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학교에서 살아남기 (1)
기사학교에서 살아남기 (1)
‘벴다….’베 버렸다.이젠 돌이킬 수 없다. 지금 난 이 열차에서 벌어질 학살을 막아냈고, 원작 스토리를 크게 비틀어 버렸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속이 사납게 요동칠 만한 상황인데도, 심장 박동은 아주 규칙적이고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고유능력이 감정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건가.’ 의문은 치워둔다.내 시선은 마족 오란켈의 떨어진 머리 쪽으로 돌아갔다. 놈의 얼굴엔 혼란이 그득했다.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는 듯했지만, 목이 없어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스르르. 마족 오란켈은 보라색 마력의 잿가루가 되어 증발했다.마족이란 존재의 최후는 으레 그러했다. 그때, 띠링. 알림창이 나타났다. [특수 업적 「극의로 한 걸음」을 달성했습니다!][조건 : 최종 단계의 경지에 이른 뒤 첫 공격에 성공할 것.] [각 능력치의 성장 속도가 등급에 따라 증가합니다.][극의를 경험한 당신의 육체는 한계를 모르고 성장할 것입니다.] 내 눈이 커졌다. ‘맞다, 이게 있었지. 이걸 상정해서 빌드를 짰었어.’ 본래 고유능력 ‘소드마스터의 영혼’을 보유했어도 최약체의 몸으로 스토리를 깨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내 빌드가 승산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특수 업적 덕분.본래 게임에선 후반부에 달성하여 막판 스퍼트 역할을 했으나, 내 빌드대로라면 초장부터 달성하여 성장 가능성을 열 수 있었다. 푸슈욱!!콰앙!!다발적으로 들려오는 굉음. 여전히 마력을 품은 공격 세례가 늑대 마물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저 방어전은 오로지 주인공과 주역들의 관계 형성에만 영향을 끼치고, 아무런 희생 없이 끝날 것이었다. 물론 내가 손을 거들어주면 더 빨리 끝날 테지만…. ‘안 되겠지. 처음부터 죽으려고 환장할 게 아니라면.’ 이런 조건부 힘을 사람들 앞에서 훤히 드러내 버린다면, 마족 오란켈이 속해 있던 적 세력이 날 노려올 것이 뻔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감으로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날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난 슬그머니 열차 벽 쪽으로 상체를 내려 창문 안쪽을 확인했다. 생도들의 시선은 반대편 창밖의 늑대 마물들을 향하고 있었다.난 창문을 통해 닌자처럼 신속하게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처럼 몸을 숨겼던 위치에 그대로 숨었다. 평소의 몸이었다면 필시 들켰을 텐데.여전히 육체와 마력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있는 상태였던지라 무척 간단하게 느껴졌다. …… 기사들과 기사학교 생도들의 협공으로 열차 디펜스는 무사히 끝났다. 이후 기사들은 던전 공략에 나서서 던전의 보스까지 클리어하고 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엘위>에서도 이랬으니 뭐. 기사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던전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보스를 해치우면 출구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었다. “보스 토벌 완료했고, 출구 게이트 열쇠도 가져왔습니다.”“좋아요, 얼른 나가죠.”“어디로 출구를 생성하면 되겠습니까?”“들어왔던 곳으로요.” 기사가 열차 앞에 서서 은은한 녹색 빛을 흘리는 열쇠를 허공에 대고 돌렸다. 그러자, 화아아!정면에 커다란 녹색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이제야 이 찝찝한 곳에서 나가겠네….”“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첼 교관님? 열차를 옮겨야 하잖습니까.”“네, 쉬면서 마력은 충분히 비축해뒀으니까요. 철로까진 어떻게든 될 거예요.” 스으으! 막대한 염동력이 열차를 감쌌다. 열차는 공중에 떠오르더니 부드럽게 녹색 게이트를 넘어갔다. 녹색 마력의 빛으로 가득한 미지의 터널을 지나자, 열차는 던전에 진입했던 철로 위에 도달했다. 철커덕. 레이첼 교관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신중하게 열차를 철로에 내려놓았다. 마침내 열차 바퀴가 완전히 철로와 맞닿은 때, 그녀는 염동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푹 흘렸다. 현기증이 났는지 이마를 짚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그녀. 하긴, 이만큼 커다란 열차를 철로에 정확히 안착시키는 작업이었으니 많이 힘들었겠지. ‘대단하시네. …어?’ 속으로 감탄을 품고 있자니, 몸 안에 충만했던 마력이 불쑥 사라져 버렸다. ‘고유능력 풀렸다.’ 사람 몸이란 게… 원래 이토록 무거운 거였나? 이거, 역체감 장난 아니다. “아, 음. 크음….” 소드마스터 상태가 풀렸기 때문일까. 고삐가 풀린 양 별별 상념들이 우르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며 가슴속을 세차게 두들겼다. 두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머릿속에서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야, 스토리 완전히 꼬여 버렸다! 어쩔래, 론!? 야, 이제 적들이 난리 치면서 너 죽이려고 안달 나겠다! 어쩔래, 론!? ‘어쩌라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그렇다지만, 아무리 내 행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하려 해도 근심이 일어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마족이 죽었단 것도 걘 알아챘겠지.’ 단 한 명. 마기를 감지할 수 있는 흑마법사가 이 열차 안에 있었다. 그녀의 마기 감지 능력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애당초 마족이 여길 찾아왔던 연유 중 하나가 그녀 때문. 그녀가 어찌 행동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었다. * * * ‘분명 마족이 있었는데….’ 열차는 다시 철로를 달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안도했고, 저마다 아까 빠져나온 던전을 두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편, 한 여자 생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양 손가락을 맞붙이고 꼼지락댔다.물결치듯 내려오는 기다란 진보라색 머리칼에 해골 모양 머리핀을 달고 있었다. 앞머리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왼쪽 눈동자는 덜덜 떨렸다.그리핀 기사학교의 신입생, 바이올렛이었다. ‘분명 위험한 마족이 날 찾으러 왔었는데….’ 아까 던전에 진입했을 때, 마족은 마법으로 바이올렛의 머릿속에 전했다. ‘널, 데리러, 왔다…’라고. 섬뜩한 목소리였다. 바이올렛은 두려움을 느꼈다. ‘마족은 흑마법사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자신은 흑마법사다.마족은 흑마법사의 마력을 좋아한다고, 바이올렛은 흑마도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하여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마력을 끌어올리며 임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바이올렛이었다. 한데…. ‘그걸 누가 해치웠어. 그 사람이 지금, 이 열차 안에 있어.’ 마족의 마기가 극적으로 증발했다. 그가 죽었다는 걸 쉬이 헤아릴 수 있었다.누가 해치운 걸까? 열차 밖, 황량한 던전으로 도망쳤다면 누구의 눈에라도 띄었을 테고. 흔적이 남았다면 아까 주변을 조사하던 기사들이 알아챘을 터. 그렇기에 그 미지의 강자가 열차 안에 있을 것이라고 바이올렛은 추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걸 보고할 수도 없고…. 내가 마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챌 거 아냐….’ 꼼지락대는 손가락이 빨라졌다. ─ ‘바이올렛. 네가 마기를 느낀다는 건 절대 어디 가서도 얘기해선 안 돼. 아직 세상은 그런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알았지?’─ ‘네, 어머니….’ 어린 시절, 어머니의 경고가 바이올렛의 뇌리를 지나쳤다. 마기를 느끼는 능력은 흑마법과는 완전히 별개이며, 저주받은 능력으로 통한다.마족이나 이단 혹은 마녀로 취급당하는 문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자들이 아니고선 마기를 느끼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없었으니까. 설령 예외가 있었다고 해도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지? 여기 사람들을 지켜준 사람이 나쁜 사람일 것 같진 않은데…. 아니, 이건 너무 나 편한 대로 합리화하는 건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사실을 보고하는 데 제 비밀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건 과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해도 속내를 알 수 없고 정체까지 숨긴 강자의 존재를,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알아냈으면서도 무시하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아마 의도치 않았겠지만,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지 않은가. 좋은 사람이라면 보답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 결과, 바이올렛은 새로운 결론에 다다랐다. ‘내가 직접 알아보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떨리고 있던 바이올렛의 눈동자가 문득 의지를 품었다. * * * 그리핀 기사학교에 열차 사건이 보고되었고 입학식이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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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견습 기사들로선 열차가 한 번 뒹군 정도로는 큰 부상을 입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었다. 사건에 휘말렸던 생도들은 저마다 의무실에서 검사를 받았다. 난 이상 없음 판정을 받은 후 기숙사에 도착했다. “오, 미친….” 아담한 개인실이었으나, 내겐 무척이나 깔끔하고 호화롭게 보였다. 풀썩, 침대에 누웠다.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난 뒤로 이토록 푹신푹신한 침대는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캬아, 눈물 날 것 같다….’ 돈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마구간 짚더미에서 자던 때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 성공했다! 기사학교에 왔다고! 이제 견습 기사라고!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할 때는 아닌가. ‘이제 어쩐다….’ 소드마스터 상태였을 때 단번에 머릿속이 교통 정리된 까닭일까. 어느새 혼란은 잦아들고 차분히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하드 난이도, 3회차 스토리. 주인공에게 신나게 무력감과 절망감을 선사하는 그 빌어먹을 피폐 스토리는 영차영차 세계의 파멸로 나아간다. 노멀 엔딩조차 주인공이 체념하고 아포칼립스에 순응해 거기서 슬로우 라이프를 보내는 식이거나, 과거로 회귀하며 ‘우리의 모험은 지금부터다!’ 식이다. 배드 엔딩도 뭐, 말할 것도 없이 세계가 박살 나는 거고. ‘거기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결국, 트루 엔딩을 달성하는 수밖에. 주인공 일행이 세계를 지켜내고, 주인공이 무사히 기사학교를 졸업하는 트루 엔딩.고인물 플레이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배드 엔딩 트리거를 막다 보면 트루 엔딩에 도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내가 주인공을 지원해줘야겠지.’ 내겐 특정 조건에서 소드마스터가 되는 능력도 있고, 내가 생각했던 빌드대로 상황이 흘러가기도 했잖은가. 마족을 해치웠을 때의 손맛이 떠오르며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 해볼 만하다. 마, 주인공! 내가 도와줄게, 짜샤. 나만 믿어! …… “17번 생도, 론 헤이즐리! 그렇게 느려서야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가 될 수 있겠나!?”“헉, 허억! 허억!”“더 빨리 뛰어라! 그 속도면 퇴학은 확정이다!” 동기들과 함께 빠른 속력으로 장거리 구보를 하며 생각했다. ‘으아악…! 죽겠다아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