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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토론

당선됐더니 가족들이 후회한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6. 토론

선거전에서 방송토론보다 중요한 이벤트는 없었다.   토론 좀 잘하면 표를 벌 수 있어서?   그렇진 않았다. 선관위 방송토론을 몇 명이나 본다고.   광역단체장 토론도 시청률이 별로인데 하물며 지역케이블로 송출되는 기초단체장 방송토론…   하지만 그런데도 중요했다.    ‘조지면 실시간으로 표가 깎여나가니까.’     이겨도 얻을 건 없는데, 망치면 어째선지 좆되는 이벤트.   출마자들은 대체로 토론을 부담스러워했다.   과태료를 감수하고 불참하는 후보가 많은 것도 그 탓이었다.   토론불참으로 인한 손실은 그나마 측정이 가능하지만…   토론에서 실시간으로 병크 터뜨렸을 때 발생하는 손실은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유리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방송토론에 출석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보다 지지율이 두 배나 높은 경쟁자는 결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 후보.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요즘 잠을 못 자나? 허허.”     나를 단단히 벼르고 온 눈치였다.   시민단체, 기자, 같은 당 국회의원까지 부추겨서 빌드업한 내 병역이슈를 터뜨리려는 거겠지?   나는 대답하는 대신 편성엽 후보를 잠깐 노려보다가. 애써 짜증을 참는 척하며 그를 타일렀다.     “편성엽 후보님? 뭘 하시려는 건진 알겠지만, 그만두시길 권합니다.” “지금 협박하나?” “공론화시켜봤자 서로 좋을 게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다민주 정권 대통령, 총리, 당대표가 전부 미필인데 굳이…” “토론에서 그렇게 말해봐요, 민 후보. 시청자들이 굉장히 공감해주겠네.” “…….” “잘해보자고.”     내 어깨를 툭 두들기면서 자기 자리로 가는 편성엽 후보.   곧이어 방송토론이 시작됐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매산시장 후보자 토론회 진행을 맡은 한진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임창남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 매산시의 향후 4년을 이끌어갈 적임자가 누구인지 검증하는 뜻깊은 시간입니다.”   사회자는 매산시의 유일한 종합대학인 한진대학교의 현직 교수.   나한텐 모교 교수였다. 저 양반한테 교양 한 과목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매산시장 후보자 토론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각 후보의 기조연설부터 듣겠습니다.”     방송토론 초반은… 비교적 무난하게 흘러갔다.   기조연설.   그리고 이어진 공통질문.   처음 받은 질문은 당연한 듯 반도체 어쩌구였다. “행정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경력과 인맥으로 하는 겁니다! 제가 경기도의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다함께민주당 국회의원들과 손잡고, 경기 남부 반도체 클러스터에 우리 매산시를 쏙 집어넣을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겠습니다!” “매산시에 필요한 건 중앙정치인들과 형님 아우 하며 술자리 갖는 인맥 정치가 아니라, 정부 평가 기준표 맞춤형 데이터 행정입니다.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15분 거리에 배후 R&D 단지를 조성해서…”     사실 별로 의미가 없는 주제였다.   어차피 답안이 대강 정해져 있으니까.    실무자가 써준 스크립트를 그냥 외우거나 읽으면 되는 수준.   다만 나는 편성엽과 달리 돈도 사람도 없어서 직접 준비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었다.   이후로도 한동안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잘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 공통질문 드리겠습니다.”     GTX-C 연장 사업.   구도심 정주 여건 개선.   어린이병원 설립 등등.   전부 중요한 사업들이긴 했다.   25만 매산시민의 생활이 걸린 일들이니까. 특히 교통은 치명적이었다.   아마 지금 토론을 시청하는 누군가는 나와 편성엽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을 경청하고, 또 평가하고 있을 터.   그런 사람들의 의견도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판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떡밥은 역시 따로 있었다.     마침내 다가온 상호토론.     “다음은, 공직 후보자의 도덕성 및 자질 검증 순서입니다. …최근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 그리고 SNS상에서 국민의선택 민서준 후보의 병역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는데요? 민 후보께서는 30대의 건강한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병역 판정에서 전시근로역을 받으셨고, 그 세부 사유를 '비공개'로 처리하셨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서 해명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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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의 말에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실은 내가 기여한 것도 있었다.   사회자의 입에서 ‘도덕성’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일부러 연기에 들어갔으니까.   하염없이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면서 심란함도 드러내고.     “사회자님? …제 병역 사항은 선관위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비공개 처리한 사안입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벽을 친다고 쟤들이 그냥 넘어갈 일은 없겠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나에 대한 압박이 시작됐다.     “어허, 민서준 후보! 멀쩡한 청년이 군대를 안 갔으면 왜 안 갔는지 떳떳하게 말하면 될 것 아닙니까?” “민서준 후보님? 다함께민주당 편성엽 후보의 지적대로, 공직 후보자의 병역은 국가관과 직결되는 가장 핵심적인 검증 요소입니다. 계속 비공개를 고수하신다면 시민들의 의혹이 더 커질 수도 있는데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들었죠? 대답하세요!”     너 군대 왜 안 갔냐, 면제사유를 밝혀라.   내가 대답을 않자 편성엽 측은 자기가 가져온 서류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이걸 보십쇼. 저기 민서준 후보의 사진입니다.”     작년에 내가 하프마라톤 완주하고 찍은 기념사진.   국민의선택 당원연수 때 족구경기 뛰는 사진 등등.   이렇듯 건강한 놈이 왜 군대를 안 갔냐고 긁는 거구나.   실제로 전시근로역 판정 기준이 상상 이상으로 빡세긴 했다.   중증 지적장애가 있거나 손발가락 다수 결손이 아니면 전시근로역으로 빠지기 힘든 엄혹한 시대…   내가 ‘지금은’ 건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저렇게 사진 흔드는 것도, 유치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내가 편성엽의 기대대로 편법을 써서 군대를 뺀 거라면 말이다.     “민서준 후보! 빨리 해명하세요. 빽으로 병역을 피한 겁니까, 아니면 어디 아픈 척 편법이라도 쓴 겁니까? 군대도 안 다녀온 부실한 청년이 대체 어떻게 매산시민의 안위를 책임지겠다는 겁니까?” “편법은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어떻게 공천을 받았을까요?” “허허! 국선당 공천심사를 믿으라는 겁니까?” “죄송한데 그쪽 당이 더.” “이거 보세요! 해명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민서준 후보잖습니까!”     이쯤이면 깔 타이밍이 온 것 같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혹시 부모님도 이 토론을 시청하고 있을까?   날 협박해서 간을 뺏고, 병상에 누워 있는 나한테 합법 군면제라고 염장을 질렀던 인간들…   지금도 그 속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예… 좋습니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진실을 밝혀드리죠.”     그래도 이 토론은 꼭 봐줬으면 싶었다.   내가 지금부터 할 짓을, 가족들이 싫어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꼭 봐라. 속으로 기원하면서 천천히 꺼내든 서류.     병무청 지정 병원에서 발행한 병무용 진단서였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간의 일부를 절제해서 가족에게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병역 판정관에 의해 적법하게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제 손에 들린 서류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편성엽 후보의 얼굴이 조금씩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그는 “증명도 안 된 진단서 쪼가리다.”라면서 서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할 정도의 병신은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쯤 뭐가 꼬였다는 생각은 들었겠지.   내가 면제사유를 굳이 비공개로 처리한 저의도 의심하고 있을 거고.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당시 제 동생은 급성간부전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민 후보, 잠깐.” “어머니가 골프 치는 동생을 위하겠답시고 녹차 추출물이랑 한약을 함께 먹인 탓이었습니다. 병원에 달려갔더니 애가 이미 간성혼수 직전이더군요. 전 영문도 모른 채 검사를 받고… 또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일단 목숨은… 예. 목숨은 살려야 했으니까요.”   여기까지 한 뒤,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귓가에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도권 토론 더 이어가시겠습니까, 이거 음모야, 진정하세요.   여기서 끝내면 기껏해야 본전이겠지만.   나한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제가 이 사실을 미리 밝히지 않은 건, 가족이 받을 상처가 너무 걱정돼서였습니다. 유권자 여러분께는 몹시 송구합니다.” “……?” “장기 떼어주고 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어봤지만, 그리고 선거에 나선 지금도 가족의 응원이나 도움은 일절 못 받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아픈 상처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습니다.”     딸한테 약 처먹이다가 죽일 뻔한 어머니의 흑역사를.   그리고 오빠한테 간 받아놓고 쌩까는 동생의 몰염치를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다는 해명.   여기서 마무리해도 나쁘진 않겠지.     그런데 사회자가 시키지도 않은 어시스트를 해줬다.      “민서준 후보의 해명에 대한 정확한 사실여부 판단은 토론회가 끝난 이후, 언론기관의 객관적인 팩트체크를 통해서 추후 검증할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편성엽 후보의 주도권 토론…”     고맙게도 사실확인이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해줬거든.   전형적인 마무리 멘트긴 한데, 나는 마무리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건 타이밍.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회자님! 지금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까?” “어… 민서준 후보?” “굳이 언론사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을까요?”     빨간색 선거복을 벗고, 셔츠 밑단의 단추를 풀었다.   뒤늦게 방송규정 어쩌구 떠들면서 나를 제지하는 사회자.   미안한데 토론에서 셔츠 좀 벗어도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제 가족이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봐, 간까지 바친 아들이 출마하는데 선거운동조차 안 도와주는 매정한 부모라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 숨겼던 겁니다. 그게 잘못이라면- 예, 지금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셔츠를 찢듯이 풀어 헤쳤다. 내가 공개한 건 복부를 흉하게 가로지르는 역L자형의 수술자국.     "편성엽 후보. 이제 속이 좀 시원하십니까?"   수치스럽진 않았다.   나는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배를 깐 불쌍한 놈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