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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합리화

당선됐더니 가족들이 후회한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3. 합리화

민태기는 아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지 누나 반만 닮아봐라, 그런 못돼먹은 소리가 입에서 나오나.   건방진 새끼. 싸가지없는 놈.     “멋대로 출마하더니, 이젠 염치도 없이 도와달라고 찾아와?” “다인 아빠.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민태기는 아내의 만류에도 울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현직 지방사무관이었다.   보직은 매산시청 시민협력과장.   처음부터 공무원이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가 젊었을 땐, 이름 있는 대학 나온 사람이 공무원 시험 응시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결혼하려고 현실과 타협해서 시험을 친 것뿐이었다.   그래도 누구한테 무시당할 만큼 허술하게 살아오진 않았는데.   “그런데 자식이란 새끼가 날 무시해?” “어휴, 다인 아빠. 진정해.”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놈.”     되돌아보면, 서준이는 어릴 때부터 사고관이 삐뚤어진 놈이었다.   매사에 불평만 해대던 녀석.   피드백을 수용하는 태도 자체가 틀려먹은 놈이라 부모로서 고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람구실이라도 시키고 싶어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가르쳤던 건데 설마 이딴 식으로 패륜을 저지를 줄이야.   뒤통수가 얼얼해진 민태기가 한숨만 내쉬고 있던 그때.     삐비빅. 띠리리~     “어머. 우리 다인이 왔나 봐요.” “으음.”     때마침 첫째가 왔다고 했다. 일부러 부른 거였다.   민다인.   방금 행패 부리고 떠난 둘째와는 여러모로 다른 딸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자라면서 말썽도 안 피웠다.   무엇보다 부모 가슴에 대못 박는 짓거리는 절대 안 하는 딸이었다.   다인이라면 분명히 부모 마음을 헤아려 주겠지?   민태기는 민서준이 얼마나 싸가지없이 굴었는지, 부모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털어놓고 싶었다.   “아빠, 무슨 일이야?” “앉아봐.” “피곤한데.” “잠깐이면 된다. 오늘 네 동생놈이 다녀갔어.” “아… 민서준.”     노곤함이 묻어 있는 얼굴로 자리에 앉는 딸.   안쓰럽지만, 동시에 뿌듯했다.   다인이는 대형로펌인 한율에 다니는 변호사였다.   최근에 라디오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나이 차도록 아직 사윗감은 안 데려왔지만, 그래도 누구와는 다르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다인아. 서준이 그 녀석 말이다. 어릴 때부터 너한테 묘한 열등감 느끼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지. 기억하냐?” “글쎄.” “동생이라고 감싸줄 필요 없다.” “…….” “옛날에 서준이가 너만 편애한다고 불평했던 것 때문에 그러냐? 헛소리야.”     민태기가 기대한 건 딸의 적극적인 맞장구였다.     맞아요, 걔가 좀 그렇지. 지가 뭐라고 헛바람 들어서 시장선거에 출마했대? 정신 차려야 돼, 민서준. 진짜.     대충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쏟아내는 불평을 잠자코 듣던 민다인의 반응은.     “편애? 서준이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 “다인아…?” “걔 중고등학교 때 학원 한 번 못 다녀봤잖아, 아빠.”   동조가 아니라 지적이었다. 학원을 안 보내줬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민태기가 보기에 그건 차별이 아니었다.   될 만한 녀석한테 지원을 몰아준 거였지.   평범한 중산층 집안이다 보니 아무래도 자원에 한계가 있었다.   서준이가 눈앞에 있는 다인이만큼 공부를 잘했다면 왜 안 밀어줬겠나.   빚을 내서라도 학원도 보내주고 과외도 시켜줬겠지!   돈낭비라서 그냥 안 보낸 것뿐인데… 아.   민태기의 얼굴에 문득 화색이 돌았다.   차별한 적이 없다는 근거가 떠오른 탓이었다. 바로 학벌이었다.      “다인아. 서준이는 애초에 공부머리가 없었어. 걔가 역량이 되는 녀석이면 한진대를 가진 않았을 거 아니냐. 내가 거길 특별히 비하하려는 건 아닌데, 솔직히 서울에 있는 대학교들이랑 비교하면 격차가 커.”     민서준한테 돈을 들여서 가르쳤어도 결실이 없었을 거라는 주장.   그런데 어째선지 딸의 반응이 어색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떠올리는 듯 눈을 굴리더니.     “다인 아빠. 오래된 일이라 잊었나봐? 서준이 장학금 받으려고 한진대 간 거잖아.” “뭐?” “엄마 말이 맞아, 아빠. 기억 안 나?” “어.”   민태기의 눈이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둘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어서였다.   한진대로 가면 반액장학금도 받을 수 있고, 기숙사도 들어갈 수 있으니 거기로 가겠다고 무표정하게 읊조리던 민서준의 얼굴.   ‘내가 돈 아끼라고 압박한 것도 아닌… 눈치는 줬나.’     민서준 입장에선 서운할 만도 했다.   고작 한살 차이나는 누나한테는 아낌없이 베풀면서 저한테만 박하게 군다고 여겼겠지.   하지만 그건 차별이 아니라, 아니, 차별이 맞긴 하지만.     “당시엔 옳은 선택이었다. 예외상태적인 결단이었지.” “예외상태…?” “서준이놈도 사실 뚜렷한 근거가 있어서 비뚤어진 게 아니야. 그냥 주관적으로 나는 피해자다, 가족들이 나만 미워한다고 스스로 세뇌한 거겠지. …자, 다인아. 대답해 봐라.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냐?” “그, 아니.”     역시 건성으로 대답하는 딸. 민태기는 헛기침을 하면서 딸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머리 딸리는 줄 알았던 아들의 대학입학에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진심으로 잊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반성할 생각도 없는 그였다.     “내가 완벽한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서준이놈을 섭섭하게 대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다. 그놈도 그렇게 해선 안 됐어.” “뭘?” “국선당으로 출마하겠다는 그게 말이 되냐?” “아, 그거.”     마침내 수긍하는 딸.   민태기도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갑자기 민서준의 역성을 들었을 때 속으로 흠칫했거든.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하지만 삐딱한 아들놈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가장인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내가 공무원으로서 쌓은 평판이 있다.” “…….” “그런데 내 아들이 국민의선택 후보로 출마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 대놓고 내색은 안 하더라도 뒤에서 수군거리겠지. 나까지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을 거다.”     아들놈을 용서할 수 없는 것도 그놈의 출마 때문이었다.   이유도 참 같잖았다.   생계를 위해서라니.   시장 후보로 출마하지 않으면 굶어죽기라도 한다는 걸까? 물론… 당의 요청을 거절하면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긴 하겠지.   지금 국선당의 재정이 힘든 만큼 당직자 구조조정 때 쓸려나갈 수도 있겠고.   “그렇다고 가족을 등지는 건 용서할 수 없다. 그게 내 신념이야.”     아들놈에 대한 이견은 허락하지 않겠노라는 선언.   와중에도 은근히 딸인 민다인의 눈치를 살피는 민태기였다.   솔직히 그도 알 수 없었다.   여윳돈을 몰빵해서 사교육을 시켜주고, 로스쿨 학비도 대고, 몇 년 동안 변호사시험 수험비용까지 지원해줬던 딸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가 뭔지.   굳이 고민해서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편이나 들어줬으면 싶었다.   다행히도 딸은, 민태기의 의견에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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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준이가 엄마아빠는 물론이고 나한테까지 민폐를 끼치긴 했어.” “그렇지?” “어차피 나도 계속 일하다 보면 다민주 쪽에서 입질 올 수도 있는데, 민서준 걔가 이번에 출마한 게 그때 족쇄가 될 수도 있잖아.” “맞다.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 거다, 그놈은.” “많이 짜증나긴 해.”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나. 실제로 민다인은 장차 여당의 스카우트를 기대…하는 인재였다.   진지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잖나. 스펙 좋고, 인물도 웬만큼 괜찮고, 시사라디오나 종편에 종종 얼굴 비추는 30대의 여성 변호사는 매우 높은 확률로 정치권에서 제안이 오기 마련이었다. 근거는 없지만 다음 총선 때 오퍼가 왔을지도.   “그런데 네 동생이 초를 쳤구나.” “그렇게 볼 여지가 있긴 해.” “내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다. 유감이구나.” 민서준이 가족의 공적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막내인 다정이는 자리를 비운 상태지만.   그 아이도 집에 있다면 기꺼이 동조했을 터였다. 부모말 잘 듣는 애라.     “그래. 잘못한 건 그놈이다.”     아들과 척진 상황.   속상해야 정상인데 어쩐지 민태기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잘못한 사람은 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근데, 다인 아빠? 난 좀 걱정되네.” “음?” “혹시 서준이가 덜컥 당선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우리만 손해야.”     아내의 뜬금없는 질문.   민태기도 웃고,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민다인도 헛웃음을 흘렸다.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걱정이었다.   민서준이 당선하는 건 선거 지형상 불가능했다.     “여기 매산시야.” “그렇긴 하지.” “게다가 정권 허니문 기간에 치르는 첫 번째 전국선거잖아. 국민의선택도 안 되는 선거인 걸 아니까 서준이 같은 녀석을 공천한 거 아니겠어? 어차피 지는 싸움에서 청년우대 명분이라도 찾겠다 이거지.”   매산시는 민주당계가 기본으로 50퍼센트를 깔고 가는 동네.   그리고 민서준의 상대가 될 다민주 후보는 지역기반 튼튼한 도의원 출신이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지지율도 높은 편이었다.   모든 조건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민서준이 이긴다?   세상에 100퍼센트란 건 없지만, 이번 매산시장 선거만큼은 예외였다.     “내가 알아. 서준이놈이 이길 수가 없는 선거야.”   엄청난 격차로 패배할 거라고, 민태기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잘됐지. 크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야, 그 녀석은.” “그럴 수도.”     선거가 끝난 뒤에야 자신이 잘못 선택했음을 깨닫고 후회할 터.   어쩌면 뒤늦게 집구석에 기어와서 잘못을 빌지도 몰랐다.   민태기는 빌빌거리면서 대가리를 박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괜히 주먹을 쥐었다.   …     며칠 뒤. 지방선거 공식선거운동일이 시작됐다.   빽빽하게 걸린 현수막, 고막을 때리는 시끄러운 선거송과 운동원들의 우렁찬 인사.   걸어서 시청으로 출근하던 민태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매산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하고 싶은 후보, 바꾸고 싶은 후보, 국민의선택 기호 2번 민서준, 출근길 인사 올립니다!”     도로 쪽에서 들려온, 아들 민서준의 목소리.   유세차 타고 돌아다니는 중인가?   민태기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웃었다. 진짜 우스워서 웃은 거였다.     “국민의선택 기호 2번 민서준입니다! 서울로, 동탄으로, 평택으로 출근하시는 시민 여러분, 발걸음마다 힘찬 기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목청이야 좋았다.   하지만 민서준이 타고 있는 차는 전광판조차 부착되지 않은, 초라한 1톤 트럭.   당에서 제대로 지원도 안 해주는 모양이었다.     ‘멍청한 놈.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민태기는 아들을 잠시 딱하게 쳐다보았다.   너무 한심해서, 이젠 괘씸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