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 토벌 (1)
선제 토벌 (1)
검술 교육 시간.주역들이 현란한 솜씨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론의 인생을 살아온 나로선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습득력과 대단한 무위를 지녔는지 절로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1장 2막은 주역들끼리 엮이면서 평범하게 끝났을 테고…. 이제 곧 1장 3막이겠네.’ 1장 3막, 게이트 브레이크. 일정 시간 동안 공략되지 않은 게이트 던전은 붕괴하고, 일대를 침식하여 던전화하며, 던전의 몬스터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세상과 던전 사이의 경계인 게이트가 붕괴했다고 하여, 이를 게이트 브레이크 현상이라고 부른다. <엘리제를 위하여>에선 외진 곳에 미발견된 채 방치 중이던 위험한 게이트 던전이 있었다. 그게 브레이크되어 마물들을 내보내기 시작하고. 마침 한창 실습 테스트를 진행 중이던 생도들은 던전의 마물들과 생존을 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안 되지.’ 1, 2회차에선 생도들이 전원 무사히 생존하지만, 3회차 하드 난이도에선 몇몇 생도가 죽는다. 수틀리면 주역들의 목숨이 날아가거나 주인공의 피폐 루트가 시작되고, 배드 엔딩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게다가, 사람들이 죽을 걸 뻔히 알고도 가만히 지켜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선수 친다.’ 던전이라면 내가 휩쓸어 버릴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기사학교에 게이트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패스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설명하기도 곤란하고, 기사학교엔 적 세력이 굵직한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굳이 의심 살 만한 행동을 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닐 터였다. 게다가 그 게이트 던전에서 건져가고 싶은 것도 있었다. 게임에선 얻어낼 방법이 없어 아쉬웠던 무기였다. 그러니 혼자 가는 편이 낫겠지. “17번 생도.” 그때, 교관이 내게 다가왔다.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제길.’ 훈련 중에 딴 생각한 게 티 났나? 얼차려를 시키진 않겠지? “17번 생도, 론 헤이즐리!” 난 즉시 관등성명했다. 교관은 날 빤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그새 체력과 마력이 늘어난 것 같군? 고작 2주차인데도 말이야! 그만큼 단련한 건가!?” ‘아, 그쪽이었구나.’ 안심했다. 난 적당히 대답했다. “교관님께서 정진하시라 하여 죽을힘을 다해 정진했습니다!”“……!” 교관의 두 눈이 커졌다. “이유가 뭐지!?”“교관님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생도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교관은 내게 휙 가까워졌다. “이런 젠장! 아주 훌륭하다, 17번 생도 론 헤이즐리! 벌써 기사학교의 본질을 깨우치다니, 굉장히 천재적인 지능이구나!!”“감사합니다!!”“하지만, 아직 멀었다! 벌써 그렇게 빌빌거려서야 쓰겠나! 다음 테스트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점점 강도는 높아질 거다! 더욱 정진해서 살아남을 수 있겠나!?”“악!!”“좋다!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해주었으니, 네 녀석에겐 특혜를 내려주도록 하지! 자세를 잡아라!”“악?”“직접 몸으로 느껴봐야 금방 숙달할 수 있을 거다!”특혜 맞지…? 괴롭히려는 거 아니지…? 난 다급히 양손으로 가검을 꼬나쥐고 검세를 취했다. “전원, 동작 그만! 이쪽을 봐라! 본 교관이 재차 시범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생도들이 훈련을 멈추고 나와 교관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교관은 가검을 한 손으로 쥔 채 평소의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미동조차 없고,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엄숙한 위압감이 내 전신을 짓누른다. “제국의 유구한 기사 검법 중 하나, 광익검(光翼劍)의 동작을 하나하나 천천히 보여주도록 하마! 눈 크게 뜨고 막아봐라, 론 헤이즐리!”“예!”교관은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며 검술 동작 시범을 자세히 내보였다. 그럴 때마다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 검술은 이렇게, 저렇게, 이러쿵저러쿵. 난 적당히 맞춰주었다. “자, 속도를 높이지!”“예!?” 차츰 검격이 빨라지고. 캉! 캉! 가검끼리 부딪치며 요란한 충격음을 일으켰다. 당연히 일부 공격은 못 막았다. 난 뭉툭한 검날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아으, 더럽게 아프네. “자, 이제 아무 때나 반격해봐라!”“예!”교관의 지시대로 검을 휘둘렀다. ‘오!’ 제대로 들어갔다. 틈새를 노린 내려 베기. 이제까지 내가 휘둘러본 검격 중 베스트였다. 성장한 덕분일까. …그 순간. 카앙! “!?” 교관의 검이 마력을 분출하며 비스듬히 내 검을 쳐냈다. 마치 물리 법칙이 이래야 한다고 강제하는 것처럼 내 검이 부드럽게 튕겨 나갔다. 검격을 위력적으로 내지르고자 무게를 실었던 까닭에, 내 몸은 붕 중심을 잃고 뒤로 뒤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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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그와 동시에 교관의 검이 삽시간에 뻗어 나가 내 목 앞에서 멈췄다. 그만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쿵, 엉덩방아마저 찧었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가검임에도 순간 죽는 줄 알았다. “이것은 ‘개익(開翼)’! 광익검의 모든 검술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다리이자, 광익검 최고의 반격기다! 네 녀석들한텐 아직 난도 높은 기술이지! 하나, 광익검의 묘리를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생도들의 눈빛에 날이 섰다. 다들 의욕이 넘쳐 보였다. 교관은 큭큭 웃었다. “17번 생도! 느낌은 왔나!?” 왔을 리가요…. 다만. ‘당했을 때 어떤 느낌인진 알 것 같네.’ 상대가 무게 중심을 실어 강한 공격을 내지를 때 써야 효과적인 기술이라는 건 알겠다. 방금 당해봤으니까. 어째 설렘이 몰려왔다. 싸구려 검술 교습소에서 용병 출신의 사범한테 잡다한 검술밖에 못 배워본 나다. 기사학교에 와서 체계적인 기사 검술을 체험하고 익히는 건, 지식과 기술에 목말라 있던 내겐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17번 생도!” 교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꽂혔다. 빠악! 가검의 면이 내 정수리를 후려쳤다. 윽, 아프다! “끄윽! 17번 생도, 론 헤이즐리!” 즉시 관등성명이 튀어나왔다. 교관이 호통쳤다. “언제까지 느긋하게 앉아 있을 셈이냐! 난 쉬라고 한 적 없다! 어서 일어나 검을 휘둘러라!”“악!!” 방금 한 말은 취소다. 이 빌어먹을 기사학교. 더럽게 힘들다, 진짜…. …… 휴일. 난 기사학교를 나섰다. 멜시스 비석은 기사학교로부터 1시간 거리인 홀튼 산맥에 위치해 있었다. 그 비석을 찾아갔다. 유명한 비석인지라 위치는 잘 알려져 있었다. 게임 맵과 실제 지형은 규모가 천지 차이였다. 하여 가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주변 지형의 특징은 게임과 같았기에 어렵지 않게 멜시스 비석을 찾아냈다. 비석엔 옛 시대의 언어가 새겨져 있었는데, 어느 마법 기사의 업적을 기리는 글귀였다. 음, 못 읽겠다. 읽을 필요도 없지만.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된다 했었지?’ <엘위> 스토리를 떠올리며 한동안 발을 옮긴 끝에 낯익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굴 내부. 어두운 마력이 깔린 채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동굴 속 작은 박쥐 마물들이 힘을 합쳐 일으키는 마력 현상, 어둠 장막이었다. 무리의 서식지를 감추고, 동굴 안의 마력이 외부에서 감지되는 걸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들의 생존 전략인 셈이었다. <엘위>에선 이 어둠 장막 때문에 게이트를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혹시 몰라 검을 넣어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검이 장막 너머로 넘어갔다. 이후엔 몸을 옮겼다. 역시나,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파드드득! “오, 씨.” 어둠 장막을 통과하자마자 작은 박쥐 마물들이 요란하게 날아다녔다. 어우, 깜짝이야. 작은 동물이나 벌레라면 모를까, 나 같은 사람을 공격하는 녀석들은 아니니 무시하기로 했다. 휘이이. ‘찾았다.’ 이윽고, 스산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떠 있는 타원형 게이트를 발견했다. 1장 3막에서 붕괴되어 마물들을 쏟아내는 그 게이트일 터. 망설임 없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습한 바람이 피부에 맞닿았다. 신비로운 늪지대가 시야를 채웠다. 사방엔 특이한 식물들이 가득했다. 하늘엔 푸른 기운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자연의 마력이었다.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파아아! 입구 게이트가 한 점으로 모이며 사라졌다. ‘찾아볼까.’ 3회차 하드 난이도 스토리엔 위험한 놈이 하나 있었다. 지금쯤 이 던전에 은거 중일 터. 그놈이 3회차 스토리에만 나오는 변수이자, 1장 3막에서 여러 생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흉이었다. 심지어 그 스토리에서 놈을 해치우지도 못한다. 놈은 물러나고 적 세력에 합류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해치우는 게 맞아.’ 스릉. 허리춤에 패용된 검을 뽑았다. 자, 그럼. [고유능력 「소드마스터의 영혼」을 발동합니다!] 스으으![상태]- 위계 : (7)- 육체 : A- 마력 : A- 경지 : (소드마스터) ‘오우.’ 온몸에 미친 듯이 활력이 샘솟았다. 마력이 격렬히 부풀어 오르고, 마력 회로를 타고 쌩쌩 회전했다. 전신에 무거운 족쇄를 차고 다니다 갑자기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하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혹은 쪼렙 장비만 전전하다 갑자기 종결급 장비들을 착용하게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띠링.동시에 패시브 스킬들까지 종합 세트로 떠올랐다. [감각 증폭(A)] ─ 사소한 기척, 사소한 마력 하나 놓치지 않는다.[마력 폭화(S)] ─ 바다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 출력을 극적으로 증폭시킨다.[철혼(S)] ─ 정신 조작 계열, 저주 계열의 마법 및 권능 등 내면을 표적으로 삼는 공격으로부터 면역이며, 단단한 철처럼 감정이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만독불침(A)] ─ 독에 당하지 않는다.[만검일체(S)] ─ 어떠한 검이든, 몇 자루의 검이든 수족처럼 다룬다. ‘캬.’ 아주 든든했다. 휘이이. 느닷없이 뇌리를 타고 바람이 불어왔다. 감각은 날카롭게 곤두섰고, 신경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이내. 푸슈욱!! 가까운 늪에서 아나콘다처럼 길쭉하고 굵직한 하얀색 무언가가 쏘아졌다. ‘늪지뱀이네.’ 마물, 늪지뱀. 놈은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하게 차 있는 둥그런 아가리를 쩍 벌렸다. 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검술 훈련 시간에 교관이 보였던 광익검의 시범을 떠올렸다. ‘이 상태라면….’ 확신이 들었다. 광익검의 묘리를 내 손으로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휘두른다. 서걱. 유려하게 내리그어지는 칼날. 늪지뱀이 종잇장처럼 양단되며 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푸욱! 이어 꿈틀대는 늪지뱀을 검극으로 내려찍어 확실히 사살했다. 역시 빠르다. 내 몸의 움직임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아.’ 검술의 감각 또한 손에 새겨졌다. 만족스러웠다. 이후, 이동했다. 기습해 오는 늪지뱀들이나 식인 식물들을 간단히 베어 나가면서. ‘여기 던전 탐사는 처음인데….’ 게임에선 뭘 어찌하든 이 던전을 탐사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표적을 찾아내는 방법은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차아아악!!“그, 으억….” 던전 보스를 찾아가 가뿐히 베어냈다. 바위로 부분 갑주를 덧씌운 거대한 악어 마물이었다. [던전 보스를 클리어했습니다.][출구 게이트 열쇠를 획득했습니다.][입장했던 게이트 주변 어느 곳에든 출구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화아아. 허공에 녹색 빛이 나타나 뭉치더니 열쇠의 형태로 변했다. 난 그것을 집었다. 여기서 내 생각이 적중한다면…. ‘이제 나오겠네.’ 스르르르르…. ‘그쪽이구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기(魔氣). 마족 오란켈이 방출했던 그 불쾌한 기운이 아주 또렷하게 느껴졌다. 보스가 토벌된 깊은 늪. 진한 진흙으로 뒤덮인 기괴한 생명체가 스멀스멀 늪 위로 솟아났다. 놈은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고요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키고 있었다. 퍼뜩. 그 생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수 개의 입이 쩍 벌려지고, 늪과는 대조되는 색감의 새하얗고도 고른 치아가 훤히 드러났다. 끄르르륵, 끄르르륵. 놈은 모든 치아를 박박 갈았다. 기이한 불협화음이 났다. [왜, 인간이, 왜, 여기에, 왜, 있는, 거지?] 분노한 듯 놈이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말이 띄엄띄엄 끊어졌다. [왜, 내 소중한, 애완동물이, 왜, 죽은, 거지?]놈이 흙으로 뒤덮인 몸을 일으켰다. ‘마족, 진흙검사 마슬로.’ 이곳의 던전 보스를 소중한 애완동물처럼 여기던 놈이었다. 게다가 이 던전에서 보스와 함께 지내고 있었지. 하여 보스를 처리하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장 3막을 비극으로 물들였어야 할 존재, 마족 마슬로. 놈의 손엔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아랑검이다.’ 게임에서 보았던 대로, 마족 오란켈이 사용했던 검과는 달리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검은 퀄리티가 훌륭했다. 아랑검(餓狼劍) 칼자크. 자유로이 세계를 누비던 방랑 기사, 소드마스터 실비아가 검들의 무덤에 남긴 이리의 검. 웬만한 명검들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강도와 경도를 자랑하고, 대량의 마력이 스며도 끄떡하지 않는다. 전승에 따르면, 방랑 기사 실비아는 저 검으로 강대한 몬스터들을 처단하고 다녔다던가. 그걸 마족 마슬로는 검들의 무덤에서 훔치고 제 검으로 써먹고 있었다. 난 오늘 마족 마슬로를 해치우고, 배드 엔딩을 막고. 저 검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쓰읍….”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