아니, 그보다 당신에게 입학시험은 애들 숫자놀이 수준 아닙니까?”솔직히 조금 부담된다.그도 그럴 게 마지막으로 마법을 공부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염동 마법을 마스터한 이후로 제대로 된 마법서는 죄다 팔아치웠으니까.나는 짐짓 심드렁한 말투로 중얼거렸다.“혹시 입학시험 떨어지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도 되나요?”순간 공기가 싸늘해졌다.부단장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지금 그 말, 진심이십니까?”“그냥 해본 말이에요.”제대로 보기는 할 거다. 어쨌든 엘테리온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는 해야 하니까.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는 건 사실이다.차라리 검술학부처럼 실기시험만 봤으면 염동 마법으로 야바위라도 칠 텐데....뭐 어떻게든 되겠지.걱정한다고 해서 안 붙을 거 붙는 것도 아니니까.*황도에 도착한 게 벌써 수일 전이다.그래서 황도에 와서 뭘 했냐고 묻는다면...그냥 잤다.정말 푹 잤다.이야, 침대 퀄리티가 상상 이상이더라고.눕자마자 그대로 숙면했다.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지금부터 입학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어느새 시험을 치는 날이 되어 시험장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시간, 정말 살살 녹았다.흘끗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보니 사뭇 비장한 표정들이 눈에 띈다.입술을 잘근 씹는 학생, 눈을 감고 기도를 중얼거리는 학생, 영혼이 빠져나가 하얗게 질려버린 학생까지.다들 긴장한 채로 시험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턱을 괸 채로 흐아아암- 하품을 했다.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잘 모르겠고, 자고 또 자도 졸린 게 가장 큰 문제다.“지금부터 시험지를 배부하겠다.”감독관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시험지 뭉치가 바람을 타고 두둥실 떠올라, 각 학생들의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대체 무슨 원리인가 하고 살펴보니 시험지 오른쪽 위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내 머리가 마법진을 제멋대로 분석했다.도난 방지에 시험지 지정 위치에 놓기, 그리고 시간 맞춰 회수...이 많은 종이 하나하나에 마법을 새긴 걸 보니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다.그냥 염동 마법으로 대충 문제지 뿌리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마법진에 장난을 치고 싶다는 충동을 꾹 억누른 채, 시험지의 문제를 살폈다.잿빛 양피지는 의외로 글씨가 적었다.공백을 최대한 활용해서 풀어보라는 의미였다.잉크 냄새가 묘하게 짙었다.잠깐 숨을 들이마시고는 첫 번째 문제를 내려다봤다.“...응?”첫 문장을 읽은 순간, 잠이 확 깼다.낯설어야 할 이 문장이, 처음 보는 이 문제가 어째선지 퍽 익숙하게만 느껴졌다.대체 왜...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지?곧, 내 머리가 제멋대로 답을 암산해내기 시작했다.무심코 손에 쥔 깃펜 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제멋대로 숫자를, 또 문자를 휘갈기고 있었다.잉크가 종이에 묻어나오는 촉각, 그리고 소리.시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묘한 몰입감.나는 반쯤 꿈을 꾸듯이 빈 종이를 까맣게 물들여갔다.*시험이 끝난 뒤.교무실은 그 어느 때보다 술렁이고 있었다.“올해 필기시험 난이도가 꽤 높다고 들었는데?”입학시험의 총괄책임을 맡은 정치학부의 수석교수, 하워드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맞습니다. 일반 영역 문제들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지만, 마법 영역 문제는 올해 특히 어렵게 출제했죠.”“하긴, 작년에 변별력이 너무 없었다는 말이 많았으니까.”“저희 연구실의 조교들한테 마법 영역 문제만 풀어보게 했는데, 시간 내에 다 푼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그럼... 대체 이 학생은 어떻게 이걸 시간 내에 다 푼 거지?”교수들의 시선이 두툼한 종이묶음 위에 꽂혀 있었다.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시험지였다.“혹시 부정행위를 한 흔적은 없었습니까?”그 말에 시험장 환경을 세팅한 마공학부 소속의 한 교수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설마요. 시험장마다 설치된 감시 장치가 수십 개가 넘습니다. 시험지에도 마법을 걸어뒀고요.”그걸 전부 회피할 수 있는 지원자라면, 애당초 부정행위를 할 이유도 없다.이미 수석 수준이라는 증거였으니까“그보다 이 학생이 마법 분야의 9번 문제와 10번 문제에 적어놓은 답안 좀 보십시오. 이 풀이, 마탑에 연구 논문으로 제출해도 손색이 없습니다.”이미 마법학부와 마공학부의 교수들은 시험지에 적힌 답안을 따로 프린트해 돌려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하긴, 이건 누구 걸 베껴서 나올 수 있는 답안이 아니긴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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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하워드 수석교수조차 풀이가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이니 말 다했다.“더 놀라운 건 일반 분야의 성적도 최상위권이라는 겁니다.”“뭐라고요?”“만점자들 바로 아래 성적이니 말 다했죠.”“허어, 난 오히려 이쪽이 더 놀랍군.”마법 분야 만점자들은 대개 상식이라는 게 결여된, 나사 빠진 천재들이다.애초에 마법 공부를 하다 보면 다른 공부를 할 틈이 없다.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이가 다름 아닌 루나리스 에버문이다.“일반 분야의 1번 문제만 틀리지 않았어도 사상 초유의 전 분야 만점자가 나올 뻔했군요.”“아니, 1번 문제를 틀렸다고? 제일 쉬운 문제이지 않나.”“정확히는 침 때문에 잉크가 번져, 답을 뭐라고 적었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순간 교무실에 정적이 흘렀다.“...침이요?”“아무래도 시험 도중 잠깐 졸았던 모양입니다.”“세상에, 입학시험 도중 졸다니. 얼마나 피곤했으면.”“밤새 마법 연구라도 했겠죠. 노력하는 천재라니, 허! 이거 참...”이쯤 되니 시험지에 찍어놓은 침 자국에도 뭔가 학생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만 같았다.“마법 재능과 별개로, 일반 분야에 적어놓은 답안만 봐도 탐나는 인재입니다.”“일반 분야 7번 문제 답안, 보셨습니까? 색다른 시각이라 깜짝 놀랐습니다.”“줄 수 있는 점수에 제한이 없었다면 추가 점수를 줬을 답안이긴 하죠.”하워드 수석교수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이 정도면 내 개인 연구실로 데려오고 싶은데. 납치해서라도 말이지.”“어려울 겁니다, 하워드 수석교수님. 그도 그럴 게 이 지원자, 이미 마법학부에서 눈독을...”그때,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이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오~ 호호홋!! 듣자 하니 올해 신입생 중에 아주 대단한 학생이 있다지요?”교무실 문을 거칠 게 열어젖히며 등장한 건 마법학부의 학부장, 레이먼드 클라우드였다.아카데미의 차기 이사장으로 거론되는 거물의 등장에 교무실에 있던 대부분의 교수들이 고개를 숙였다.이제 막 조교 딱지를 떼고, 준교수로 발령받은 햇병아리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존재다.“흥흥~ 어디, 그 학생이 제출한 답안 좀 봐도 될까요?”레이먼드 학부장은 교수들 사이에 있던 루나리스의 답안지 원본을 낚아채듯 손에 쥐었다.“음~ 오호? 이 풀이방식은 또 참신한데... 검증은 필요하겠지만 계산 속도는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고...”종이를 넘기는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그렇게 마법 분야의 마지막 문제까지 확인을 마쳤을 땐, 레이먼드 학부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이거, 마법학부 역사상 최고의 신입생이 나타났군요?”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리 높여 웃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레이먼드 학부장님. 루나리스 에버문 지원자가 마법학부로 간다는 게 아직 확정사항은 아니지 않습니까.”“아뇨. 확정이랍니다, 하워드 수석교수. 내가 잠깐 알아봤는데 이 지원자, 황실 마법사단 부단장님이 후원하는 학생이라고 하더군요. 심지어 벌써 상급 마법사고요.”벌써 상급 마법을 다룬다고? 그 나이에 벌써? 말도 안 돼!교무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상급 마법사라는 게 사실이라면, 능력만 봤을 때 이미 아카데미의 수석교수 수준이다.“이거, 마법학부에서 가르칠 게 있기나 하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학부에서 뭐라도 배워가는 게 그 학생에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하워드 수석교수는 괜히 아쉬운 마음에 이죽거리며 말했다.당연히 레이먼드 학부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가르칠 게 아예 없지는 않겠죠.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빼서 직접 가르칠 테니.”“허어! 항상 시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분 맞습니까?”“최연소 대마법사를 위해서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죠. 아무리 늦어도 졸업 전까지 대마법사 재학생을 만들고 말 테니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세요.”그 말에 다른 교수들은 더 이상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제국 내에서도 몇 안 되는 최상급 마법사이자 마법학부의 학부장, 레이먼드 클라우드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그럼 신입생 면접날에 뵙도록 하죠. 오호호호!!”불만 가득한 헛기침을 하는 하워드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경제학부 교수를 뒤로 한 채, 레이먼드 학부장은 루나리스의 답안지를 곱게 접어 품 안에 넣었다.“미리 말해두겠는데, 루나리스 ‘학생’의 면접은 제가 직접 들어갈 거예요. 그러니 당신 상사에게 굳이 시간 빼서 올 필요 없다고 전하세요, 하워드 수석교수.”“크으윽...!”사악한 웃음소리와 함께 교무실을 떠나는 레이먼드 학부장을 보며, 하워드 수석교수는 분한 마음에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