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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계략

당선됐더니 가족들이 후회한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9. 계략

사전투표까지 끝났다.     ------ 매산시장선거 사전투표율 현황   매산시 선거인수: 209,133명 사전투표 참여자 수: 56,048명 최종 사전투표율: 26.8% (전국 평균 24.1%) -----   일단 전국 평균보다 투표율이 높았다.   신도심의 투표율이 특히 압도적이었다. 거의 29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니까.   신도심 젊은 표심은 다민주 쪽이라는 게 흔한 선입견.   근데 그것도 이젠 조금 지난 얘기였다.   지금 다함께민주당을 지탱하는 세대는 2030이 아니었다.     “후보님? 사전투표소 12곳 표샘플링 추출 결과 나왔습니다.”   세부분석치도 긍정적이었다.   중앙에서 나온, 그동안 날 모른 척하던 정세분석실의 전문가가 내 앞에 있다는 게 증거.   진짜 전문가는 아니었다. 내가 선거 안 나가고 그냥 당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저 사람이랑 비슷한 롤을 맡고 있을 테니.   하지만 윗선에서 내 선거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긍정적이었다.   “연령별, 동별 가중치를 적용해서 사전투표 출구 추정치 시뮬을 돌렸습니다.” “예. 결과만 부탁합니다.” “다함께민주당 편성엽 후보가 48.3퍼센트, 그리고 후보님이 43.2퍼센트입니다.”     5퍼센트의 격차.   100퍼센트 들어맞는다고 보긴 힘들었다. 자체적으로 돌린 출구 추정치거든.   그래도 차이를 좁힌 건 사실.   아직 승리를 전망할 수 있는 격차는 아니었다.   “정말 아쉽습니다. 하다못해 딱 일주일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랬다간 제 돈줄이 먼저 마릅니다.” “하하.” “진짭니다.”     자랑은 아닌데 나는 거지였다.   선관위에 등록한 공식 계좌에 남은 잔고는 고작 182만원.     “어제는 현수막이 찢어졌는데 다시 달 돈이 없어서 그냥 놔뒀습니다. 80만원이 드니까.” “고작 80이 없어서.” “당에서 한푼도 안 도와줘서요. 정말 돈이 말랐습니다.” “흠흠.” “청년추천 보조금이나 경합지 지원금 명목으로, 완전 합법적인 경로만 통해서 절 도와주시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당에서 그냥 외면하셨죠. 지금 와서 원망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재정이 열악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막판에 싸비나 뒷돈 섞어서 물량 늘리는 건 가능했다.   그다지 적법한 방법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하는 짓이었다.   돈을 조금만 더 쓰면 이길 것 같으니까. 지금 당장 돈 몇백, 몇천이 아까워서 쫄보처럼 굴다가 지면 후회할 것 같으니까.   아니면 그냥 화려하게 불태우고 싶어서.   선거에 몰입한 인간은 이런 이유로 미친 짓을 자주 저지르곤 했다.   그러다가 재산 날리고 망한 인간이 여럿. 괜히 정치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지출을 늘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주변에선 대체로 아쉽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시의원이나 도의원에 출마한 아저씨, 아줌마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막판에 달려줘야 저들의 득표율이 0.1퍼라도 올라갈 테니 저럴 수밖에.   그래도 지금까지 날 외면한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다들 덕담만 하고 지나갔다.   이만하면 잘 싸웠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열심히 해보시라…     “포기한 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물론 나는 졌잘싸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민다정이 다녀간 이후 떠올린 수가 있었다.   딱히 돈과 시간을 잡아먹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렇지.’     일단 글을 몇 줄 끄적거렸다.   경쟁자인 다민주 편성엽 후보에게 띄우는 공개서신이었다. 사생활 폭로, 막판 끝장토론 제안?   이딴 게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는 충언에 가까웠다. ------ 존경하는 매산시민 여러분. 국민의선택 매산시장 후보 민서준입니다. TV 토론회가 끝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제 마음은 선거의 승패보다 편성엽 후보님의 건강 상태에 대한 깊은 우려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토론회가 끝나고 대기실 복도에서 마주쳤던 편성엽 후보님의 얼굴이 잊히지 않습니다. 붉게 상기된 안면, 목에 툭 불거진 혈관… 그리고 대화하는 와중에도 순간적으로 혀가 굳은 것처럼 발음이 어눌해지고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   의학지식이 없는 제가 보기에도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선거의 승패를 떠나 선배님의 건강이 진심으로 걱정됩니다. ------ 걱정하는 척 편성엽 후보의 건강 문제를 거론했다. 이건 잘못 풀리면 자충수였다.   중노년 유권자의 표가 소리 없이 떨어져나가는 자충수.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건강이슈 잘못 건드리면 진짜 역풍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실물로 접했던 편성엽의 상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극심한 복부비만, 안면홍조, 꼬인 발음, 비틀거리면서 팔을 휘젓던 몸짓…     사회생활 좀 해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 없었다.     “저, 민서준 후보님?” “그냥 선의로 하는 권고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너무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면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예. 저도 압니다.”   캠프 인사의 우려를 흘려듣고 계속 글을 써내려나갔다. ------ 30년 동안 매산시를 위해 봉사해 오신 매산시의 어른이자 정치권 선배님께 감히 충언을 올리고자 합니다. 편성엽 후보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으시고, 지금 당장 가까운 대형병원을 찾아가서 MRI, MRA와 경동맥 초음파 검사를 받으십시오.   무사히 쾌유하셔서 본투표 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선거운동하다가 훅 가기 싫으면 병원으로 가라는 경고로 끝냈다.   편성엽 후보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짓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그가 내 경고를 씹으리란 걸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선거가 목전인데 병원에 갈 리가 없잖아?’   편성엽은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시의원 두 번, 도의원 두 번.   그리고 지금은 시장실 입성을 앞둔 상황.   게다가 나이는 아직 60세였다.   실제로는 몸이 무너진 지 오래지만, 당사자는 “나 아직 젊어.”라고 자위하기 딱 좋은 나이.   가끔 혀가 꼬이고, 손에 힘이 안 들어가도 그러려니 넘겨왔겠지?   하물며 지금은 선거 직전이었다.   정신 멀쩡하던 인간도 시야가 좁아져서 오직 승리라는 목표만을 향해 달리는 시기.     즉 제정신이 아니었다. 건강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있나.   ‘내 충언도 그냥 네거티브로만 받아들이겠지?’   아직은 그냥 예측.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다민주 지지자들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 이거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 및 '후보자 비방'입니다. 다민주파출소에 바로 제보했고, 곧바로 법적 대응 들어갑니다. 민서준 이 새끼, 정치를 아주 더럽게 하는데 버릇 좀 고쳐줘야 할 것 같습니다. - 가짜뉴스로 선거판 교란하지 마라, 국선당련아 - 배까서 감성팔이 하다가 안 먹히니까 이제 의사 놀이까지 함? ㅋㅋ 민서준 네가 의사냐? 뇌허혈인지 뇌경색인지 네가 보면 암? 진짜 소름 돋네.   반응이 꽤 빠르네.   이런 지지자들 때문에라도 편성엽은 병원에 가기 힘들 터였다.   일정 몇 개 빵꾸내고 병원에 가라는 권유에 따르는 순간, 편성엽은 질병 유무와 상관없이 위험군으로 취급받을 테니까.     선거 끝나고 확인하자. 나 아직 한창때야.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거야, 링거나 맞자.     아마 이러면서 행복회로를 돌리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직감이 맞았다는 게 증명됐다.   편성엽이 글을 올렸다. ------ [허위사실로 시민을 기만하는 국선당 민서준 후보의 저열한 공작에 엄중히 경고합니다]   조금 전, 민서준 후보가 SNS를 통해 저의 건강에 무슨 치명적인 이상이 있는 것처럼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병원에 가라', '유세를 중단하라'는 등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매산시민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에서 시민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으며 보란 듯이 아주 펄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매산의 승리, 민주시민의 승리를 위해 마지막 1초까지 핏대를 세우며 달리겠습니다!! ------ 나는 건강하다, 걱정하지 마라.   결국 병원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편성엽의 선언이었다.     “건강하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괜한 짓을 했나 봅니다.” “민서준 후보님?” “우리도 예정된 일정이나 수행합시다. 이미 스케줄이 많이 밀렸어요.”     어쩌면 무의미한 짓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편성엽이 내 말을 흘려듣지 않고 슬쩍 병원에 다녀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를 믿고 있었다.   나를 개무시하고 무례하게 대하던 편성엽을 직접 접해봤으니까. 얕보던 내가 해준 경고를 진지하게 고려할 인간이 아니었다.   “자, 오늘도 열심히 해봅시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선거운동에 집중했다.   오색시장에서 쑥호떡도 먹고,   상인회랑 간담회 진행하면서 주차장 확충도 공약하고,   떠나는 길엔 컵닭강정까지 사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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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내 밥이었다. 따로 먹을 시간이 없어서.     유세하면서 마주치는 사람 전원한테 악수를 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호 2번 민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토론장에서 옷을 벗으면 어떡하냐고 혼내는 어르신한테는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여줬고,   자기도 부모한테 차별받으면서 자랐다고 씨발거리면서 하소연하는 아저씨한테는 말없이 쓴웃음으로 답해줬다.   돌아다니면서 악수한 사람의 숫자만 대략 천 명.   일정이 끝날 무렵에는 다리가 욱신거렸고, 손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저녁. 나는 편성엽 후보와 조우했다.   “편성엽으 찍어주십시오!”   그는 식은땀을 질질 흘리면서 살짝 어눌한 발음으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네.’ 내가 제기한 건강 의혹이 악영향을 끼친 걸까?   저 양반의 건강이 조금도 마음에 안 걸린다면 거짓말이었다.   혹시 진짜 쓰러질 수도 있잖아. 편성엽이 원래는 병원에 슬쩍 들러서 검진받을 생각이었는데 내가 올린 글 때문에 일부러 미룬 걸 수도 있고.  아무래도 민씨가 아니라서 그런지 완벽하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편성엽 후보가 날 흘깃거리더니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나보고 들으라는 듯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정치는! 결국 사회라는 거대한 가족을 돌보는 일입니다. 가장 작은 공동체에서조차 신뢰와 하합…을, 만들어 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수많은 시민의 갈등 조정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은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부터 얻을 줄 압- 알아야 합니다!”     씨발놈이, 지가 뭘 안다고.     역시 선거에서 이기는 일만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