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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취향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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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취향인 여자.

여덟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 금전적인 면은 황민준 대표의 후원으로 해결해왔다. 갈 곳 없는 보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신세를 진 곳도 이곳과 멀지 않은 황민준 대표의 본가였다.

보미는 자기 일로 더는 민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남이지만 남이 아닌 관계.

누군가 민준과 보미의 관계를 알면,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실력마저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가 조심한다고 될 일이냐?”

“……. 죄송해요.”

또……. 또……. 민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내가……. 하……. 아니다.”

민준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일 벌이고 해결도 못 하면서 혼자 할 수 있다고 우기는 모습이 그녀의 모친 가을을 똑 닮았다.

대책 없고, 고집 세고, 성격은 또 어찌나 제멋대로인지.

데리고 갈 남자 하나 없을 것 같더니만, 멋대로 애를 만들어 오지를 않나.

유학을 보내준다고 해도 마다하고 국내 대학 컴공 과에 들어가더니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졸업하고 혼처도 알아봐 주기도 전에 회사를 퇴사하고 잠적해버렸다.

그리고 일여 년 만에 만난 것이 응급실에 실려 온 임신한 보미였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끓어오르고 답답하기만 했다.

‘대체 어떤 놈이냐? 결혼도 안 하고……. 이게 대체 무슨.’

보미는 재촉에도 입을 꾹 다물고 상대가 누군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임신했다는데 개월 수에 비해 작은 배와 한 줌도 안 될 거 같은 손목뼈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상 물정 모르고 남자에게 속아 아이를 낳아서 키우겠다고 하는 무모함에 몇 마디 했더니 또 도망을 가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척했지만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 농사만큼 힘든 게 또 있을까?

뭐 하나 민준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식사나 하고 가라.”

보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거절하면 서운해하시겠지. 무언 속에 오직 강원 댁만이 떠들며 보미에게 말을 걸었다.

불편하다.

“잘 먹었습니다.”

“돈 필요하면 네 이모 통하지 말고 직접 말해라.”

“…….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

이모가 돈을 받아가면서, 또 보미의 이름을 팔았나 보다. 보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핏줄이 이어진 사람은 이모네 가족만 남은 보미로서는 이모의 그런 행동에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염치없는 사람은 저 한 사람이면 족했다.

민준은 모든 면에서 무심했지만, 금전적인 지원은 늘 아끼지 않았다.

아낌없는 지원은 황 씨 부자의 내력인지도 모른다.

엄마 역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 회장님에게 많은 후원을 받았고, 외할머니의 병원비 역시 황 회장님이 지원 해주셨다고 했다.

황도 건설이 도원에 흡수되기 전부터, 보미의 외할아버지가 황가(家)의 별장지기로 일했고 황민준 대표와 엄마 한가을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황도 건설 후계자와 별장지기 딸의 기묘한 우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을은 민준을 따랐고, 그런 가을을 민준은 귀여워했다. 매년 휴가철에만 만나던 사이인 두 사람은 함께 건축학을 공부하러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서 더욱더 사이가 돈독해졌다. 유학을 마친 두 사람은 황도 건설에서 일했고 무척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다.

엄마 가을이 유학하러 가게 된 것도 황도 건설 선대 회장님의 은덕이라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했다.

황씨 일가에 충성을 다짐했던 할아버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황도 건설이 지은 건물이 무너져서 돌아가셨다.

“곧 가영이가 결혼할 것 같으니 그때 얼굴이나 비춰라.”

“가영이가요?”

연가영. 보미와 함께 자란 황 민준 대표의 누이, 황 여사의 딸이었다.

축하한다고, 잘 됐다고 해야 하는데…….

어린 시절 당한 것을 떠올리면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

푸른 하늘에 분홍색 벚꽃이 구름처럼 피어난 절경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창문을 열자 바람 소리에 아까부터 지루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여자의 말이 점점 멀어진다.

“재경 오빠.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가영의 질문에 재경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듣고 있습니다.”

도원 그룹을 위한 화합. 황민준 대표의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의미로 정략결혼이 진행되었다.

황민준 대표는 도재경의 결혼 상대로 자신의 질녀 연가영을 소개했다.

‘재경아. 지금은 물러설 때야. 황민준 대표 나이로 회장직을 맡아도 앞으로 길어도 이십 년도 안될 거다. 네 할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다들 황민준 대표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몇 년째 계속되잖니.’

재경의 어머니 성연희는 일시적 휴전협정과도 같은 약혼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난 널 잃는 것보다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는 쪽을 택하는 거뿐이다.’

재경이 의식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도준석 회장이 쓰러졌다.

회장 대리를 맡은 재경의 할머니 이해영은 황민준 대표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사고로 일 년 가까이 자리를 비웠던 재경의 입지는 더더욱 좁았다.

황민준 대표의 질녀와 결혼하면 재경이 적어도 도원 그룹 내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배척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재경과 연가영.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도씨 가문과 황씨 가문의 영원한 화합이고 평화적인 결말이었다.

앞으로 도원 그룹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재경 오빠. 저 오빠 만나는 거 기대 많이 했어요. 오빠는 기억 못 할지도 모르지만, 저 오빠가 외국 나가기 전에 우리 만난 적 있어요.”

가영의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오빠가 전략기획 본부실에서 활약하는 모습 보면서 제가 다 뿌듯했어요.”

도재경을 멀리서 보면서 흠모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혼담이 진행된다고 했을 때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뻤다.

잘 생겼다. 향수는 뭐 쓰는 걸까? 향기도 좋고, 목소리는 왜 이렇게 사람을 녹이는지……. 이 남자가 내 남자가 된다니!

가영은 재경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우리는 운명인 거죠? 어린 시절 인연이 이렇게……. 우리 너무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재경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가영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재경은 빨리 이 여자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싶었다.

행동이며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천박하고 재경의 취향과는 정반대였다.

차 안에 가득한 여자의 향수 냄새는 창문을 열어도 옅어지지 않아 두통을 일으킬 정도였다.

골목길로 접어들며 재경이 커브를 돌자 바람이 살랑거리며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막 피어난 은방울꽃의 향기가 났다.

정신 나간 여자 같다고 생각했는데도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건 머릿속을 맑게 해주던 그녀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였다.

보미를 떠올리자 그녀가 건넨 명함이 떠올랐다. 그 손바닥 반만 한 종이에서도 그녀의 잔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재경은 결국 일을 하다 말고 그 명함을 핸드폰으로 비춰봤다.

일급비밀이라도 감췄을 리는 없지만…….

뭐에 홀린 건가?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는 없는데…….

호기심. 모든 것이 당연했던 재경의 일상에 잠시 일은 파문에 대한 변덕스러운 호기심이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비추자 도토리 같은 캐릭터가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나래 크리에이티브에서 기획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대표 한보미입니다.’

캐릭터가 부끄러운 듯 인사하며 그녀의 음성과 싱크를 맞췄다.

‘……, 작은 손짓 하나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앱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그녀는 무척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 같았다. 재경은 마치 갑자기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처럼 영상에 빠져 들어갔다.

‘……. 그럼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들은 한보미를 만나면 나래토리를 외쳐 주세요. 시원한 아아를 쏘겠습니다. 춤추는 나래토리를 누르시면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감사합니다.’

캐릭터 나래토리가 걸어 나와 보미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간단한 회사소개와 이력을 겸한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재경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어? 쟤가 왜 왔지?”

가영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재경은 가영의 시선 끝에서 바로 전까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여자를 발견했다.

황민준 대표 저택의 대문을 빠져나오는 단발머리에 살구색 원피스를 입은 보미가 곤란한 듯 쇼핑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재경은 모르는 척 가영에게 물었다.

“알죠. 삼촌한테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애예요. 삼촌이 재혼도 안 하고 혼자 사니까 꼬리치다가 잘 안돼서 한동안 안 보이더니…….”

가영은 드디어 재경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것에 기뻐 활짝 웃었다.

“돈 떨어졌나 봐요.”

재경은 가영의 대답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보미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라고.

“황 대표님하고는 나이 차이가 꽤 있는 거로 아는데.”

“어머. 재경 오빠. 삼촌은 재력, 외모, 학벌이 되는데, 돈 노리고 덤비는 저런 애들이 나이를 신경 쓰겠어요? 당장 죽어갈 노인이면 더더욱 미쳐서 유산이라도 받으려고 살랑거릴걸요.”

“…….”

재경은 대꾸하기 싫은 듯 입을 다물었다.

남녀관계에 나이가 상관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어머니가 외국으로 간 후 소식이 끊겼던 친할머니 신미희도 할아버지와 스무 살은 차이가 났다. 할머니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은 6년 전이었다. 대체 어디 숨어 계신 걸까?

황민준 대표가 자기 딸뻘인 여자와 사귀든, 돈을 뜯기든 재경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단지 도원 유통과 함께 일하는 나래 크리에이티브의 대표가 황민준 대표의 애인이라면 이번 공개 모집의 공정성을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뻔뻔하게 그 난리를 쳐놓고, 또 삼촌을 찾아올지 몰랐네요.”

한보미가 한동안 안 보일 때는 속이 편하더니만, 또다시 성북동에 모습을 드러내자 가영의 속이 들끓었다. 가영은 어렸을 때부터 보미가 싫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애플리케이션으로 유명한 ZY 컴퍼니에 삼촌 백으로 취직은 한 모양인데, 낙하산이라 실력이 없으니 남의 기획을 훔쳤나 봐요. 그거 걸리고 창피하니까 사표 내고 사라졌죠.”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삼촌의 관심을 받는 게 눈꼴시었다.

황민준 대표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마흔이 넘어서 했던 결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 세월 가영의 엄마 황 여사가 동생인 황민준의 내조를 하며 안주인 역할을 하였다.

가영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기에 가영은 민준을 아빠같이 여겼다. 황 여사는 늘 이 집안의 재산은 모두 오빠와 가영의 것이라고 했다.

‘네 호적에 네 애도 아닌 애를 올리겠다고? 민준아. 너 미쳤니? 고년이 죽어서까지도 우리 집안을 망치려 하는구나.’

황민준이 어린 보미를 입양하려는 것을 황 여사가 맹렬히 반대한 것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돌아갈 몫이 적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이죠. 삼촌으로는 부족했는지 우리 오빠도 유혹하려고 밤에 방으로 불러들이고……. 어휴. 말하면 진짜 끝이 없어요. 능력도 없이 사고만 치고……. 저 쇼핑백 보세요. 또 무슨 명품을 뜯어낸 것인지.”

가영은 재경이 행여라도 보미에게 관심을 둘까 헐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런 애를 받아주다니 삼촌이 정말 보살이라니까요.”

“연가영 씨.”

“네. 재경 오빠.”

가영은 재경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도착했는데 이만 내리시죠.”

재경은 남의 험담을 쉬지 않고 하는 여자와 있는 것이 곤혹이었다.

한보미 대표에 관해서는 남의 이야기로 듣기보다 직접 알아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재경 오빠.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우리 다음엔 언제 만날까요?”

차에서 내린 가영이 운전석 창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굵게 웨이브 진 머리를 뒤로 넘기자 귀걸이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김 비서에게서 연락이 갈 겁니다.”

재경은 가영의 행동에는 관심이 없는 듯 눈으로는 보미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기다릴게요.”

가영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경도 역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말이 없었던 것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부끄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재경은 고급 주택가의 높은 담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 언덕을 내려가는 보미를 발견했다.

재경은 보미의 속도에 맞춰 차의 속도를 줄였다.

흔들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미가 준 명함에 나온 나래토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자기 같은 것만 만드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창을 내리고 그녀를 불러, 황민준 대표와 무슨 관계이며, 공개 모집에 부정이 있었는지 추궁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재경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톡톡 쳤다.

보미의 뒷모습이 멈칫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몸을 숙였다.

그녀를 미행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재경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나 순간 긴장했지만, 들켜서 곤란한 것은 황민준 대표의 사람이라는 걸 숨긴 보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발밑에는 흰털에 검은색 무늬의 턱시도 고양이가 있었다.

보미가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입술이 바쁘게 움직이며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힌다. 그녀의 하얀 다리에 몸을 비비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봄날의 햇볕같이 따뜻했다.

재경은 그 모습을 잠시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명함에서 봤던 영상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를 그녀의 옆에서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한보미 대표.”

어깨가 크게 들썩거리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재경을 만난 것에 놀란 듯 고양이랑 동시에 눈이 똥그랗게 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