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핏줄
8. 핏줄
방송토론이 끝나고 이틀이 더 흘렀다. 오늘은 사전투표 첫째 날이기도 했다. 출마자는 보통 이 시점에 투표소로 가는 게 관행이었다. 선거 관련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게 바로 이때거든. 선거에 아예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강제로 선거 분위기를 체감하는 시기였다. “나도 투표부터 해야겠지?” 오늘도 빡빡하게 편성된 일정. 그래도 준비하는 내내 몸이 비교적 가벼웠다. 방송토론의 효능을 이미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무려 국민의선택 사무총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어, 민서준 후보! 토론회 잘 봤어요. 그런 사연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네. 내일 오후에 당대표님 모시고 평택시 가는 길에 매산역 유세현장도 들를게. 아주 그냥 총력으로다가 지원사격하는 방침이 결정됐으니까 잘 준비해요." 당지도부의 지원유세 제안. 고맙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인기가 너무 없는 터라 지원이 오히려 해가 되는 지도부여서. 하지만 내 존재감이 유의미하게 올라갔다는 건 체감할 수 있었다. 인터뷰 요청만 17건. 평택, 화성, 용인에 지역구가 있는 국민의선택 국회의원들의 연락. 나를 은근히 괄시하던 지방의원 출마자들의 묘하게 달라진 태도까지. ‘방송토론 상의탈의’로 지역트렌드에 올라갔고, 커뮤니티에서도 떡밥이 계속 돌고 있었다. 역시 셔츠를 벗은 건 옳은 선택이었다. 어그로 좀 끌었다고 지지율이 무조건 급등하는 건 아니지만… ‘무관심보단 낫지.’ 듣보로만 남아 있을 땐, 그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았다. 괜히 정치인들이 욕 처먹어가면서 이슈 파이팅에만 몰두하고, 어떻게든 밈에 올라타려고 짜치는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일단 시선을 끌고 나면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쳐다봐주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사전투표소로 가는 길에도 변화한 관심도를 체감할 수 있을 터. 준비를 마치고 집을 떠나기 직전, 벨이 울렸다. 캠프 인사가 온 건가? 그렇다기엔 나는 수행 없이 혼자 다니는 중이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캠프를 굴리다 보니 아줌마들 빼고 상근자는 세 명뿐이거든. 공보, 조직, 회계. 그리고 비참하지만 내가 후보 겸 선대본부장 겸 상황실장이었다. 굳이 시간 쪼개서 날 데리러 올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보면 알겠지.” 어차피 나가는 길. 곧바로 문을 열어줬다.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서준이 오빠.” 170이 조금 넘는 키, 여자치곤 다부진 프레임의 체격. 살짝 그을린 피부에 아직은 앳된 외모. 실물로는 꽤 오랜만에 접하는 거지만, 당연히 아는 얼굴이었다. “민다정.” 나한테 간을 받아간 여동생이었다. 집주소는 어떻게 알고… 부모한테 물어봤겠지. 거슬리는 건 이 시간에 민다정이 매산시에 있다는 것 자체였다. 이미 메시지는 충분히 전한 것 같은데 왜 찾아온 걸까. “투어 중 아니야?” “군산CC에서 8차 대회 끝나고 9차까진 텀 좀 있어. 몰랐어?” “당연히 모르지.” “당연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뭘 일부러 그런다는 거야. 하지만 얘가 “오빠라면 내 대회일정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라고 여긴다는 건 확실했다. 이유도 짐작은 가능했다. 아마도 부모가, 그리고 프로골퍼인 여동생한테 덕 좀 보고 싶어 하는 민다인이 늘 우쭈쭈해줘서 그렇겠지. 어쨌거나 얘가 나한테 불만이 많다는 건 확실했다. 공치다 말고 억지로 시간내서 매산시까지 올라온 걸 보면. ‘빡칠 만도 한가?’ 그냥 쫓아내도 되겠지만, 혹시 재료가 좀 나올지도 몰랐다. 마침 주머니에는 고성능 지향성 마이크가 달린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선거 땐 이게 필수였다. “일단… 그래. 얘기해. 최대 20분 줄게.” “20분?” “오늘 사전투표일이야. 투표소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근처 오색시장에서 유세도 해야 돼.” “그러니까 지금 오빠 선거운동 때문에 바쁘다고 말하는 거지?” “응.” 출마자한테 선거운동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내가 무슨 무소속 기초의원 후보자도 아니고, 제1야당의 공천을 받은 수도권 기초단체장 후보인데. 그나마 20분도 많이 내준 거였다. “오빠. 올해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즌인지 얘기해줬지?” “그건 기억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그래? 어떻게 나한테 그런 짓을 해?” “…….” “나 벌써 스물하나야. 알아?” 어리잖아, 라고 말할 만큼 내가 무식하진 않았다. 애초에 한국 여자골프는 괴수가 너무 많았다. 선수풀이 씨가 마른 다른 종목들과 달리 유입도 여전하고, 세대교체도 빨랐다. 결국 노망주한테 관대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년까진 정규투어에서 무조건 자리 잡아야 기업에서 협찬이라도 들어온다고, 진짜!” 민다정의 영양가 없는 말 때문에 프로골프에 대한 견문만 넓어졌다. 성인이 되기 전에 정규투어에 정착하는 건 천재. 만으로 스물한 살까지 올라가면 그럭저럭 정석 유망주. 마지노선은 스물두 살이라고 했다. 대기만성형 선수라면 그 이후에 승격하는 일도 있겠지만. “노망주가 A급 스폰을 어떻게 구해? 그럴 바엔 1부 올라가 봤자라니까?” “그래. 골프에선 스폰이 중요하겠지.” “남 일 말하듯 하지 말라고, 진짜!” 진짜로 내 일이 아니잖아. 건성으로 대답하려다 입을 닫았다. 민다정의 표정이 너무 울상이라. 나한테 민폐 끼치는 것과 별개로 절박함은 느껴졌다. 어차피 나한테 재료를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징징거릴 뿐이라서. 그냥 적당히 타일러서 보내기로 했다. “다정아.” “이러다 나 동네 안과, 치과 이런 데서 협찬받게 생겼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그리고 원하는 게 뭔지 말해.” “그걸 몰라서…”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지. 자꾸 시간 낭비할래?” 계속 징징거리면 강제로라도 내쫓을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민다정도 곧 침착함을 되찾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유도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오빠 때문에 나 간 이식 수술받은 거 다 밝혀졌잖아.” “그게 문제가 되나? 완쾌됐잖아.” “스폰서들 까다로운 거 몰라? 마음먹고 꼬투리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는다고.” 일단은 자신의 상품가치가 깎인 게 불만이라고 했다. “민다정. 그건 네가 포장하기 나름이야.” “뭐?” “어릴 때 죽을 고비 넘겼던 애가 부단히 노력해서 프로골퍼의 꿈을 이뤘다, 이런 식으로 예쁘게 포장할 수 있는 거라고.” “오빠가 마케팅을 뭘 안다고…” “알아서 하는 말이니까 조용히 해.” 가족들은, 심지어 어린 민다정조차 날 대놓고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내 스펙이 별 볼일 없는 건 사실이었다. 여의도에서 일하다 보면 나보다 학벌 딸리는 인간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공채 당직자로서는 경력이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 시장후보로 차출되지 않았다면, 10년 안에 당직자몫 비례대표 정도는 비비지 않았을까? 그 경력을 철저히 씹고, 날 일관되게 깎아내리는 태도는 정말 신기했다. 정치는 국회의원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가족들 앞에서 병신짓을 한 건지. “민다정. 전혀 어렵지 않아.” 수술경력과 어머니의 민폐짓을 커버할 방법을 대충이나마 일러줬다. 유망주와 노망주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민다정의 상품가치가 깎이지 않도록. 그러자 점점 낯빛이 밝아지는 민다정. 이젠 가줬으면 싶었는데. “좋아. 그건 됐는데. 또 있어.” “뭐?” “왜 놀라? 이상하네.” “…….” 민다정한테는 요구사항이 또 있다고 했다. 마땅한 자신의 권리인 양 뻔뻔한 저 태도. 이년이 대체… 아니, 일단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듣기로 했다. “미안한데 공식 사과문 하나만 써줘, 오빠.” 민다정의 입에서 뱉어진 말은 상상 이상으로 뻔뻔했다. 사과문이라니? 얘는 내 속도 모르는지 태연하게 떠들었다. “솔직히 그때 토론에서 오빠가 말을 과격하게 했어. 협박해서 억지로 수술대 오른 사람처럼… 그래서 나 지금 입장 진짜 난처해졌거든? 내가 오빠 간 강제로 뺏어가지고 겨우 살아남은 애처럼 보이잖아.” “대충 맞잖아.” “내가 한 게 아니잖아! 전부 다 자발적이었다고 밝히면 안 돼? 아니면 나라도 언급해줘.” “…….” “엄마 아빠 지금 둘 다 제정신 아닌 거 알아? 어차피 오빠가 나 뒷바라지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방송토론에서 까발린 진실을 일부라도 뒤집으라는 요구였다. 정털리는 태도지만, 덕분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내가 민다정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얘도 똑같구나.’ 부모랑 다른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대체 나를 얼마나 병신으로 본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오빠. 어쩔 거야?” 대답을 재촉하는 민다정을 잠깐 바라봤다. 필드에서만 사느라 정치 따위는 모르는 동생. 솔직히 아직 어렸다. 어머니의 병신짓거리 때문에 얼굴이 누렇게 변한 채 죽어가던 가여운 모습이 내 기억에 남아 있었고. 그렇다고 봐줄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점잖게 상대할 일이 아니었구나.’ 얘도 결국 민씨 일가의 일원이었다. 민태기, 김정란, 민다인, 민다정. 이들 네 명은 역시 완벽한 한통속이었다. “다정아.” 웃으면서 동생을 불렀다. 그리고 얘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통보했다.
d3kza0VLSVdxajZ6L09aWC8xUnR2SzZrV2ZPRHFtV3pGbmRrcElSK1VISmxVOVhjeVdXcWNta3BTeEFFVTg4Vw
“내가 줬던 간, 다시 돌려달란 말은 안 할게.” “응?” “절연금이라고 생각하고 간직해. 그리고 다시 내 앞에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 “오빠?” “이 말대로 안 하면 지금 한 대화가 녹음파일이랑 같이 누구한테 제보될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스폰도 없어서 민무늬 모자로 다니는 골퍼한테 유익한 일은 아닐 거야. 말귀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냥 가라.” 내가 막말을 한 것도 아닌데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는 민다정. 개의치 않고 그녀를 문밖으로 내보냈다.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고. 알았지?” 여전히 실감이 안 나는 듯 눈만 깜빡거리는 민다정. 그러거나 말거나 문단속을 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오빠?” 뒤통수에서 민다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억울해하는 저 반응. 대체 내가 뭘 어쨌기에 온 가족이 나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심지어 모자란 놈 취급까지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의도 윗대가리들한테도 받아본 적 없는 취급을, 자기 돈으로 투어비용도 못 대는 2부 골퍼한테 받는 상황. 혹시 내가 잘못 산 걸까? 그래도 민다정 덕분에 목표는 더 분명해졌다. “전략을 다시 짜야겠네.” 이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선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