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내 이름 기억나요?
3화. 내 이름 기억나요?
“제 이름, 기억나세요?”
보미는 조급해진 마음에 재경의 말이 끝나기 전에 되물었다.
“…….”
그가 잠시 들인 뜸에도 보미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닮은 사람이 낙원이 아니라니…….
낙원이라는 이름은 낙원 마을에 뚝 떨어진 그를 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낙원이라고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비가 와 강물이 불어나던 밤에 상처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정 많은 마을 사람들은 그런 낙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끝동이 할머니가 아는 순경을 통해 경찰에도 신원조회를 요청했다고 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고 했다.
뭐든 빨리 익히고 똑똑했던 남자였다. 본래의 낙원이 이런 대기업을 다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낙원의 죽음을 의심하는 보미에게 이모는 자신을 못 믿느냐고 화를 냈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보미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그는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같은 얼굴, 같은 향기, 같은 목소리.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기억은 이렇게 심장까지 뒤흔들 수 있는 걸까?
낙원이 보고 싶어, 그의 온기가 그리워, 그가 살아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나래의 한보미 대표. 증강현실 기반의 앱 개발 회사죠. 기억합니다.”
보미는 실망감을 감추며 가방 안을 헤집어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일 적인 관계라면 일을 해야지. 이렇게 도원 그룹의 높은 분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모집에서 꽤 우수한 성적을 보여 줬죠. 여러 가지 면에서.”
남자의 긴 손가락이 보미의 손가락 끝을 간질간질하게 스쳐 갔다. 하마터면 남자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명함을 놓칠 뻔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미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 채로 허공에 남은 손을 주먹을 쥐며 뒤로 감췄다.
“명함……. 핸드폰 카메라로 한번 비춰보세요.”
“흥미를 끌 만한 걸 숨겨놨나 보죠?”
“명색이 증강현실 개발 회사잖아요.”
보미가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울었다, 웃었다 정말 미친 여자가 틀림없는데…….
말은 또 멀쩡히 하는 것 같고.
“궁금해지네.”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한보미 대표와 하수영 대표. 보고서에서 본 이름.
핸드폰 안에 3D 화면을 로딩 시간도 거의 없이 구현해내는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기술은 다른 경쟁회사들보다 뛰어났다.
거기다 별도의 앱이 필요 없이 핸드폰 카메라만으로 구동하는 시스템은 빠른 정보 획득을 원하는 요즘 소비자들의 니즈를 반영했다.
증강현실 마케팅팀을 구성하기 위해 모인 도원 유통의 심사위원들에게 만장일치로 만점을 얻어냈다.
심사 장소에 황도 건설의 황민준 대표가 왔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오로지 실력만으로 승부했다고 믿을 뻔했다. 황도 건설의 황민준 대표는 현재 도재경과 차기 부회장 자리를 놓고 대립 중이었다.
사기 사건에 휘말려 재정적으로 위태로운 창업 초기의 영세한 회사를 이렇게 미는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재경은 싸한 기운을 느꼈다.
나래 크리에이티브와 황민준 대표와의 관계를 알아보라고 김 비서에게 말해둔 참이었다.
“명함은 지금 빈손이라 없고, 전략 기획 본부, 본부장 도재경입니다.”
“도……재경 본부장님?”
도재경……. 바로 이 남자가 도재경.
도원 그룹 후계자로 거론되는 황도 건설의 황민준 대표와 적대적인 관계인 남자.
몇 년 전부터 입원 중인 도준석 회장의 유일한 핏줄이자 고(古) 도원일 부회장의 아들.
그리고……. 보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보미가 절대 얽혀서는 안 되는 남자였다.
“내 이름은 기억나는 게 있나 봐요?”
재경이 아까 얼빠진 보미의 질문을 되물었다.
“아……. 아닙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보미는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 엘리베이터 안이 아니면 이렇게 말 섞을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재경은 보미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나서 부터 묘하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신경 쓰인다고? 이 도재경이가?
재경은 입가를 매만지더니 열림 버튼을 눌렀다.
“23층입니다. 한보미 대표.”
“그럼……. 살펴 가세요.”
보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가 도재경이라면 더더욱 낙원이어서는 안 되었다.
도원 그룹의 도씨 일가와 황씨 일가의 파벌 싸움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보미는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준 후견인 황도 건설의 황민준 대표를 떠올렸다.
보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남자에게 이 당혹감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등을 꼿꼿이 세우고 미팅룸으로 향해 걸었다.
도재경……. 낙원을 닮은 남자.
그리고 낙원이어서는 절대 안 되는 남자.
그리움에 미쳐서 한낮에 꾼 백일몽처럼 찰나의 환상이었다.
봄과 여름의 낙원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재경은 닫히는 문 사이로 멀어져가는 보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걸을 때마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단발머리가 그녀의 희고 하얀 목덜미 위에서 사라락 나부낀다.
갸름한 얼굴, 동그란 이마에 오뚝한 코. 그리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도톰한 입술. 쉽게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뺨. 시선을 홀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무엇보다 재경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 목소리였다.
‘원이 씨!’
그녀의 손이 자신의 소매 끝을 잡았을 때 단숨에 뿌리치지 못했다.
왜였을까? 왜 일순 망설였을까?
낯선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했다.
‘난 봄보다 여름이 좋아. 봄의 화사함은 꽃이 피는 순간 저버릴 걱정을 하잖아. 여름의 푸르름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재경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와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이 머리를 압박하듯 몰려왔다. 재경은 뒷걸음질 치며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엽수림 사이로 내리쬐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며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허억. 헉.”
숨이……. 재경은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또다. 이 기분 나쁜 감각.
5년 전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쉴 새 없이 두통에 시달렸다.
재경은 사고 당시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빗길에 미끄러진 덤프트럭이 재경의 승용차와 부딪쳐 재경은 차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모르지만, 발견된 자동차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재경이 깨어난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고의적이라고 느껴지는 이 사고의 배후에는 재경이 도원 그룹의 중심 세력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할머니인 이해영과 황민준 대표 같은.
도원 그룹의 권력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도원 그룹이 지금처럼 커진 것은 도원 유통 시절 황도 건설과 합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재경의 할아버지인 도원 그룹의 도준석 회장과 그의 아내 이혜영 사이에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도준석 회장은 후계자를 황도 건설의 황 회장의 아들인 황민준에게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대 독자였다는 도준석 회장은 손이 귀한 집안인 만큼 핏줄에 대한 집착이 심했고, 밖에서 만든 아이 도원일을 다음 후계자로 세웠다.
도원일이 사고로 죽자 다음 회장 자리는 다시 황민준 대표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도준석이 자신이 쫓아낸 성연희와 도재경 모자(母子)를 다시 불러들이자 다음 후계자 자리를 놓고 두 세력이 팽팽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도준석 회장이 다음 후계자를 지목하기 위한 파티를 열기 전날, 재경은 사고를 당했다.
재경은 천천히 심호흡하였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띵. 문이 열립니다.
재경이 멀쩡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걸어 나가자 문 앞에서 대기하던 비서와 경호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한시라도 긴장을 풀면 물어뜯기는 정글 같은 곳. 이곳에서 살아남아 죽은 아버지가 원하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 재경은 어떤 약점도 만들 수 없었다.
***
보미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을 올라갔다.
담쟁이 넝쿨이 늘어져 있는 하얀 담을 따라 걷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거리도 조금만 더 가면 입구가 보일 것이다.
보미는 거대한 요새 같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도원 그룹과 계약을 맺은 지 2주의 시간이 흘렀다.
도원 유통과 함께하는 증강현실 사업부로 출근도 코앞이었다.
보미는 도원 그룹에서 제공한 협력업체 직원들을 위한 주택 임대 지원금으로 도원 아파트에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이사는 짐도 원체 없었기에 함께 살며 여름을 돌봐주기로 한 이종사촌 미래와 하수영 대표가 도와줘서 수월히 끝났다.
보미는 여름이 좋아하는 기가톤 로봇이 그려진 침구를 꺼내며 미소지었다.
이 이불을 덮고 다리 한쪽을 보미의 배 위에 올리는 작은 몸을 품에 안고 잠이 들 것이다.
이제 여름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름. 낙원이 남겨준 보미의 보물.
‘봄이 없으면 여름도 없어.’
낙원의 그 말에 보미는 비로소 봄을 좋아할 수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봄이 아이를 낳은 계절인 여름이 되었다.
‘나에게는 봄이 있으니 우리에게는 여름도 있으면 좋겠어.’
낙원이 농담처럼 했던 말에 어느새 배 속의 아이를 여름이라 불렀다.
여름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
뻔뻔하고 약삭빨라져서 두 번 다시 사기도 당하지 않아야 하고.
프로젝트도 성공해 나래 크리에이티브를 성장시켜야만 했다. 보미는 양 주먹에 힘을 주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할 수 있어. 엄마니까. 여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여긴 변하지 않네.”
보미는 오랜만에 방문에 긴장을 감추며 벨을 눌렀다.
젊었을 때 영국에서 살았다는 황민준 대표의 취향대로 꾸며진 정원은 여름 장미가 흐드러진 시기에는 절경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보미를 알아본 강원 댁이 반갑게 맞이했다.
“건강하셨죠? 대표님 뵐 수 있을까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셔. 오늘은 손님이 많은 날이네.”
보미는 서재를 향해 걷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에 비친 보미는 지난 오 년간의 삶이 순탄치 않았던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초췌했다.
‘실수라면, 새로 시작하면 돼. 아기를 포기하면 널 위해 좋은 혼처도 알아봐 주마.’
낙원이 죽었다는 소식에 보미는 낙원을 찾으러 서울로 왔다. 밥도 물도 먹지 않고, 미친 여자처럼 헤매다가 쓰러진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보호자 자격으로 온 민준은 보미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실망했겠지.
조산의 위험이 있어 산부인과에 끌려가 강제로 입원을 당했다.
아기를 뺏길까 봐 보미는 도망쳐 숨어버렸다. 아니 민준이 놓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뒤로 민준과는 서먹해져 연락이 뜸했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보미는 심호흡하고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쫄지 마. 한보미.
“안녕하세요? 대표님.”
보미가 한껏 미소를 띠며 문을 열었다. 껄끄러워진 사이지만, 보미가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었다.
서류를 보던 황민준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딱 벌어진 어깨의 남자다운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환갑을 다가온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사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달 전에 네 이모한테 연락이 왔었다.”
“이모가……. 무슨 일로…….”
“땅과 집을 모두 사기를 당했다 하던데…….”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어요.”
이모가 보미의 이름을 믿고 정훈 선배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 할아버지가 남겨준 땅을 투자한 모양이었다.
“됐다.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잖니.”
“죄송합니다.”
“쯧. 너 기죽으라 부른 거 아니다.”
민준의 말투는 냉랭했고 보미는 어쩐지 움츠러들었다. 민준과는 늘 이랬다. 받기만 하는 보미로서는 그 도움이 불편했고, 민준은 늘 그런 보미를 못마땅해했다. 그럼에도 끊을 수는 없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계였다.
“도원 유통과 일하게 됐다고 들었다.”
“대표님하고의 관계는…….”
보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민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들키지 않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