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가의 천사
홍등가의 천사
'슬슬 전생의 감을 되찾아야 하는데.'퀴닌을 상단에 납품하기 시작한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그 동안 내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바로 의사로서의 감이 다 죽었다는 것.'역시 조금만 쉬어도 실력이 녹슬어 버리네.'이를 깨달은 건 퀴닌을 연구하면서였다.퀴닌을 만드는 것까진 좋았다.문제는 말라리아 환자에게 퀴닌을 정맥 투여하는 과정에서였다.'외과의사가 정맥을 한 번에 찾지 못하다니.'당시 임상 시험 환자의 정맥을 세 번 찔러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이는 꽤 심각한 사안이었다.아마 이대로 가만히 어린 시절을 보냈다간, 20살이 되면 손기술을 다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 사실을 실감한 나는 지금 당장 환자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물색했다.다행히 의사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의료봉사를 가면 되는 거잖아.'저기 저 아래, 슬럼가로 내려가면 의사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넘쳐날 것이다.결정했다면 행동은 빨랐다.곧바로 허락을 구하고자 대부님의 집무실을 찾았다."제가 이번에 퀴닌을 연구하면서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당분간 슬럼가에-""다녀오거라.""?""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호위는 붙여줄 테니, 맘껏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그런데 예상 외로 시원하게 허락이 떨어졌다.생각해보면 대부님이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옛날에는 집에 돌아가질 않는 불편한 조카 보는 시선이었는데.요즘에는 뭐랄까. 시선이 조금 따땃 미지근하다.기특함이랑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진달까.그리고 이제는 홍등가에 가는 것마저도 시원하게 허락해 주셨다.‘뭐지? 이 시대는 아이가 그런데 가는 거 신경 안 쓰는 건가?’그럴 리가.아무리 아동 인권 의식이 희박한 야만적인 전근대라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아이가 있는 방에서 담배를 뻑뻑 피울지언정, 10살 아이가 창녀촌 가는 것을 허락해 줄 정도로 막장인 시대는 아니다.그럼 왜 허락해 주셨는가가 관건인데…‘설마… 망나니물 도입부?!’이러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부모를 잃고 재능도 어중간한 귀족 도련님이 길을 엇나가는 건 흔한 일이니까.대부님도 내가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하시는 걸까.어디서부터 오해를 정정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냥 포기했다.어디 망나니물이 말로 해결이 되던가.다 압도적인 업적으로 세탁이 되는 식 아니던가.언젠가 어련히 해명되겠거니 생각하며, 그냥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그럼, 감 되찾으러 홍등가로 갑시다.***그날 이후로 나는 꾸준히 홍등가에 출근하기 시작했다.물론, 처음엔 홍등가 사람들도 처음에는 나를 의심하였다.- "의사? 아, 치유사 같은 건가. 치유사 선생이 이런 밑바닥에는 무슨 일이오?"의료 봉사란 개념이 없는 세상이라 그런가.난데 없이 찾아온 호의에 그곳 주민들은 의심부터 보내왔다.하지만 압도적인 결과로 증명하니, 그들도 점차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번에 저희 여동생을 살려줘서 감사합니다."여성의 사망 원인 1위가 출산 후 산욕열인 시대.위생만 조금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산모들의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그렇게 홍등가 개근 1년 차.어느새부턴가 그 거리 주민들은 아기를 낳을 때면 산파 대신 나를 찾기 시작했다.조금 과장 보태서, 작년에 홍등가에서 태어난 아이 중 절반은 내 손을 거쳐 갈 정도였다.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뭐지. 보통 주인공이면 이 정도 활약했으면 기연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슬럼 홍등가에서 1년.의사로서의 실력과 명성이 올라간 것 말고는 내 인생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빈민촌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직 대마법사나 암살자 길드 수장 같은 건 없었고,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나 산책 나온 마왕도 없었으며,미래의 검성이나 용사 꿈나무도 없었다.뭐야. 내 기연들 어디 갔어요.‘끄응. 아니면 고작 1년으로는 어림도 없나.’한 번 시작한 봉사, 이제 와서 안 가는 수도 없으니, 원.결국 얻은 것은 지식과 술기, 그리고 몇몇 임상 시험 데이터 정도였다.아, 그리고 약간의 명예, 그리고 칭호도 있다.‘창녀촌의 천사’라는 타이틀이라 어디 가서 밝히긴 좀 그렇다만.아, 생각해보니 아예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슬럼가 주민들이 내게 어엿한 진료소 하나를 내줬으니.내 이름으로 집이 하나 생긴 셈이다.“자, 그럼 오늘도 출근 해볼까요.”잡념은 여기까지.왕진 가방을 챙기고 오늘의 진료를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12월이라 날이 춥다. 아이용 외투를 걸치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그런데 오늘따라 놋쇠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차가웠다.평소와 다른 그 냉기에 벌써부터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휘오옹!그리고 문을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치자, 그 직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숨을 들이쉬니 콧속이 얼얼하게 마비되는 느낌이다. 겨우 눈을 뜨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별관 앞 정원수가 어디 있는지도 안 보인다. 당연히 담벼락 너머의 건물은 어떤 상태인지 보이지도 않고.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저 눈보라 속에 들어가면 사람 하나 순식간에 묻히겠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생각해 보니 슬슬 폭설 시즌이었다. 어제부터 밤새 눈이 심상치 않은 기세로 창문을 때리긴 했지.하얀 외관과 다르게 스모그를 머금어 더러울 눈보라를 보며 잠깐 견적을 짜보았다.보통 소설에서는 이때 환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꼭 이럴 때면 오늘내일하는 소녀가 어느 가정집에 있단 말이지.그럼 눈보라 뚫고 왕진하러 가는 의사 이벤트 각인가?음…‘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아무리 주인공이라도 해도 되는 모험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객기가 있기 마련.그리고 11살 꼬맹이가 저 눈보라 뚫고 나가는 건 객기다.더 구체적으로는 자살 행위라는 좋은 표현이 있다.‘환자 만나기 전에 내가 실종되겠어.’역시 이건 이벤트가 아닌 거 같다. 착각물 주인공은 무적 치트가 아니니, 오늘은 휴진이다.왕진 가방을 방에 돌려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그럼 오늘은 뭐 하지.’그렇게 침대에 뒹굴거리며 건설적인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집사장님이 방에 들이닥쳤다.“도련님!”어유. 깜짝아.내가 해피 타임 보내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들어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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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집사장을 맞이했다.어깨에 눈이 수북이 쌓인 걸 보니 본관에서 여기로 달려오신 모양.노크도 안 하신 걸 보면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무슨 일이신가요?”“아이가 나오고 있습니다!”“벌써 말입니까?”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최근 대부님과 대모님이 늦둥이를 보셨다.이미 딸도 있으시지만 아들 하나 정도는 더 갖고 싶다며 8년을 노력하신 결과였다.문제는 내 기억이 맞다면, 지금 늦둥이가 34주 차라는 것이다.원래대로라면 6주 뒤에 만나야 하는 아이란 말이다.“그 애는 뭐 이리 성질이 급합니까?”“지금 농담하실 때입니까! 빨리 와주십시오! 지금 산파가 눈 때문에 못 온다고 합니다!”“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예?!”“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가야죠.”어쩐지 폭설이 오더라니.이벤트가 우리 집에 있던 거구나.곧바로 왕진 가방을 챙기고 외투를 걸쳤다.눈보라가 몰아치긴 하지만, 담장 바깥이면 모를까, 별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건 문제없다.창녀촌 에이스가 활약할 시간이다.… 뭔가 어감이 이상하니 정정한다.창녀촌의 천사가 활약할 시간이다.… 뭘 붙여도 이상하네, 이거.*- 으으으… 아아아!관에 도착하니 복도 끝에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땀과 양수가 섞인, 분만실 특유의 눅눅한 공기. 홍등가에서 수십 번 맡아온 냄새였다.대모님이 침대 위에서 대부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부님은 그걸 다 받아주고 있었고.저러다 대부님 탈모 걸리시는 거 아닌가 몰라."리니에! 조금만 버텨라! 율리안이 오고 있다!""율리안? 그 아이가… 으아아!"누가 봐도 본격적인 산통이 시작된 모습.나는 곧바로 대부님의 허락을 받고 대모님을 내진하였다.‘자궁목 4cm 확장에 하강도 -2. 양수는 터지고 태아는 두위, 탯줄은… 안 만져진다. 아직은 괜찮네.’하녀들의 말을 들어보니 양수가 터진 시점으로부터 대략 10분밖에 안 지났다.‘아직까진 여유가 있단 말이군.’다행이다.한창 나오기 시작하는 상황이었으면 방을 소독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곧바로 집사장님과 대부님을 설득해 분만실 환경을 조성했다.적당히 깨끗한 방. 깨끗이 빤 타월. 손소독용 석회수.썩 훌륭한 분만실이 완성되었다.‘이 정도면 완벽해.’제왕절개라면 모를까, 자연분만은 이 정도만으로도 무균 상태라 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다.나오는 시기만 34주가 아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겠지.그로부터 몇 시간 뒤.대모님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미끄러져 나온 아기를 두 손으로 받아냈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다른 아기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어차피 힘주고 심호흡하고의 반복이라 뭐 특기할 사항도 없었고.다행인 점이라면 제왕절개를 시도할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제대로 된 마취 기술도 없는데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면 나라도 곤란했을 것이다.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본격적으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34주… 아이고야. 볼 것도 없이 미숙아네.’이거 살 수 있으려나.34주면 21세기 현대의학이면 충분히 생존 가능한 주수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힐이라는 기적은 무슨 상처든 치료할 수 있지만, 덜 여문 장기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시대의 미숙아는 신에게 기도나 올려야 하는 영역이다.‘뭐, 나는 다르지.’근데 그건 이 시대의 사정이고, 21세기에서 빙의한 주인공인 나는 예외다.34주? 살리고도 남지.‘이 정도면 어려운 케이스도 아니네.’기상천외한 케이스가 넘쳐나는 홍등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다.‘태변 착색 없음.’흡인은 필요하지 않겠고.일단 한 번 닦아주고 상태 확인.아기는 울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손가락으로 아기의 발바닥을 톡톡 두드렸다.발바닥 신경을 자극받은 아기가 ‘으…앙!’하는 작은 울음을 터뜨렸다.‘오케이. 숨 쉬는 거 확인.’다음으로 아기의 몸에 준비한 기름을 치덕치덕 발랐다.기름 냄새로 피 냄새를 가리고, 그 위를 깨끗한 양모로 감쌌다. 양모가 기름기를 머금어 약간 무거워진 느낌이었다.인큐베이터가 없으니, 대신해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대모님. 아기랑 맨살을 대고 계셔야 합니다. 계속 따뜻하게 해주셔야 해요. 아, 실례지만 안기 전에 가슴을 한 번 닦겠습니다.”마지막으로 아기를 안기기 전, 석회수에 적신 천으로 대모님의 가슴을 닦았다. 축축한 피부 위로 석회수 냄새가 올라왔다. 아마 피부에 안 좋으시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조산아의 생명과 미용을 등가교환할 순 없는 법이니.그렇게 어머니의 품이라는 훌륭한 인큐베이터가 완성되었다.이러는 것만으로도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다음으로 뒤에서 멀뚱멀뚱 쳐다보던 하녀들에게 말했다.“저는 약을 만들기 위해 별관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대모님 잘 부탁드립니다. 돌아왔는데 석회수로 손 안 씻고 간병하거나, 타월 더러운 채로 놔두면 제가 여기 뒤집을 겁니다.”왜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시간도 없고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으니.세균이니, 미아즈마니… 홍등가에서 죽어라 말해도 안 듣더라.그래서 그냥 권위로 찍어 누르기로 했다.선도하고 있으면 알아서 따라오겠거니 하며 말이다.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대모님과 아기의 상태를 점검했다. 대모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드리고, 양모 틈으로 아기의 가슴 움직임을 확인했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이제 약 가지러 별관으로 가볼까.’그때, 본관을 떠나려는 나를 집사장님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약이라뇨? 웬만한 약은 본관에도 있습니다!”그 말에, 나는 나가다 말고 출입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그럼 계면활성제도 있습니까?”“계면… 네?”“역시 있을 리가 없죠. 별관 다녀오겠습니다.”별관으로 서둘렀다.내 예상이 맞다면, 오늘 아니면 내일이 고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