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이를 닮은 남자.
2화. 아이를 닮은 남자.
-엄마. 여름이 보러 안 와요?
“지난주에 못 가서 미안해.”
여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했던 감정들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힝. 보고 싶은데.
“엄마도 여름이 보고 싶어.”
여름을 사람 시에 사는 이모 겨울의 집에 맡기고 주말마다 만나러 갔다. 정훈 선배가 회삿돈을 횡령해서 잠적한 이후로 보미는 살던 집의 전세금도 빼서 급한 돈을 막아야만 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야근을 하는 날이 늘었다.
‘보미야. 여름이도 있는데 너한테 야근을 시키는 건 아닌 거 같아. 차라리 무리해서라도 새 개발자를 뽑고 업무 분담을 세분화하자.’
공동 대표인 수영은 늘 보미를 우선으로 생각했지만, 보미는 여름 때문에 자신만 특별 대우받는 걸 미안해했다.
보미도 수영도 월급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건비를 더 들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도원 유통의 협력업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더욱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여름의 육아는 신경을 안 쓰면 사고로 이어지기 쉬웠다. 보미는 결국 여름을 이모 집에 맡기게 되었다.
제대로 엄마 노릇을 못 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여름아. 조금만 참아. 엄마가 세 밤만 자면 갈게.”
-우와! 할머니! 엄마 온대요. 엄마, 엄마. 여름이 매일 밤. 하나, 둘, 셋 이렇게 세면서 잘 거예요.
여름은 통통한 손가락을 세 개를 들어 올렸다.
아……. 귀여워.
낙원을 꼭 닮은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보미에게는 행복이었다.
-엄마. 그래도 여름이 보러 오려고 일 많이 해서 아프면 안 돼요.
너의 다정함은 아빠를 닮은 걸까?
“엄마는 건강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여름이도 아프지 마.”
-넵!
큰 소리로 대답하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엄마가 지금부터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따가 또 전화하자. 오늘 일만 잘되면 엄마랑 여름이 같이 살 수 있어!”
-우와! 진짜요? 진짜 엄마랑 살아요? 매일 같이 자도 돼요?
“응. 엄마랑 매일 매일 같이 잘 거야.”
-신난다.! 엄마. 파이팅!
주먹을 쥐며 화이팅 포즈를 취하며 웃으니 애교살이 예쁘게 접힌다.
눈가에 눈물점과 웃을 때 보이는 보조개까지 낙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순간 아까 만난 남자의 날이 선 싸늘한 얼굴이 겹쳐졌다.
아니야. 보미는 일순 떠오른 상념을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어딜. 우리 낙원 씨가 더 멋있었고, 우리 여름이가 더 잘생겼어.
그런 시베리아 벌판처럼 황량하고 차가워 보이는 소름 돋는 눈빛이 아니라 늘 봄날 같은 따뜻한 눈빛으로 보미를 바라보던 남자였다.
너무 그리워서, 낙원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착각했나 보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말자. 여름을 위해서라도 계약을 무사히 마쳐야 했다.
“미안. 나 때문에 지체됐네. 아직 지각 아니지?”
시계가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각을 가르치고 있었다.
“좀 서둘러야겠어. 뛰자!”
수영이 씩 웃으면서 먼저 뛰기 시작했다.
“늦은 사람이 커피 쏘는 거야.”
“하수영. 비겁하게!”
보미가 수영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듯 뒤쫓았다. 대학 때부터 동아리 방에서 프로그래밍하며 놀다가 수업에 늦으면 수영의 뒤를 쫓아 뛰곤 했다.
수영처럼 자신을 이해해 주고 응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인지도 모른다.
숨을 헉헉거리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두 사람이 통행증을 제시하자 엘리베이터로 안내되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관처럼, 내부도 세련되고 우아했다.
일류 호텔처럼 1층 로비의 안쪽에는 계단 아래로 사원들의 도서관과 휴식 공간으로 쓰이는 중정까지 있었다.
대기업에 방문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압도적인 분위기에 보미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오늘 계약이 잘 성사되면 정훈 선배가 저지른 손해를 메꾸고도 남았다. 밀린 월급도 줄 수 있을 것이고,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가치도 올라갈 것이었다.
게다가 계약 기간 동안 제공되는 사택이라니…….
여름을 데려와 예전처럼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보미의 가슴이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침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 높은 분과 또다시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앞으로 다른 사업과 연동해 확장될 수도 있고 기대가 큽니다.”
“감사합니다.”
“하수영 대표님도 한보미 대표님도 젊은데 능력이 아주 좋아요. 잘 부탁합니다.”
보미와 수영은 도원 유통의 박 이사와 악수하였다. 드디어 무사히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다.
최상의 환경에서 개발에만 전념하는 삶이 보장된다. 보미와 수영은 큰 사업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발등 위의 불이 겨우 꺼진 것이다.
“괜찮으시면 식사 함께하시죠.”
박 이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권하자 끝나자마자 이사준비를 하려던 두 사람은 거절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박 이사는 줄곧 자기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박 이사에게 대학생인 딸이 있고 키우는 개가 좋아하는 간식까지 알 수 있었다.
중후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말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
“아까 사인할 때 보니 한보미 대표 만년필 멋지던데, 어디서 샀는지 물어도 실례가 아닐까요? 딸에게 선물하면 너무 감각 없을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박 이사가 질문했다.
“저도 대학교 입학 때 아버지 같은 분에게 선물 받았어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써요. 따님도 분명 좋아할 거에요. 브랜드가]……. 몽 뭐였는데…….”
보미가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대학교 입학 때 보미의 후원자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을 여전히 소중히 쓰고 있었다. 하지만 브랜드 네임에 둔감한 보미는 어디 거인지 매번 잊어버렸다.
물건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기억하는 뇌와 전혀 상관없는 영역 같았다.
“회의실에 만년필을 두고 왔나 봐요. 죄송해요. 박 이사님. 하수영 대표와 먼저 식사하세요. 식당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꼼꼼히 챙기지 못했다.
한보미답지 않은 하루였다. 죽은 낙원을 닮은 남자에게 확인도 안 하고 다짜고짜 매달렸던 무모함도 그렇고…….
엘리베이터 앞에 혼자 남은 보미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책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신 차려. 한보미.
띵.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 고개를 든 보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낙원. 아니 낙원을 닮은 그 남자가 거기 있었다. 보미를 향한 미소는 볼 수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기억 속의 낙원보다 잘생기게 느껴졌다.
낙원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값비싼 고급 슈트를 걸친 그의 어깨는 더 다부지고 넓어 보였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맺혀 지워지지 않는 낙원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엘리베이터 안에 존재했다.
“안 탑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에서조차 보미는 낙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목소리까지 이토록 닮을 수 있는 걸까?
보미가 대답이 없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닫히기 시작했다.
보미는 반사적으로 닫히는 문에 팔을 뻗었다. 센서에 반응한 문이 닫히지 못한 채로 활짝 열렸다. 그 순간 보미의 몸이 거센 힘에 이끌려 문 사이로 끌려들어 갔다.
“뭐 하는 짓입니까?”
남자는 보미를 끌어당긴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보미를 잡은 손을 황급히 떼어냈다.
“죄송해요.”
보미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발갛게 물든 얼굴을 황급히 숙였다.
바보같이 왜 팔을 뻗은 거지?
한심해. 오늘 정말 한보미는 이상했다.
“문이 닫히길래 저도 모르게…….”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보미를 무시했다.
사람 민망하게……. 까칠하긴. 얼굴이 아깝다.
보미는 괜히 민망해 마음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내 아침에 만난 여자인 걸 들킬까 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선을 피한다고 남자에게 피어나는 익숙했던 향기마저 무시할 수 없었다.
원이 씨.
옅은 스킨 향에 섞인 낙원의 숲과 같은 깊은 향기가 보미의 비강 깊숙한 곳에 스며들었다.
이런데도 원이 씨가 아니라고?
보미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아……. 망할 눈이 마주쳤다. 하필 이런 때 눈물이 날 게 뭐람.
남자는 구석에 박힌 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손바닥에는 여자의 가녀린 팔을 잡아당겼을 때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분 나빠.
“몇 층 가요?”
알아서 눌러 주면 좋으련만 저 뻔뻔한 여자는 눈치도 없나 보다.
비서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혼자 탄 게 실수였다. 하필 임원용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라니.
재경은 스스로가 불러들인 재앙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만났을 때처럼 커다란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 있었다.
하. 미치겠네. 아까도 그렇고, 왜 또 우는 건데?
아침에 본 그 정신 나간 여자랑 단둘이 엘리베이터라니……. 그대로 밀쳐 버릴 것을 괜히 태워버렸다. 후회한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까지 소용이 없었다.
“잡상인은 출입금지일 텐데.”
아예 도원 빌딩 경비 업체를 다 잘라버려야 하나.
“잡상인이 아니에요. 아깐 제가 실례했습니다.”
어떡하지? 저 남자 날 기억하고 있네……. 보미는 당혹감을 숨기려고 자신의 구두 앞코만 뚫어지라 바라보며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23층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고 장막처럼 드리워진 긴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아까 아침엔 왜 그런 겁니까?”
재경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어느새 말을 걸고 있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우니 단순히 궁금해진 것뿐이라고 되뇌었다.
“……. 죄송했어요.”
보미는 앵무새처럼 사과밖에 할 수 없었다.
낙원을 닮은 얼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중요한 계약 날 회사 임원분에게 실례를 범했다.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나래 크리에이티브와 거래를 끊으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종교단체는 아닌 거 같고.”
“…….”
보미는 자신을 소개해야 하나 망설였다. 혹여라도 나래 크리에이티브에 불이익이 올까 봐 걱정되었다.
“말할 의사가 없는 거 같으니 비상 버튼 누르고 신고하겠습니다.”
“아! 안 돼요.”
보미가 제 목에 걸린 통행증을 매만졌다.
“협력업체?”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한보미라고 합니다.”
인제 와서 숨겨봤자 맞을 매만 늘어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기억을 잃은 낙원이라면 자신의 이름에 반응하는 기적을 보여 주지는 않을까?
보미가 기대에 차 고개를 들어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렇게 보면 낙원의 까맣게 빛나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여전히 한보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를 그도 들었을까?
“……. 한보미…….”
낙원과 같은 목소리로 보미의 이름을 부른다. 보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보미라.”
한보미…….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재경이 보미의 통행증을 뚫어지라 보며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