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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1)

최약 기사는 던전 한정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의뢰 (1)

저녁, 야외 훈련장. 난 회갈색 머리의 바바리안, 투락의 검격을 막고 넘어졌다. 투락은 내 검술 훈련을 돕고 있었다. ‘힘 진짜 더럽게 세네…!’ 저게 힘 조절을 한 것이라니. 놀랍다. “이번엔 실패군.”“으, 그러게….” 토벌 테스트에서 광익검의 검술, 개익을 성공했고 그걸 연습해보고 싶다고 전했더니, 투락은 ‘대단한 건가…?’하고 의문을 드러냈다. 뭐가 어쨌든 육포 5조각을 건네주니…. ─ ‘전우의 훈련이라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 그것이 전사이기에.’ 투락은 그리 엄숙 근엄 진지하게 답하며 내 요청을 수락해줬다. 공격 방향을 미리 정해두고 반복한 결과, 현재까지 성공률은 5할 정도였다. 투락은 내 기술을 직접 경험하고는 놀라워했고 그 후로 진지하게 어울려주고 있었다. 스윽. 난 검을 다시 꽉 쥐고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자, 다시.”“알겠다.” 의욕이 불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확실해. 소드마스터 상태일 때의 감각이 지금의 나한테도 도움이 돼.’ 이번 일로 확신했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고인물의 어려운 컨트롤 플레이를 직접 내 손으로 경험해본 뒤 그걸 재현해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비록 숙련되지 못한 탓에 고수처럼 곧잘 해내진 못하더라도, 그의 컨트롤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던전에 가게 되면 소드마스터 상태로 여러 검술을 익혀보는 것도 좋겠지. ‘게이트가 흔하다면 말이지….’ 아쉽게도 게이트 발생은 흔한 현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지 알 수도 없고, 발생했다고 해도 내가 알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결국, 여기뿐이야.’ <엘위> 스토리에선 돌발적인 게이트가 많이 나왔고, 난 그 정보들을 꿰차고 있었다. 즉, 스토리 무대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길이기도 한 셈이었다. “육포…, 아니, 전우여.”“왜?” 대뜸 투락은 내 뒤쪽으로 턱짓했다. 난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자홍색 반묶음 머리칼을 찰랑이며, 작은 체구의 친구와 함께 걷는 여자 생도가 눈에 비쳤다. 엘리제 로렌디아. <엘리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이었다.“방금 저 녀석이 널 지켜보고 갔다.”“?” 엘리제가?난 눈을 반개하고 투락 쪽을 돌아보았다.“그럴 리가…. 수석이 날 왜 보는데?”“진짜다.”“그냥 지나가다 잠깐 눈에 띈 거겠지.”“지나치듯 본 거라면 나도 굳이 이런 얘길 꺼내지 않았을 거다.”“…진짜야?” 고개를 끄덕이는 투락. 투락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 없고 그의 눈이라면 믿을 만했다. ‘당연히 엘리제가 날 남자로 보는 건 아닐 테고.’ 인연을 쌓은 적이 없지 않은가.내 얼굴을 보고 이성적인 호감을 품었을 가능성 또한 0%에 가까웠다. 지금의 엘리제는 연애에 조금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이성으로 좋아했던 잘난 남자 주역들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스토리 끝까지 구애에 실패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자길 뒤에서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란 단서도 아직 못 얻었을 텐데? 그럼 아마도…. ‘그렇게 토벌 테스트 때 봤던 게 신경 쓰이나?’ 토벌 테스트를 마친 뒤 엘리제가 날 의문스럽게 쳐다봤던 게 떠올랐다. 그럴 법도 했다. 내가 꼴찌 생도 치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일단 주의해두기로 할까.’ 지금은 엘리제를 두고 상념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난 다시 단련에 매진했다.  ……  “아으, 죽겠네….” 바바리안 투락의 도움을 받으며 훈련을 마친 뒤 기숙사에 돌아왔다. 분명 도와달라는 부탁은 내가 했는데, 어째 투락은 의욕이 붙었는지 “투혼을 불태워라, 전우여!”하고 날 연신 채근하며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 탓에 삭신이 쑤시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침대에 도착해 대(大)자로 뻗었다. 팔이 안 움직이네…. 가만히 숨쉬기 운동을 하고 있자니 다음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 1장 4막인가. 그건 패스.’ 다음 <엘리제를 위하여> 3회차 스토리, 1장 4막은 주인공이 다른 주역과 엮이는 일상 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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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그다음인 1장 5막. ‘마물들의 거대화.’ 마물들이 어느 마족의 권능으로 인해 급격히 강해짐과 동시에 거대화되고, 주변에 큰 피해를 끼친다. 당시 주인공과 그녀의 친구들이 함께 의뢰를 수행 중이었고, 나름 기사랍시고 거대화된 마물들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1, 2회차에선 아무도 안 죽었지만, 3회차에선 주인공의 단짝 친구인 라라 트위슬로프가 사람들을 지키다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되면 주인공의 정신 상태가 ‘우울’에 접어들게 되고, 차후 라라가 활약할 수 있었던 스토리의 난도가 급증하며, 배드 엔딩의 위험성이 커지고 만다. 1장 5막이 시작되면 내 힘으로 라라를 지켜낼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면? ‘1장 4막 때 미리 마물들을 처리하면 돼.’ 그리되면 <엘위>에선 1장 5막의 내용이 게이트 던전에서 마족과 조우하는 것으로 바뀌는 대신, 라라가 죽지 않는다. 어이없을 정도로 쉬운 해결 방법이었지만, 공략 정보를 모르거나 콘텐츠 하나하나 세세하게 살펴본 게 아니라면 알아내기 어려운 방법이기도 했다. 단, 여유는 부릴 수 없었다. 1장 4막을 넘기면 거대화 예정인 마물들이 자취를 감추어 사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니까. ‘해보자.’ 다음 계획을 수행하고자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자마자. “아이고오오….” 임종을 앞둔 노인 뺨치는 수준의 곡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며, 다시 침대에 몸이 눕혀졌다. 그래, 내일부터 하자. 오늘은 너무 무리했어….  ……  기사학교는 생도들에게 임무를 수행할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군사력을 동원하기엔 대체로 규모가 작지만, 견습 기사들이 실전 경험을 쌓기엔 적절한 일들. ‘그 임무들이 모이는 곳이 여기.’ 기사학교 의뢰소. 대충 모험가 길드와 비슷한 구조라고 보면 되겠다. 기사학교의 드높은 위상답게 의뢰소 건물도 준수한 외관을 자랑했다. 난 의뢰소에 들어섰다. 말끔한 내부. 여러 생도들이 보였다. 저마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학년을 상징하는 브로치가 각 생도들의 옷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은색이나 금색이 많았다. 2, 3학년 선배들이었다. 간간이 1학년생도 보였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쳤으나, 딱히 친하지 않다 보니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곧바로 접수대로 향했다. 여성 행정 직원, 접수원이 그곳에 있었다. “1학년이네. 의뢰 수행하러 왔어?” 내 브로치는 1학년을 상징하는 동색이었다. 그걸 보고 내가 1학년생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예, 가능한가요?”“당연히 되지. 일단 등록부터 도와줄게.” 접수원 안내에 따라 계약서를 작성했다.“좋아, 확인. 지금부터 설명할게. 시작 등급은 E급이야. 당장은 E급 의뢰만 수행할 수 있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료할수록 등급을 높일 수 있고, 그만큼 더 어렵고 보상도 괜찮은 의뢰도 수행할 수 있게 될 거야.”“옙.”“어떤 의뢰를 수행할지는 게시판에서 골라봐. 아, 3명 이상 파티 짜는 게 원칙이니까 친구들도 데려오고. 다른 규칙들도 제대로 숙지해 놔.” 의뢰는 일주일에 하나만 수행 가능, 시험 기간이나 출정, 중요 훈련 기간엔 의뢰 수행 금지 같은 규칙 얘기인가. “옙, 명심하겠습니다!”“음~, 풋풋해.” 접수원은 귀여운 어린아이 보는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곧장 커다란 게시판으로 향했다. 많은 의뢰서가 게시판에 걸려 있었다. ‘주인공이 알아서 처리해주면 편하긴 할 텐데.’ 아쉽게도 주인공은 정석적인 스토리를 밟고 있는 듯했다. 만약 고인물 플레이를 진행 중이었다면 진작 여기에 나타났을 테니까. ‘오, 여기 있다.’ 의뢰서 하나를 집었다. [토벌 의뢰서]등급 : E대상 : 블루 슬라임위치 : 제팔 호수내용 : 최근 제팔 호숫가에서 블루 슬라임 무리가 출몰하고 있습니다. 방치할 경우 수질 오염 및 인명 피해 등이 우려됩니다. 해당 무리를 모두 토벌해주십시오.보상 : 한 마리당 5제니주의 : 슬라임 종족에겐 일반적인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마력을 담아 공격하시길 바랍니다. 블루 슬라임 토벌 의뢰. 한 마리당 5제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보수인 만큼 약한 축에 속하는 마물이었다. 나에게조차 만만할 지경이니 오죽할까. ‘근데 이놈들은 평범한 개체보다 강해.’ 마기를 품고 있어 능력치가 증폭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1장 5막에서도, 엘리제 일행을 노리던 마족은 제 권능으로 그 마기를 부풀려 마물들을 거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마족이 손을 쓰기 전에 이 블루 슬라임들을 해치워야만 했다. ‘문제는 누굴 데려가느냐는 건데….’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선택지가 달리 없었으니까.  ……  “벌써 의뢰를 수행하게 될 줄은 몰랐군.”짧은 회갈색 머리의 덩치 큰 사내, 바바리안 투락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제 몸체만큼 커다란 양손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고, 등 뒤론 길쭉한 칼 한 자루도 동여매고 있었다. “정말 육포 더 안 줘도 되지?”“이번 부탁까지 들어줄 정도의 할당량은 저번에 받았다. 한데 염치없이 더 요구하는 건 전사의 자세로서 적합하지 않다.”“더 준다면 받을 거야?”“…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전사의 자세로서 적합하지 않다.” 전사의 자세란 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았다.“저기이….”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진보라색 머리의 여자 생도, 사령술사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양손으로 스태프를 움켜쥔 채였고, 허리춤엔 검이 패용되어 있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내 쪽을 쳐다봤다가, 내리깔렸다가, 다시 내 쪽을 쳐다보길 반복했다. “정말, 저라도 괜찮으신 거죠…?”“‘저라도’는 뭐야…?” 바이올렛은 낯부끄럽다는 눈치였다. “뭔가, 저한테 괜히 선의를 베풀 수 있는 명분이라도 만드시려는 거라면, 그렇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흑마법사, 망상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건가? 내 의도가 그렇게 뒤틀려서 전달될 정도로 형편없었나? “내가 그렇게 부담을 줬던가…?”“아뇨아뇨아뇨아뇨아뇨!!” 바이올렛은 잔상이 보일 만큼 고개를 격렬히 가로저으며 부인했다. “그게…! 아마 주변에서 들으셨겠지만, 전 사실 흑마법사예요…! 그것도 시체 다루는 사령술사. 그래서어….” 바이올렛은 두려움과, 은근히 기대감이 동시에 차오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한테 반감, 안 느껴지시나 해서요….” 토벌 의뢰에 나서기 때문일까. 흑마법을 내게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영 께름칙한 눈치였다. 이 세계에서 흑마법사의 인식이 차츰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바이올렛이 감당해온 시선이었다. 전생으로 비유하자면,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인식이 안 좋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는 문제없지만, 껄끄러워하는 사람이 많은. 나야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바이올렛과 친분을 쌓기까지 한 마당이지 않은가. 그녀에게 안 좋은 시선을 보내기가 더 어려웠다. “…별생각 없는데? 오히려 멋있지 않나?”“……!” 하여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히 답하자,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난 바이올렛을 엄지로 가리키며 투락 쪽을 돌아보았다. “야, 투락. 얘가 흑마법사인 거 신경 쓰여?”“흑마법사든 뭐든, 전부 마법사의 한 갈래일 뿐이지 않나? 푸른 갈기 부족에 있어선 전부 똑같은 마법사 취급이다.”“그럼 다행이네.”“그리고 우리 부족한테 마법사란 전부 악질이다.”“그래, 음…. 아무튼, 편견은 없단 거지?” 이 자식, 마법사는 기피하면서 마법 기사는 왜 되려는 거야? 나와 투락이 말을 주고받고 있자니, 바이올렛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리고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바이올렛은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눈가에 조금 맺힌 눈물을 슬며시 훔쳤다. 난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이내. “에헤헤….”“……?”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바이올렛. 앞머리 탓에 눈가에 그늘이 졌다. 뭘까. 척추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괜찮은… 거겠지? 뭐, 바이올렛은 원래 웃는 게 저러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가볼까.’ 우리는 마저 채비를 갖추었다. ‘이번 일 해결하면 그 업적도 달성되겠지?’ 업적 ‘비극의 개변자’. 죽음이 확정된 주역의 운명을 뒤틀면 마력 경험치를 주는 업적이었다. 간만에 입안에 군침이 싹 돌았다. 나와 바바리안 투락, 흑마법사 바이올렛은 함께 마차를 타고 제팔 호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