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보면 기름칠도 해야지 (2)
사람이 살다보면 기름칠도 해야지 (2)
자고로 천재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는 법.‘프리드를 돌보면서 공부를 안 할 이유는 없으니까.’프리드가 태어나고 하루가 지났다.나는 아기와 산모가 쉬고 있는 방에서 책을 펼쳤다.전공의 시절에도 환자 보면서 공부했는데, 이쪽 세상이라고 못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그렇게 손가락으로 숫자들을 짚어가며 계산을 확인하던 중이었다.“율리안.”갑자기 침대에서 쉬고 계시던 대모님이 나를 부르셨다.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그쪽을 바라봤다.대모님은 프리드를 품에 안은 채, 아직 창백한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니.”“가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상단 세입 장부를 통해 복식부기의 허점을 파악하는 법을 복습하고 있습니다.”페이지를 한 장 넘기며 답했다.“그럼 오후에는 무슨 공부를 하려는 거니?”“으음… 아마도 연금학에 대해 복습하지 않을까 싶네요.”고개를 돌리자, 대모님과 눈을 마주쳤다.그녀는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고 계셨다.입술도 가늘게 다물어진 것이, 무언가 맘에 안 드는 듯하셨다.‘프리드에게 집중하지 않는 게 맘에 안 드시는 건가.’확실히, 보호자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불만이었다.어제 막 고비를 넘긴 아기가 있는 방에서 태연하게 공부나 하고 있으니.나는 배려가 부족했음을 반성하며 책을 덮었다.그때, 그녀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왜 엄마가 아니라 대모님이니.”“…”책을 가방에 집어넣던 손이 멈췄다.아, 그게 문제이셨던 건가.***리니에 대모님이 이상한 데에 꽂히셨다.“율리안.”“네, 대모님.”“…”어떻게든 내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나오게 하시려 한다.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니히리트 가문의 늦둥이, 프리드를 살려낸 바로 다음날부터 저러시는데 이유를 모를 리가.‘이분도 주인공을 저점 매수 하시려는 거구나.’10살 조금 넘은 아이가 웬만한 치유사들도 못하는 걸 뚝딱 해버리는데, 욕심이 안 날 리가.내가 한창 어릴 때 침 발라 놓으시려는 거겠지.늦둥이 살려준 은혜도 갚을 겸 말이다.‘천재라고 인정받은 건 기분이 좋은데… 그래도 난 내 성씨를 바꾸고 싶진 않단 말이지.’다만 문제가 있다.내가 빙의한 작품 제목이 <슈나벨의 수기>란 말이지. 대모님을 엄마라고 불러버리면 작품 제목이 바뀌어 버린단 말이다.물론 이건 농담이고. 진짜 이유는 그냥 부담스러워서다.우리가 서로 담쌓고 지낸 세월이 10년이다. 10년.고작 사건 하나로 그게 하루아침에 허물어지기엔 조금… 속이 낯간지러워 견디기 어려웠다.“내가 그렇게 싫은 거니?"대모님의 목소리가 힘이 없으셨다.나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아닙니다, 대모님.”“그럼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니.”확실히,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란 세월이 흐르긴 했지.생각해 보면 주인공인데 소인배처럼 마냥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그래서 타협했다.“어머… 님?”대모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쉬움과 안도가 섞인,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 정도면 되겠구나.”한숨 쉬듯 말씀하시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프리드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 듯했다.어딘가 안심하시는 것처럼.*‘그건 그렇고 어머니도 요양을 하셔야 하는데.’급한 불을 껐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그것은 바로 산후조리다.‘물론 이 시대에도 산후조리가 있긴 한데…’그게 현대인이 들으면 기겁할 방식이라 문제다.이 판타스틱한 다크 판타지 퓨전 펑크 세계는 출산을 마친 산모에게는 맥주나 와인을 권장한다.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여기 상식으로 주류는 물보다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음료로 취급된다. 그래서 코들(Coddle)이라는, 오트밀 죽에 에일이나 와인을 섞고 계란과 향신료를 넣은 산후 회복식이 존재한다.영양가 높은 술에 영양가 높은 계란과 맛있는 향신료를 섞으면 젖이 잘 돌 거라나 뭐라나.‘내가 그 꼴을 보고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홍등가에서 코들로 산후조리하는 걸 처음 봤을 때 심장이 철렁했다.산모에게 술을 먹이고, 방을 꽁꽁 닫아 환기도 안 시키고, 손도 안 씻고 만지고.그래놓고 산욕열이나 합병증으로 산모가 죽으면 운명이라고 하질 않나.… 되도록 이 세상 사람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 이런 걸 보면 꼭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단 말이지.‘이러니 항상 내가 직접 나서야지.’당연히 우리 리니에 어머니는 그런 걸로 요양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요양식을 마련해야지.‘메뉴는…’미역이랑 전복으로 해야겠다.딱히 내가 ‘한국 최고! 동양 최고!’ 같은 마인드의 소유자라서 이를 택한 것은 아니다.그냥 내가 한국 사람이라, 미역이랑 전복 말고 산모에게 좋은 음식이 뭔지 몰라서 이걸 택한 것이다.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그렇다고 다짜고짜 미역국이랑 전복 구이 드린다고 잘 드실 수 있을 것 같진 않고.’이 망해가는 세상에서도 미역 구하기는 쉽다. 단지 문화권이 문화권이라 식재료 취급을 못 받을 뿐.괜히 서양에서 바다 잡초(Sea weed)라 부른 게 아니라는 듯, 여기서도 바닷가 쪽 요새에서 먹을 게 없는 빈민들이나 어쩔 수 없이 먹는 해초 취급이었다.그나마 홍등가 산모들에게는 미역국 강요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냥 초록 포션이라고 말하며 억지로 먹이면 되었으니.하지만 남작가에서는 쓸 수 없는 방식이었다. 아마 식탁에 올리면 무슨 크툴루의 성찬 취급을 받으며 혼나지 않을까.‘그럼 어떻게 포장해야 하나.’잠깐 고민하다가 답을 떠올렸다.리소토.크림 베이스에 치즈를 듬뿍 넣고, 미역은 잘게 다져서 섞어 버리면 된다.전복도 얇게 슬라이스 해서 올리면 그럴듯한 고급 요리가 완성될 것이다.‘미역전복크림리소토. 이름만 들으면 꽤 그럴싸하네.’서민 식재료도 조리법만 바꾸면 귀족 입맛에 맞출 수 있다.괜히 프랑스 요리가 잡다한 부위를 가지고 온갖 폼을 잡는 게 아니란 말이다.생각해 보면 크림과 치즈는 산모에게 필요한 칼슘과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하니, 영양학적으로도 나쁘지 않다.덤으로 거부감이 느껴질 법한 초록색을 그나마 하얀색으로 덮을 수도 있고.‘결정.’나는 대모님이 눈을 붙이신 사이, 하녀장에게 자리를 맡기고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으로 가는 길.복도를 걷는데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은발에 푸른 눈이 인상적인 아이.나보다 한 살 아래의 꼬마 아가씨, 프레이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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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히리트 가문의 영애이자, 대부님과 어머니의 친딸.그러니까 뭐랄까.‘의남매? 수양 남매?’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매 비슷한 사이다.“… 오라버니.”프레이야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평소와 달리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울었구나.’어머니가 출산하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을까.이 시대엔 동생 낳으러 간 어머니가 영영 못 돌아오는 일이 흔하니 걱정할 만도 하지.게다가 태어난 동생이 밤새 위험하다는 소리까지 들었을 테니…그래서 반사적으로 그녀를 안심시켜 주려고 하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아, 우리 별로 안 친하지.’10년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지만, 그 10년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기억이 별로 없다.나는 늘 공부와 퀴닌 연구에 매달려 있었고, 프레이야는 프레이야대로 자기 생활이 있었다.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아니면 가족 모임 자리에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정도.우리의 거리감은 그 정도였다.‘근데 생각해 보니… 착각물 주인공이 여동생한테 쌀쌀맞게 굴면 안 되긴 한데.’성자라 불릴 캐릭터가 가족에게 냉담하다는 게 말이 되나.설령 지금까지 서먹했다 해도, 앞으로는 다정한 오라버니로 이미지를 잡아야 한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친해지기로 했다.‘신사답게. 다정하게.’나는 의식적으로 목소리 톤을 부드럽게 조절하고, 표정도 살짝 풀었다.21세기 병원에서 환자 보호자 대할 때 썼던 그 얼굴을 의식하며 말이다.참고로 내가 하루의 절반 이상을 마스크 쓰고 생활하는 외상외과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프레이야.”“…네.”“프리드 보러 가는 거야?”프레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어머니랑 프리드 둘 다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요?”“응. 내가 봤는데 당연하지.”자신만만하게 답했다.착각물 주인공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것이다.프레이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불안한 눈빛이었다.“오라버니,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도움?”“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확실히, 가족이 아픈데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답답하겠지.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안했다.“그럼 나 좀 도와줄래?”“정말요?”“지금 부엌에 가서 어머니….” 아직은 낯선 그 단어를 잠깐 혀에서 굴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어머니께서 드실 음식을 좀 만들려고 하거든. 네가 옆에서 거들어 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프레이야의 눈이 동그래졌다.“오라버니께서 요리를요?”선뜻 자신이 도울 일이 생겨서는 아니었다.내가 요리한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었다.'확실히, 귀족 자제가 식칼 잡는 게 흔한 광경은 아니긴 하지.'작은 창문과 빈약한 환기 시스템, 여기에 더해 청결이란 개념이 부족한 시대에서 부엌은 현대의 쿠킹 스튜디오와 거리가 멀다.쥐와 파리와 끝없이 부대껴야 하는 3D 직장에 가까운 공간이지.자연스럽게 부엌의 업무는 천한 일이 되기 마련.특히나 품위가 목숨 못지않게 중요한 귀족들에게 부엌은 금기시되는 공간이다.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완벽한 귀족인 주인공이 부엌을 드나드는 건 캐릭터 오류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 캐릭터상 요리라는 취미가 필요했다.‘천재형 주인공은 다재다능해야 하니까.'나도 이세계 다빈치가 되고 싶었다.화가이자 조각가이자 건축가이자 해부학자이자 발명가. 그런 천재 말이다.그게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식인의 이상형이었고, 이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문제는 나에게 예체능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요리로 타협했다.해보고 알게 된 건데, 나는 의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었다.수술대에서 내장 다루는 것과 도마에서 식재료를 다루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더라.‘천하단 소리 들을 건 아는데, 그런 건 나중에 품위로 덮으면 되는 거고.’내가 부엌에 드나드는 것이 천한 행위처럼 보일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품위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평민이 흙을 파면 노동이지만, 귀족이 파면 원예가 되는 법.압도적인 업적과 품격 앞에서 편견 따위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그렇기에, 나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놀랄 것 없어. 그냥 취미야.”“… 취미요?”프레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아직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다.뭐, 10살짜리한테 품격으로 편견을 압도한다는 개념을 설명해 봤자 알아듣겠나.이래서야 끝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화제를 돌렸다.“어쨌든. 프리드는 지금 자고 있고, 어머니도 쉬고 계셔. 지금 가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단다. 그러니 내 옆에서 도와달라는 거야.”“그럼 저는 뭘 하면…”“내가 요리하는 동안 시식평 좀 들려줘.”“…네?”프레이야가 눈을 깜빡였다.“어머니께 드릴 건데, 아무래도 입맛 확인은 해봐야 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먼저 맛보고 괜찮은지 알려줘.”그녀는 시식 담당이다.가문의 영애한테 부엌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게다가 실제로 필요한 역할이기도 하다.내 입맛이 워낙에 누렁이라, 이쪽 세계 귀족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제가… 먼저 먹어봐도 되는 거예요?”“당연하지. 아니면 누가 확인하겠어.”프레이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뭔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기분인 모양이다.“알겠어요.”프레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눈가는 빨갰지만, 아까보다는 표정이 나아 보였다.“그럼 가자.”나는 프레이야를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