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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급 엘프

초월자들이 집착하는 성지글을 작성해버렸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폐급 엘프

[제목: 내일 정령과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저 같은 폐급엘프도 선택받을 수 있는 정령이 있을까요?] [작성자: 폐급엘프] 분탕들의 어그로성 글 사이에서. 그 초라한 제목을 읽어 내린 순간이었다. "윽……!" 다시 한번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어젯밤 [칠흑의 검사]의 미래를 보았을 때처럼, 코끝으로 확 끼쳐오는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시야가 강제로 암전되더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시야가 망막 위에 덧씌워졌다. — 타닥, 탁. 어둡고 퀴퀴한 방 안. 거의 초췌해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단말기를 두드리고 있는 금발의 엘프가 보였다. 툭. 툭.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판석 위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의 궤적을 따라, 그녀가 겪어온 과거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숲의 일족, 엘프에게 있어 1년에 단 한 번 열리는 '정령 서약식'은 그냥 행사가 아니다. 정령과의 계약을 통해 비로소 엘프로서 온전한 1인분을 할 수 있다는 자격을 증명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 그런데 최근 몇 백 년 새(엘프에게는 이 단위가 최근인듯하다). 서약식의 트렌드가 변해버렸다. 정령이  신들의 신성력을 등에 업은 엘프들에게 더 잘 끌린다는 것. 대형 신당의 신들을 등에 업어야만, 더 높은 등급의 정령을 쉽게 선택하고 계약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폐급엘프는 그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정령과의 교감은 신의 힘을 빌려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첫 번째 서약식. 금발의 엘프는 반짝이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단상에 섰다. 그러나 신의 축복을 화려하게 두른 동기들이 빛나는 정령들과 수월하게 계약을 맺을 때, 그녀의 앞에는 어떤 정령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꽤나 유쾌하고 밝은 성격이었던 모양이라. — "우와! 너 빛의 정령이랑 계약했어? 진짜 축하해! 걱정안해줘도 돼!난 다음엔 꼭 되겠지 뭐!" 실패에도 꿋꿋하게 동료들을 안아주는 그녀. 두 번째 서약식. 결과는 또 실패. 스스로를 위로하던 씩씩한 미소가 조금은 가라앉아 있었다. 세 번째. 다시 실패. 그녀는 힘없이 동료들의 계약을 환영해 주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4년, 5년,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어깨는 무겁게 짓눌렸고, 표정에서는 점차 빛이 사라져갔다. 결국 여덟 번째 서약식. 동료들을 향한 환영 인사조차 겨우겨우 쥐어짜 내듯 마친 그녀는, 집에 미처 다다르기도 전에 인적 없는 길목에 주저앉고 말았다. — "왜…… 왜 나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리던 그녀. 하지만 이내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아내며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다. — "그, 그래도 힘내자. 엘프는 수명이 기니까, 아직 기회는 많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찰나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동족 엘프들의 기척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는 엘프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령 서약을 맺어 기쁜 걸까, 부러워하려던 그녀의 귓가에 비수가 꽂혔다. — "야, 아까 걔 봤어? 또 실패했더라." — "아, 그 폐급엘프? 남들 다 신성력 버프 받고 편하게 계약하는데, 지 혼자 고상한 척하다가 8번 연속 실패라니. 숲의 수치 아니냐? 부끄러워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닌대?" — "그래도 축하한다고 웃는데, 웃음 구겨진 거 봤어?" — "진짜 징그럽더라니까. 눈치도 없지." 그들은 8번이나 실패한 그녀를 '폐급엘프'라 부르며 비웃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힘든 와중에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던 동료들마저도. — "……." 수풀 뒤에 웅크린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우는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어진 9번째 서약식. 당연하다는 듯 정령의 선택을 받지 못한 폐급엘프는.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은 채, 바닥만 보며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1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10번째 서약식을 단 하루 앞둔 밤. 그녀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문장을 적어 내리고 있었다. — 저. — 내일 정령 계약, 할 수 있을까요. "……." 과거의 잔상에서 빠져나온 나는 덤덤하게 숨을 내쉬었다. 9번의 연속된 실패. 그럼에도 기어이 10번째 서약식에 서려는 저 미련한 고집과 참담함. 과거, 이세계로 떨어지기 전 서류와 면접에서 200번이나 갈려 나갔던 나로서는 그 막막한 심정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으며, 내일 있을 서약식의 풍경, 그녀의 미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시야 너머로 내일의 결과가 선명하게 맺혔다. 단말기 위로 손을 뻗어 댓글을 적어 내렸다. [무명의 신관] : 아니. [무명의 신관] : 넌 내일도 서약 못해.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폐급엘프] : 저…… 정말요? 저 이번에도 안 되면 진짜…… 더는 버틸 수가 없는데……. 활자 너머로 절망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무명의 신관] : 이대로라면 절대로 안 돼. 눈 앞에 맺힌 장면이 그랬으니까. ◆ 컴컴한 방 안. 반투명하게 시야 한켠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던 엘프는 멍하니 숨을 멈췄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무명의 신관의 댓글. 그 짧은 문장이,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녀의 등을 가차 없이 밀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갤러리에 잠복해 있던 분탕들의 댓글이 우후죽순 따라붙기 시작했다. ㄴㅋㅋㅋㅋ 역시 닉값하죠? 폐급엘프 ㅋㅋㅋ ㄴ와 무슨 정령 서약식을 9수를 하냐;; ㄴ사실상 마차 운전면허 9수랑 다를 거 없죠? ㄴ(유동): 마부 면허 무시 ㄴㄴㄴㄴ ㄴ이 정도면 엘프 중에서도 완전 네임드 아님? ㄴ얘 [세계수 갤러리]에서 호감 고닉이긴 함 ㅋㅋㅋ 끝까지 신성력 안 빌리고 계약하겠다고 꾸준글 올리다가 차단 먹었잖아 ㅋㅋㅋ ㄴ아냐 얘 꾸준글로 차단 먹은 게 아니라, 자기 팔목 그은 자해 사진 올려서 혐오 짤로 차단 먹은 거임 ㄴ멘헤라 엘프 ㅗㅜㅑ 미쳤네 ㄷㄷㄷ 쏟아지는조롱들. 창백하게 질린 손가락으로 키보드 위를 맴돌며 무언가 반박을 달려고 애쓰던 폐급엘프는, 이내 허공에서 힘없이 손을 툭 떨구었다. "그래……." 갈라진 목소리가 빈방을 채웠다. "난 폐급이 맞긴 해." 자신을 향한 비난은 익숙했다. 아니, 차라리 타당했다. 그래서 더 견딜 수 없었다. 누구보다. 기적을 일으켜 누군가의 목숨을 살렸다는 저 기이한 신관마저도 너무나 단호하게 확언했으니까. - "이대로라면, 넌 절대 계약할 수 없어." 듣지 않은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맴돌았다. 갤러리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던 폐급엘프의 뺨으로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나 같은 게 될 리가 없지. 고집부린다고, 10번이라고 다를 리가……." 그녀의 시선이 멍하니 벽에 걸린 달력으로 향했다. 내일 날짜. 붉은 펜으로 수십 번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간절함을 담아 별표까지 잔뜩 그려져 있던 그 칸. "……나가지 말아야겠다." 수백 쌍의 눈동자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느니. 그렇게 체념하며 창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띠링-! [무명의 신관] : 정신 차려. 번쩍이는 알림과 함께 다시 한번 단호한 댓글이 달렸다. [무명의 신관] : 이대로라면이라고 했지, 안 된다고는 안 했으니까. "……네?" 폐급엘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상대가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넋이 나간 듯 모니터를 향해 되물었다. 그런데 마치 그녀의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연이어 댓글이 올라왔다. [무명의 신관] : 내일 서약식. 상담글 연 채로 가. ◆ 다음 날 아침. 찬란한 아침 햇살이 세계수 아래의 식장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폐급엘프] : 저, 정말 저 오늘 가도 되는 거 맞죠……? "애가 아주 망가졌네." 아론이 가볍게 혀를 찼다. 자신이 아는 판타지 세계관 속 엘프란, 오만스러울 정도로 고상하고 자부심 넘치는 종족 이었는데. 대체 얼마나 고통받았으면. [무명의 신관] : 조용히 하고 움직이기나 해. [폐급엘프] : ……네. 겁먹은 강아지처럼 폐급엘프가 쭈뼛쭈뼛 서약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아론이 관리하는 [이름 없는 옛 사당 갤러리]는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어젯밤 분탕들의 댓글이 쏟아지자마자, 갤러리 전체에 락을 걸고, 자신과 폐급엘프 외에는 그 누구도 글과 댓글을 작성할 수 없도록 틀어막았다. '탭 분리가 되면 좋을텐데.' D급 신당부터는 탭을 분리할 수 있으니, 굳이 갤러리 전체에 유저들 글과 댓글을 막을 필요없었겠지만. 아직 F에 불과하다는 게 아쉬울 뿐. 그래도 중요한 건 이 예언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거니까. 덕분에 둘의 의사소통은 쾌적할 정도로 원활했다. 다만, 두 사람이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신당 통합 후기 갤러리] [실시간 베스트] 실시간 서약식 9수 엘프 중계글 [781] 수많은 유저들이  하꼬 갤러리의 화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외부 갤러리에서 중계판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ㄴ ㅇㅇ(유동): 살다 살다 무신앙 9수 엘프 정령 서약식을 글로 중계 보네 ㅋㅋㅋ ㄴ 모험가A: 와, 이거 지금 동시 접속자 수 미친 거 아님? 몇 명이나 쳐보고 있는 거냐 ㅋㅋㅋ ㄴ 마법학교휴학생: 주작 하꼬 신관이랑 정신병 폐급 엘프 조합을 어떻게 참음? 도파민 폭발이네. ㄴ 진실의눈: 아니, 그래서 지금 저 신관 새끼는 라이브로 미래를 예언하겠다고 입을 터는 거임? ㄴ ㅇㅇ(유동): 어제 뽀록 터진 거 믿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ㅋㅋㅋ 클래스가 다르다. ㄴ 세계수잎사귀: 오늘 서약식 참가하는 엘프들 꽤 있던데, 쟤네가 현장 교차 검증 중계해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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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른 아침이라 다른 자극적인 도파민 떡밥이 없었던 상황. 그 공백을 타고 '9수 폐급 엘프의 10번째 서약식'이라는 기괴한 이벤트는 단숨에 통합 검색 순위에 랭크인 될 정도로 핫한 화제거리가 되어 있었다. 현장의 서약식은 엄숙하고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눈부신 세계수의 가지 아래, 다른 신들의 축복을 받아 신성력을 뿜어내는 어린 엘프들이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 빛나는 정령들과 수월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 웅크려 있던 폐급엘프의 차례가 다가왔다. — "……다음." 장로가 떫은 표정으로 그녀를 호명했다. 동족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대놓고 혀를 차는 소리, 작게 키득거리는 비웃음이 식장을 메웠다. 그리고. "......." 역시나 단상에 선 그녀의 앞으로는 단 한 마리의 정령도 다가오지 않았다. 침묵만이 감돌았다. [폐급엘프] : 역시…… 안 되잖아요. 아무도 안 와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그녀의 글. [무명의 신관] : 진정해. 그리고 참고 서 있어. 아론은 흔들림 없이 지시를 내렸다. 그들을 지켜보는 후기 갤러리는 이미 폭동 수준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깐프수집가: 역시 그럼 그렇지 ㅋㅋㅋㅋ -빛의사도: 진정하고 참아라? 저게 무슨 예언임? 그냥 시간 끌기지 ㅋㅋㅋ 사기꾼 새끼 수준 ㅋㅋㅋ -ㅇㅇ(유동): 폐급엘프 능지 수준 실화냐? 저런 조잡한 사기에 당해서 저러고 서 있누 ㅋㅋㅋ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조롱의 시선. 현장에서도 장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내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무시당하고, 고립되고, 완벽하게 무너지기 직전의 폐급엘프.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단상에서 발을 떼려던 찰나였다. 서약식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 아론의 손가락이 단말기를 단호하게 내리쳤다. [무명의 신관] : 지금 당장 손들어. [무명의 신관] : 그리고 똑바로 말해. 갑작스러운 명령에 폐급엘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무명의 신관] : 정령이 오지 않는다면, 네가 직접 정령을 찾아가겠다고. [폐급엘프] : ……네?! 엘프가 당황하며 반문했다. 규칙상 엘프는 다가오는 정령의 간택을 받는 것이지, 정령을 지목하거나 찾아간다는 건 전례가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아론의 시야에는 똑똑히 보였다. 여러 신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틈새 속에서. 그 사이를 뚫고 폐급엘프를 바라보고 있는 작고, 찬란한 무언가가. 저 멀리.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거대한 세계수의 밑동, 그 굵은 나무뿌리 너머에서. 머리에는 앙증맞은 나무 뿔이 돋아나 있고, 잎사귀처럼 맑은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조그마한 정령 하나가. 세계수 뒤에 숨은채, 폐급엘프를 빼꼼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