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과거의 어느 날
002. 과거의 어느 날
주변이 소란스럽다.“34, 35, 36번 지원자…….”작은 소리로 시작해 이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기분좋은 잠을 자던 중 누군가 강제로 깨우는 듯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저항했다.“왜….”그 순간 이마에 가해지는 따끔한 충격에 눈이 떠졌다.아파!“뭐, 뭐야?”낯선 풍경. 그러나 어디선가 본 듯한 공간이다.“대기실?”주변에는 나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이 앉아 있다.많아 봐야 스물이나 되려나.‘이게 무슨.’더 이상한건.몸의 관절들을 굽혔다 폈다 반복했다.‘가볍다.’쑤시던 허리와 손바닥의 통증이 사라졌다.그렇구나. 이거 사후세계다.‘하, 씨. 신이라도 좀 믿을걸.’아니다. 주변에 어린 친구들이 많은 걸 보면 의외로 천국일지도 모른다.잠시 얼타고 있자,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오디션에 와서 졸다니. 배우로서 의식이 부족한 거야, 아니면 포기한 거야?”시선을 옮겨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니, 웬 여자가 옆에 앉아 있었다.“오디션?”영문을 모른 채 바라보는 나에게 여자는 대답했다.“졸길래 이마를 때려줬어. 따질 거라면 배우로서 자각이 부족한 본인을 탓해.”아니,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천재 배우 이세린?”이상하다. 이세린 배우랑 너무나도 닮은 얼굴이 눈앞에 있다. 이세린 배우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다.그럼 딸인가?안쓰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딸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어찌 됐든 안타깝네.”여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내가 천재배우인 것도 맞고 이세린도 맞지만 딸은 없어. 뭐가 안타까운 건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건 네 상태고.”“그럼, 네가 이세린 배우라고?”그녀는 차갑고 담백하게 대답했다.“그래.”혼란스럽다.내가 꿈을 꾸는 건가?분명 마지막을 맞이했던 순간 굉장히 괴로웠던 것 까진 기억이 난다.그 뒤로 죽지 않고 응급실에라도 실려가 바보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그때였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들려오는 또렷한 목소리.“도망가! 여기 있다가는 너까지 휘말려!”뭐지?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다.분명 이태륜 감독의 첫번 째 연극. <꽃은 진다>의 대사중 일부였다.‘하필이면 꽃은 진다냐.’<꽃은 진다>. 내가 고배를 마셨던 첫 오디션이었지.리메이크인가.그때 옆자리에서 본인을 이세린이라 주장하는 여자가 눈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형편없는 연기네.”그렇게 혹평할 정도인가. 그녀의 매정한 평가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이세린의 눈이 가늘어졌다.“뭐?”나는 시선을 문틈으로 한 번 옮겼다.방금 들린 대사.ㅡ도망가! 여기 있다가는 너까지 휘말려!“형편없다기보다는, 방향이 다른거지.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나름 방향을 다르게 잡아본 거 아닐까?”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지 이세린은 눈을 찌푸렸다.“정답이 정해져 있다니.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잠시 당황했다.나에게 오디션을 대하는 태도를 지적할 정도니, 당연히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꽤 유명한 일화인데 모르나보네.’훗날 이태륜 감독이 다큐에 나와 밝히기를, 저 대사에는 희생이라는 겉모습 뒤에, 실은 떠나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 숨어 있었다고 했었지.감독 스스로도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했으니, 이 속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이세린이 닥달했다.“네가 뱉은 말, 무슨 뜻인지 말해 봐.”이 년이 한참 나이 많은 어른한테 말하는 말본새 봐라….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이 이야기를 모른다면 설명하기 어렵다.그렇다면 연기로 보여주는 게 가장 편하긴 한데.‘한번 해볼까.’목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올려 대사를 뱉었다.“도망가! 여기 있다가는 너까지 휘말려!”어떠냐.내가 아무리 무명이어도 배우밥만 수십 년이라고.그리 생각하며 이세린을 바라보았다.“…기대해서 손해봤네.”못 볼꼴을 봤다는 듯한 표정이다.진짜 이세린배우는 아니라지만, 도플갱어 같은 그녀가 말하니 살짝 마음이 죽는다.“잘 표현하기 어렵네.”“됐어. 관심 없어졌으니까.”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리는 이세린.그 순간 댓글같이 생긴 것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이거 누구임?][누가 자동 업로드 켰냐???][ㅋㅋㅋㅋ 연기 뒤1지게 못하노][얘 누구임? 미치겠다 ㅋㅋㅋㅋㅋ]예…?당황하고 있던 찰나 눈에 들어온 한 댓글.[나쁘지 않았어.][목소리는 더 떨리게.][손은 완전히 올리는 게 아니라 내밀 듯 말 듯.][아련하게. 성대를 높여야지.][누구 앞에서라도. 진심을 다해 연기하란 말이야.]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하지만 정말 어이가 없는 건.저 말대로만 하면 더 멋진 연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해볼까.’낮게 숨을 삼켰다.
d3kza0VLSVdxajZ6L09aWC8xUnR2R2hXMkprdnVFQjY0NEp4aEtxUE0rcnhuUXJyYU1iNi9wVnRnTE9PVjgrKw
그리고 같은 대사를, 아주 조금만 다르게 내뱉었다.“도망가.”순간 이세린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너, 뭘 하는…….”이세린의 눈동자가 커졌다.더 떨리게.더 아련하게.이번에는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다시 나를 봐주길 바라는 아이처럼.대사를 뱉어냈다.“너까지 휘말릴지도 몰라.”“….”이세린은 침묵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놀라울 따름이었다.‘방금 그게 내가 한 연기라고?’내가 감탄하고 있자, 이세린이 나지막히 말했다.“부, 부끄러우니까 앉아.”그녀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오디션 참가자들이 이곳을 주목하고 있었다.“죄송하지만 대기실에서는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스탭의 말에 90도로 고개를 숙이고서는 서둘러 앉았다.“민망하네.”“그런 연기는 감독 앞에서나 보여주지 그래.”“하하….”기분 탓인가. 내내 차가웠던 이세린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 같다.이세린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대답했다.“그래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알았어.”고개를 끄덕이는 이세린.그녀에게 질문했다.“좋아. 연기를 했으니 값을 치러야지.”“뭐? 네 멋대로 해놓고 무슨소리야?”도도하기 그지없는 태도다.기죽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뭔데?”“이거 오디션. 감독이 누구야?”내 말에 이세린은 황당한 듯 되물었다.“너 알고 있는 게 뭐야.”“없어.”“자랑이야?”“그래서 누군데. 알려줘 봐. 꽃은 진다 리메이크라면 연극 쪽인가? 아니면 드라마?”내 말에 이세린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리메이크라니?”“맞잖아. 이태륜감독의 꽃은 진다 리메이크.”뭐지?분명 이태륜감독의 꽃은 진다 대본이었다. 내가 이걸 잊을 리가 없다.“이태륜 감독님 꽃은진다 오디션은 맞지만, 이 작품이 과거에 영상화된 적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걸.”순간 이세린의 말에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한 감각이 들었다.설마 했던 마음에 무시하고 있었다.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않은가.그럼에도 순간 참을 수 없는 기시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뭐, 뭐야? 갑자기 어딜 가?”이세린의 만류에도 거울을 찾아 주위를 둘러봤다.고깃집 열기에 늙어버린 피부 대신, 아직 앳된 청년의 모습.“혹시.”자신이 이세린이라 주장하는 그녀가 얼마나 까탈스럽게 말하는지는 관심 없었다.하지만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이세린의 손을 잡고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말해봐. 여기가 무슨 오디션장이지?”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듯 보였다.“지금 어느 오디션이냐니까?”“자, 자기가 보는 오디션이 뭔지도 까먹은 거야? 답도 없네. 몇번을 말해야 알겠어? 꽃은 진다의….”“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여기가 이태륜 감독의 첫 번째! 연극 데뷔작 [꽃은 진다]의 공개 오디션장이라는 거지?”그녀는 이내 당황한 듯 끄덕였다.“그래 맞아.”“지금 이건 꿈도, 저세상도 아니고?”“미안한데, 헛소리에 계속 대답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점점 선명해지는 말도 안 되는 한 가지 가능성.‘설마.’그제야 맑아진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약간 붐비는 듯한 좁은 공간.군데군데 낡은 소파와 접이식 의자가 뒤섞인 대기실.한쪽 벽엔 오디션 순서를 적은 A4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대사를 중얼거리는 배우 지망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헛웃음이 나왔다.왜 이제야 눈치챈 건지.나는 안다.아니, 알 수밖에 없다. 머릿속이 지끈거릴 정도로 선명하게 말이다.이 순간을, 이미 20년 전에도 겪었다.‘어떻게 잊겠냐.’내 인생의 갈림길이 되었던 첫 오디션.눈앞에는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감독이,내 양옆에는 미래의 천재배우들이 있었다.나는 그들의 빛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 줄 배경이었고,그 사실을 깨달은 날.내게는 그들이 가진 재능의 한 줌도 없었다는 걸 알았기에, 노력에 모든 걸 바치기로 했던 과거의 어느 날.그 과거의 날이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