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전 (1)
수성전 (1)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험상궂은 얼굴의 키 작은 중년 사내였다. 머리 위에 떠 있는 글자를 읽었다. [NPC - 경비대 일원] “차출된 병사요? 아니면 고용된 용병이오? 아무튼, 빨리 전선에 진입하시오! 오크들이 너무 많소!” 생생한 말투.감회가 썩 새로웠다. 그간 만났던 NPC라곤 싸늘하게 죽어버린 시신이나, 죽어가는 사람뿐이었으니까.이제야 멀쩡한 상태의 인간들을 마주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거대한 벽.그 벽 너머 앞에는 척 봐도 험악하게 생겨 먹은 오크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퀘스트형이라고 했지.’ 디펜스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상황.무언가 이 상황과 연결된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발사!”“쏴라!” 땀을 뻘뻘 흘리며 성벽 위에서 활을 쏘는 이들의 옆에 서니, 전황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성벽 위에서 화살을 비처럼 쏟아붓고 있는 병사들. 오십여 명의 병사가 동시에 화살을 퍼부었다. 쐐애애애애액! 날아간 화살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오크들의 머리통과 갑옷의 틈새에 화살들이 틀어박혔다. ‘여차하면 뚫리겠는데.’ 병사들의 분전에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쿵! 오크들이 들고 있는 거대한 공성 추가 연신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좀 던지란 말이야! 단체로 다 뒤지고 싶은 거냐!” 내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투창(投槍).투창용으로 보이는 단창(短槍)을 던지는 서른 명 정도의 병사들이 보였다. “제대로 던질 줄 안다고 해서 앉혀놨더니! 뭐 하는 거냐!” 나는 부하들을 다그치는 사내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NPC - 경비대장 베이크] 처음으로 이름이 붙어있네. “제가 하나 던지겠습니다.” 나는 단창 하나에 손을 뻗었다. “엉?” 베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베이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절대 넉넉하지 않은 개수요! 던진 적 없는 초짜라면 만용을 부리지 말고 내려놓으시오!” 무시했다.만용이면 어떤가, 던져 보는 거지. 물론, 아무런 생각이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원리는 비슷하다.내가 마운드 위에서 했던 일과. 가능성은 최대한 높인다. [집중 강화 Lv.2 - 스킬을 활성화합니다.] [마력 신체 강화 Lv.1 - 스킬을 활성화합니다.] 전신에 힘이 퍼지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양발을 땅에 고정한 채, 빈손인 왼팔로 던질 방향을 잡았다.목표는 오크의 어깨 아래에 있는 심장부.왼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궤적은 구장을 날아가던 공과 같았다. 뻐어억! 험악한 소리가 울렸다. 창이 정확히 오크의 상체 어깨 아래의 심장부를 꿰뚫었다.오크가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쿵. 비틀거리던 놈은 결국 쓰러졌다. “…초짜가 아니었구먼?”“진짜 수도 없이 던져 본 솜씬데?” 경비대장 베이크를 비롯한 주변 다섯 명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베이크가 직접 단창 하나를 꺼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계, 계속 던져주게.”“네.” 하나, 둘, 셋. 심호흡을 하고 던진 단창. 이번에는 오크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팔이 맹렬하게 떨리는 감각.나쁘지 않았다. 내 창을 맞고도 버틴 놈들은 병사들의 화살이 끝맺음을 해주었다.그렇게 두 마리의 오크를 더 죽인 직후.알림창이 시야를 가렸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3 → Lv.4] 오크 네 마리의 경험치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힘’ 수치가 5 상승합니다.][‘민첩’ 수치가 4 상승합니다.][‘체력’ 수치가 5 상승합니다.][‘마나’ 수치가 2 상승합니다.] 상태창을 열어 결과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레벨업이 이루어진 직후에도 두 마리를 더 잡았다. 그런데 네 마리는 창을 몸뚱이에 박힌 채로 버티고 움직였다.병사들은 그 부분에 대해선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오오! 대단한 솜씨야!”“나, 나도 가르쳐 주시게. 자네 용병인가?” 날 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다섯에서 열댓 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그런데 느껴지는 시야에는 인간의 눈빛이 아닌 것이 섞여 있었다. 성벽 아래.저 멀리서도 느껴지는 포악한 시선.누가 봐도 오크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었다.양옆에 있는 다른 오크들보다 2배는 더 커 보이는 덩치. 내가 동족의 숫자를 꽤 줄인 것에 화가 나기라도 한 건가. “죄송해요. 늦어버려서. 잘 버텨주셨네요.” 나타난 건 한 명의 여성이었다. 군청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오, 와주셨구려. 리셀린. 이 친구 덕분에 막 숨통이 트였던 참이오.” [NPC - ‘루케르나’ 용병단장 리셀린] 이름 창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 여자가 퀘스트의 중심이다.다른 이들은 그냥 검은색으로 이름만 뜨는 반면, 이 여성의 이름표에는 황금 테두리가 어스름하게 보였다. 리셀린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이네요. 베이크 대장께서 누군가를 쉽게 칭찬하는 분이 아니신데, 신기하네요.” 리셀린의 말에 베이크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빨리, 한 번 더 그 신묘한 솜씨를 보여주시게!” 너무 호들갑을 떠네.고개를 끄덕인 뒤, 단창을 집어 들고 던졌다. 리셀린의 두 눈이 내가 쏘아낸 창의 궤적을 쫓는 게 느껴졌다. 콰직─! 정확히 내가 노린 오크의 심장에 처박히는 것까지.리셀린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단하시네요.” 날 바라보는 리셀린의 두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나는 금안을 가진 리셀린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이렇게 수성으로 막는 건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몇몇은 내려가서 싸워야 물러날 것 같은데.” 리셀린의 대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옳은 말씀이세요. 그래서 지금 저희 용병단에서 전면전을 준비 중이에요.” 리셀린의 얼굴에는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 『퀘스트! - ‘루케르나 용병단장’ 리셀린을 따라 키클레브 성벽을 수호하십시오.』 역시나.리셀린이 2층 스테이지의 주연이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내 말에 리셀린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감사해요. 한 분이라도 더 도와주시면 저 괴물들을 몰아낼 가능성이 커지겠죠.” 과연 그럴까.나 하나 추가된다고 가능성이 늘어나기엔, 육안으로 보기에도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희가 아직 정비 중이라서요.”“알겠습니다.” 리셀린이 다시 고개를 한 차례 더 숙인 뒤,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플레이어 스테이터스>이름 : 한유성종족 : 인간Lv.4 힘 : 26민첩 : 25체력 : 24마나 : 12 스킬 : 통각 억제 Lv.3 평정심 Lv.2 엄폐 Lv.1 위기 감지 Lv.2시야 확장 Lv.1 집중 강화 Lv.2 투사의 움직임 Lv.1마력 신체 강화 Lv.1 레벨 4가 된 내 상태를 한 번 확인한 후, 초월자 갤러리를 열었다.글을 썼다. 제목 : 리셀린 용병단장이라고 아는 사람 있냐? 아니면 루케르나 용병단?작성자 : ㅇㅇ*-2층인데 퀘스트형이네. 수성전인 듯. 지금 만난 몬스터는 일단 오크임.아, 그리고 단창 던져서 오크들 좀 죽임. 단창 좋네? 오크 약점 같은 거 있나? 댓글은 늘 그렇듯이 순식간에 우르르 달렸다. └ ???? 루케르나?└ 루케르나 용병단 단장은 리셀린이란 애가 아니라 델리사인데?└ 절대군주) 맞다. 루케르나 용병단 단장은 델리사다. └ 절대군주) 혹시, 리셀린의 생김새가 어떻지?└ ㅇㅇ*) ㅇㅇ? 푸른 머리카락에 금안. └ 미친 설마…야, 그 리셀린이란 얘 사진 좀 찍어서 올려봐. └ 시궁창검성) 델리사가 그럴 리가 없잖아. 델리사가. 델리사가 그럴 리가 없잖아…. └ 창왕) 빨리 그 리셀린이란 아해의 사진을 찍어라. 그래, 단창은 투창용은 물론 전투용으로도 아주 쓸만하지. 근데 그건 그렇고 빨리 사진. └ 절대군주) 나를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시궁창검성) 나한테도 그랬다고. 같이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음에 보자고 했단 말이다. └ 아, 아, 씨발!!!!!! 야! 사진!!!!! 이 새끼들 상태가 왜 이래? └ 빛의검) 오크는 별 약점이 없다. 그냥 썰어서 죽여야 한다.└ 대마법사) 걔들은 그냥 조금 멍청한 게 약점이지. └ 빛의검) 굳이 약점을 꼽자면 다수의 몬스터가 그렇듯, 눈이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질문에 대한 멀쩡한 대답은 두 명뿐이었다.리셀린의 얼굴을 보는 걸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니 일단 사진을 찍어줘야겠다. 내가 다가가자 리셀린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어요?”“제 손에 뭐 들린 거 보이시나요?” 오른손에 갤러리 단말기를 쥐고 있었다.그런데 리셀린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뇨, 빈손 아니신가요?” 단말기가 안 보이는 거구나. “저 신경 쓰지 말고 준비하세요.”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자리를 옮겼다.초월자 갤러리를 다시 열었다. 제목 : 자, 리셀린 사진.작성자 : ㅇㅇ*-근데 님들 왜 이러는 거임?첨부 : 1000234523.jpg(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군청색 긴 머리카락의 소녀, 리셀린.) 이번에는 잠깐의 침묵 뒤에 댓글이 와르르 달렸다. └ …씨발.└ …와, 델리사, 날 버렸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친해진 NPC들이 없는데 애들 상태가 왜이러냨ㅋㅋㅋㅋ 개웃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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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군주) 군청색 머리카락, 금안…델리사의 딸이 맞구나.└ 속편이 나왔어요…참 좋아하던 이야기의 속편이 나왔는데요. 히로인을 NTR 당한 속편이에요. └ 저 친구한테 아버지가 누군지 좀 물어봐라. 빨리. └ 시궁창검성) 그래, 물어봐줘…아버지가 누군지.└ 절대군주) 나를 잊지 않겠다는 말은 거짓이었구나. └ 하, 시잇팔. 검성이형!!!!! 군주형!!!!!! 형들 인생이 그 모양 그 꼴인 줄 알어? 막 팍팍 도와주고 잘해주면 상대방이 기억해줄 서 같아? 그런 거 없어. 근데, 사실 나도 그 꼴이야…. └ 나처럼 감정을 안 가지고 상대를 했어야지 …흐흑. 흐흐흐흐흐흫 아, 기분 잡쳤네. 스크램블 오랜만에 멀쩡하게 성공해서 기분 좋은 상태였는데. └ 절대군주) 정확한 대사를 기억한다. 언젠가 다시 보면, 그때 꼭 다시 입맞춤하자고.└ 아재는 주접 좀 그만하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ㅇㅇ*)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형님들 탑등반 할 때 감정 교류한 캐릭터가 델리사고. 걔가 얘를 낳은 게 리셀린이란 거야? └ 절대군주) 그래…그 소리다. 루케르나는 가족 경영 용병단이라서 확실하다. └ ㅇㅇ*) 근데 군주형은 왕이면 아내도 있지 않음? 왜 그래.└ 절대군주) 다르다…현생의 서사와 탑의 서사는 의미가 달라. └ ㅇㅇ*) 아니, 그럼 그냥 이건 내 탑 서사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 왜 님들이 겪은 서사의 속편으로 만들어.└ 그게 인간이다. └ 엘프다) 나도 등반자랑 생각이 같은데. 왜 이러는 거지?└ 닥쳐 이년아! 망할 귀쟁이갘! └ 등반자야, 아버지 누군지나 빨리 물어보라고.└ ㅇㅇ*) 그건 나중에 물어봄. └ 창왕) 제발, 급하오. 급하긴.갑자기 아버지 성함을 왜 물어보냐.이놈들이 자기들 서사가 망가졌다고 내 서사까지 망치려고 드네. 갑주를 차려입은 리셀린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아재들이 계속 난리를 쳤지만 일단 초월자 갤러리를 종료시켰다. “준비가 끝났어요. 아, 이름도 아직 안 여쭤봤네요. 알려주실래요?” 알아먹을까 싶었지만, 굳이 다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이 엄혹한 세상. 이름이라도 제대로 불려야지. “유성입니다. 유성.” 리셀린은 환하게 웃었다. “반가워요. 유성! 이번 전투 끝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러죠.” 생각 외로 아주 잘 알아먹네.식사라,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까. “아, 이거 받으세요.” 리셀린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묵직한 감각이 왼손에 흘렀다. 그건 단창(短槍)이었다. [흑색 재블린]분류 - 무기 (단창)공격력 + 29사용 가능 레벨 : 3레벨 이상등급 : C+ “쓸만한 녀석이에요. 투창용으로도, 근접전 용으로도요. 방금 단창을 너무 잘 던지는 걸 봐서, 선물이에요.”“감사합니다.” 오호.보조 무기로 쓰면 딱이네.이놈은 어지간하면 근접전용으로 쓰기로 하고.방금 단창들을 던졌던 곳에서 몇 자루를 집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투창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난이도 판데모니엄.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곳.최대한 많은 무기를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가자.” 리셀린이 말에 표정이 굳어있는 용병 단원들이 뒤를 따랐다.나도 그 뒤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