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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은 남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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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은 남편이 돌아왔다.

-보미야. 잘 들어. 흐윽. 원이가……, 원이가 죽었어.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보미는 귓가가 멍해지며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고였어. 내가 지금 영안실이야. 원이의 진짜 가족들도 만났어.

보미의 아랫배가 뻐근하게 뭉쳐왔다.

거짓말이야. 사실이 아니야.

아침에 웃으며 인사를 했던 그의 얼굴이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뺨에 닿았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까지도…….

-그쪽도 오랜 시간 찾았나 봐. 정신이 없어서 네 이야길 할 수가 없었어.

이건 꿈이야.

보미는 다리에 힘이 빠져 간신히 벽을 집고 버텼다.

그가 나간 지 반나절 만에 듣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즉사였어. 보미야?

보미는 숨을 힘겹게 내쉬며 혼절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배를 감쌌다.

-한보미. 듣고 있어?

전화기 저편의 이모의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혼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절망적인 진실이 보미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녀의 연인이자 남편. 그리고 배 속 아이의 아빠.

낙원이 죽었다.

***

‘지금은 이런 거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

원이 역시 긴장됐는지 평소보다 격양된 음성이었다. 보미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직접 만든 투박한 반지를 끼웠다. 보미의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결을 문지르던 낙원이 고개를 들었다. 싱그러운 숲의 향기. 그녀가 좋아하던 낙원의 향기다.

보미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고백을 듣자 낙원은 망설임 없이 프러포즈를 했다. 입덧으로 울렁거리던 속도 그의 곁에 있으면 가라앉는 게 신기했다.

낙원의 프러포즈에 보미의 가슴의 어느 때보다 세차게 뛰었다.

‘사랑해. 원이 씨.’

‘사랑해. 나의 봄.’

남자의 숨결이 보미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낙원 마을에 오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물으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낙원이라는 이름도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딘가 비밀이 많은 남자와 평생을 약속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안다. 누구도 말릴 이 결혼에 보미는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보미가 낙원 마을을 다시 찾은 것은 십여 년만이었다. 엄마와 살던 낡은 집에 살던 남자. 낙원이라 불리는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모든 피가 심장으로 아우성치듯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아아…….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며 전기가 오른 것처럼 심장이 팔딱거려 숨 쉬는 방법조차 잊을 뻔한 그 순간, 한보미는 인생에서 처음 사랑에 빠졌다.

‘너에게 좋은 남편이 될게.’

보미가 반한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촘촘히 박힌 숱 많은 속눈썹 아래로 사라진다.

내 남자. 보미가 원의 뺨을 감싸며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라는 입 모양을 만들며 낙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때를 잘못 찾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가며 하나로 겹쳐졌다.

피어오르는 열기에 조금 더 남자를 원하며 뜨겁게 엉켜 들었다. 남자가 간지럽히듯 입술 끝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보미의 몸을 관통하듯 전율이 흐른다.

꼭 맞는 퍼즐처럼 맞닿은 이 순간은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낙원이 봄에게, 봄이 낙원에게 젖어 들듯 녹아 내려간다.

‘원이 씨. 나랑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지?’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불안해졌다.

‘약속해. 원이 씨.’

불안감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

남자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보미의 품을 가득 채웠던 남자의 몸 역시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건 못하겠다.’

그런 말 하지 마. 같이 있겠다고 평생 행복해지자고 했잖아. 보미가 남자의 두툼한 팔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보미의 손바닥 사이를 허깨비처럼 빠져나간다.

‘아……. 안 돼.’

어느새 저 멀리 가버린 낙원이 흐릿해진다. 보미는 낙원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지만, 손끝에 닿지도 못했다. 그가 있던 자리는 텅 비었다.

‘가지 마…….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보미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너는 또다시 나를 두고…….

나 없는 그곳이 그렇게 좋아? 나는 너 없는 이곳이 위태로워. 지금 내 발밑처럼.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보미의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지이잉.

지이잉.

반복적으로 울리는 진동음에 보미는 꿈에서 깨었다. 눈물로 퉁퉁 부은 눈꺼풀을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임시 거처로 지내고 있는 두 평짜리 고시원의 천장의 꽃무늬가 점점 또렷이 보였다.

또 그 꿈이었다.

5년 전 사고 소식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남자, 낙원의 꿈.

눈가에 아직 젖어 있는 눈물방울을 훔쳐 내렸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미는 여전히 죽은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보미는 답답한 감정을 숨기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늘 잠이 부족했다. 이런 날은 전화마저 알람 대신이 되어 오히려 감사했다.

“어. 수영아.”

-자고 있었지? 그럴 줄 알고 이 오빠가 모닝콜 했습니다.

사업 파트너이자 대학 동기인 수영이었다.

“고마워. 지금 일어나려 했지.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늦지 않게 준비하고 나와. 으……. 떨린다.

전화기 저편에서 수영의 긴장감이 전해져왔다. 보미 역시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도원 그룹을 네가 불편해하는 거 알지만…….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인데 내가 불편할 리가.”

보미의 개인사로 공적인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스타트업 기업인 나래 크리에이티브는 실력은 있지만, 경영상태가 엉망이었다. 괜찮은 투자자를 만났지만, 진행되던 사업들이 뒤집히고, 사기까지 당했다. 빚만 쌓이고,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던 그때 기적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도원 유통에서 아웃렛 등 유지비가 많이 드는 시설의 운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온라인 쇼핑으로 눈을 돌리고, 오프라인에서도 증강현실(AR)을 이용한 엔터테인먼트성 마케팅 전략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략을 구현해 줄 업체를 모집하고 있었다.

나래 크리에이티브는 게임부터 쇼핑몰 구축 등 증강현실 기술로 다양한 메타버스 공간을 개발해 왔고 도원 유통이 원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선정 업체가 된 나래 크리에이티브가 협업 계약서에 사인하며 지금까지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사회생의 날이었다.

‘황도 건설도 관련될 건데 괜찮아?’

수영이 모집 공고를 보미에게 보여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이제껏 만져보지 못한 계약금과 도원 그룹에서 제공하는 복지에 보미의 망설임이 사라졌다.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미래였다.

나래 크리에이티브가 살아남을 유일한 기회를 개인의 감정으로 거절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보미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에게 치이면서도 오늘 있을 일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될 거야. 이제 다 잘될 거야.

조금 여유 있게 도착한 보미는 쌍둥이같이 똑 닮은 타워가 대칭으로 서 있는 도원 그룹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황도건설이 사용하는 왼쪽 건물에 박힌 황도라는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신경 쓰지 말자.

“잘할 수 있어! 한보미.”

계약서에 사인할 때까지 긴장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보미는 좋은 기운을 한껏 흡수하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부아아앙.

기세 좋게 달리는 차에 엔진소리에 놀라서 보미는 뒷걸음질 쳤다.

짙게 선팅된 고급 승용차가 보미의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아……. 놀라라.”

보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원 그룹의 오른쪽 건물 앞에 서는 검은 승용차에 시선을 옮겼다. 뒤따라 두 대 정도의 차가 떨어져서 멈춰서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몸이 좋아 보이는 남자들이 우르르 내려서 대기했다.

회사의 임원인가? 경호 한번 삼엄하네.

보미는 대체 어떤 대단한 사람인가 싶어 호기심이 일었다.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어 고개를 길게 뺐다. 저 정도 임원이면 일개 개발 업체 대표인 자신과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얼굴은 알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일까?”

평소엔 다른 사람에 관해 관심도 없었는데, 오늘은 많이 들떴나 보다.

차 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같이 늘씬하게 뻗은 검은 승용차의 문이 열리자 보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잘 손질된 구두를 신은 남자의 긴 다리가 시야에 드러나자 보미의 시선이 남자의 다리를 타고 위로 이동했다.

아!

운동이라도 한 듯 다부진 몸에 남색 슈트를 휘감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어디선가 탄성이 흘러나왔다. 건물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서서 남자에게 시선을 줬다.

반듯하게 넘긴 머리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고, 남자의 얼굴은 신이 빚은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찬사가 어울릴 만큼 잘생겼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보미는 입을 틀어막으며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소리를 삼켰다.

말도 안 돼.

남자는 보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양옆으로 갈라진 사람들 사이로 당당하게 걸었다.

어딘가 날이 선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보미는 저 얼굴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5년 전 죽었다던 그였다.

“원이…… 씨.”

보미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사람들을 밀치며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어찌나 다람쥐같이 빠르고 필사적이었는지 경호원들도 순간 방심했다.

“저 여자 뭐야?”

“본부장님 팬 아냐? 잡아야지!”

경호원 중 하나가 눈치채고 보미에게 팔을 뻗어 붙잡으려 했다. 한발 빨랐던 보미가 남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원이 씨……. 원이 씨.”

목이 메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보미의 사슴같이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 살아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줄곧……. 거짓말이라고.”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함께하는 미래를 약속했었는데 5년 전, 갑자기 보미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렸다. 살아 있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는데……. 어째서 그간 연락 한 번 해주지 않았던 걸까?

보미는 제 눈으로 낙원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그의 가족들이 보미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아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고 보미는 서울까지 갔지만 가족들의 거부로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어딘가에서 그가 살아 있지 않을까 망상을 하곤 했다.

“당신이 살아 돌아오는 상상을 수백 번, 수천 번을 했어. 그런데……. 이거 꿈 아니지?”

허상일까 봐 제 손에 잡혀 있는 이 소맷귀조차 꿈처럼 사그라들까 봐 조바심 나는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보미가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 남자의 손등을 감쌌다.

꿈속과는 달리 따뜻했고, 형태도 단단했다. 손바닥 아래로 붉은 솟아 나온 손등 위의 핏줄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아……. 아……. 감사합니다.

보미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손이 허공으로 떨궈졌다.

“이 여자 뭡니까?”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싸늘한 낙원의 말투에 보미는 흠칫 놀랐다. 남자가 매정하게 쳐낸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원이 씨?”

혐오감이 깃든 표정. 싸늘한 공기에서 보미가 알던 낙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를 찾는 건지 모르겠지만, 착각하신 거 같군요.”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원이 씨. 나 몰라요? 기억을 찾아서 다 잊은 거예요?”

보미가 다급하게 남자를 붙잡으려 하자 남자는 성가시다는 듯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내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보미가 입을 열기 전에 경호원에게 저지당했다.

“김 비서.”

“네. 본부장님.”

금테 안경을 쓴 김 비서가 알코올 소독 티슈를 꺼내 건넸다.

남자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보미가 닿았던 손등을 쓱쓱 문질렀다.

“당장 경호업체 바꿔요. 잡상인이나 종교단체는 얼씬도 못 하게 하라고 했던 거 같은데.”

고저 없는 건조한 음성이 매서워 그의 주변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이미 익숙해진 듯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놔요! 이거 놔! 겨우……. 이제야 만났는데! 원이 씨!”

보미는 경호원에게 끌려나가면서 멀어지는 남자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몸부림쳤다.

“이봐요. 당신 때문에 우리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고요. 대체 뭡니까?”

“저 남자…….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요.”

당신에게 못다 한 말이 아직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보미의 목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쯧. 왜 뭐? 헤어진 연인이라도 돼요?”

“어떻게 아셨어요?”

경호원은 순진하게 되묻은 여자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에 미치려면 곱게 미치지…….

“어떻게든 연줄 닿으려는 여자가 지금까지 한둘이었겠어요? 아이도 들이밀며 한몫 잡으려는 여자도 있었어요. 제발 참신한 방법 좀 써요. 이렇게 여러 사람 피해 입히고 씨알도 안 먹히는 방법 말고.”

낙원이 아닌 걸까? 경호원의 말에 아까부터 들던 위화감에 어떤 의심이 들었다.

“……. 저분 성함이?”

“아니. 공사를 치려면, 상대 이름 정도는 알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호원은 여자의 멍청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 여잔 어디 가서 사기를 치려 해도 다 걸리겠구먼.

낙원이 죽고, 그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낙원이라는 이름은 원래부터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진짜 이름이……. 새삼 보미는 자신과 살을 섞고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장례식조차 알 수 없었다.

낙원의 부고에 충격으로 쓰러진 보미를 보며 이모는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낙원을 잊으라고 했다. 낙원의 죽음을 전한 이모에게 물어도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이 실종자를 은닉했다며, 낙원의 죽음을 낙원 마을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려 한다는 것 때문인지 보미가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을 물어도 이모는 기억이 안 난다, 잊고 살라는 말뿐이었다.

이제와서 저 남자가 누군지 확인한들…….

“보미야!”

낙담하며 힘이 빠진 보미를 부르며 수영이 달려왔다.

“놓으시죠.”

경호원에게서 보미를 떼어놓으려 했다.

“일행이신가요?”

“오늘 도원 유통과의 계약 때문에 왔습니다. 저희 대표님이 무슨 일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수영이 허가받은 통행증을 내밀자 경호원은 그제야 보미를 놓아줬다.

“하……. 계약하러 왔으면 일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경호원의 원망 섞인 말이 들렸지만, 수영은 탈진한 보미를 부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보미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수영아. 나……. 나 그 사람을 만났어. 살아 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

“보미야.”

수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5년 전 제정신이 아니었던 보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어 달을 사라졌다가 나타난 보미는 그 낡은 집의 혼자였다. 먹고 자는 것도 게을리하며, 허공에 혼잣말까지 했다. 배 속의 아이까지 위험한 상태였다.

혼자 두면 죽어 버릴 거 같은 보미를 낙원 마을로 못 가게 막고 이모가 사는 집으로 옮겼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녀의 안에는 낙원이 살아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모르는데. 나를 잊은 걸까? 정말 다른 사람인 걸까? 그렇게 똑같이 생겼는데?”

보미의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졌다. 기억 속의 원은 보미만이 세상 전부인 사람이었다. 오늘 만난 남자는 낙원과 꼭 빼닮은 외모였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도플갱어. 세상에 닮은 사람은 셋이 있다잖아.”

수영은 망연자실해 있는 보미를 일으켜 세웠다.

그 사람은 죽었잖아. 인제 그만 잊으라는 말을 내뱉는 것은 보미에게 너무 잔인한 행동인 것 같아 말을 삼켰다.

“그냥 닮은 사람이야.”

마치 벌레라도 만진 것처럼 보미의 손이 닿았던 손등을 닦아내던 남자는 낙원의 얼굴이었지만 낙원이 아니었다. 내가 착각한 걸까? 너무 그리워서 허깨비를 진짜라고 여긴 걸까?

“그래……. 나 참 바보 같네.”

보미는 입가를 매만지며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낙원은 죽었다. 인제 그만 인정해야지.

낙원보다 소중한 것을 남겨줬으니까.

지이잉.

손목의 진동이 강하게 울리자 보미는 허겁지겁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눈가를 매만지며 수영에게 눈짓하자 수영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예뻐. 보미야.

“어. 여름아!”

-엄마!

핸드폰 화면을 슬라이드 하자 동그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다가왔다.

낙원이 사라진 봄이 존재하는 이유.

낙원과 봄의 아이,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