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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반짝임

엑스트라의 2회차는 괴물 배우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005. 반짝임

이 풍경 속에 서자, 머릿속에 막혀 있던 것이 물꼬를 튼 듯 터져 나왔다.‘그렇구나.’지금까지 나는 <꽃은 진다>의 핵심 감정을 ‘슬픔’이라고만 생각했다.민우는 극 중 가장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이다.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면서도,여전히 붓을 놓지 못하는 미련한 남자.나는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 생각에만 매달렸다.김찬욱은 자신의 매력적인 마스크를 이용해 그 슬픔을 더욱 애절하게 포장했다.이세린의 연기는?흠잡을 데 없었다. 완벽했다. 누구도 그 연기를 비난할 수 없겠지.하지만.‘그건 슬픔을 연기한 거지.’깨닫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명확해졌다.[두려움]<꽃은 진다>의 민우는 사랑하는 연인 하랑을 잃고 슬퍼한다.그럼에도 미련하게 재능 없는 그림을 포기하지 못하고 붓을 잡는다.하지만 그게 전부일 리 없다.그는 재능 없는 ‘그림’에 목숨을 걸었다.하랑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그럼에도 끝내 캔버스에 붓을 놓지 않았다.<꽃은 진다>에서 민우가 끝까지 붓을 놓지 않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그저 계속해서 캔버스에 붓질을 할 뿐이다.하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민우가 붓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분명.눈앞을 보자, 캔버스에는 아름다운 하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있었던 건 하랑이었구나.’붓을 놓지 못한 이유.포기하지 못한 이유.그건 후회도 슬픔도 아니다.그때 느끼는 감정은의외로 두려움이었다.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두렵다.’지금, 이 붓을 놓는 순간,그동안의 모든 선택이,자신이 외면했던 사랑이,모두 무의미해진다는 두려움.그건 결코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리고,그 감정만큼은—‘나는 누구보다도 잘 연기할 수 있다.’나는 두려움에 떠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김도윤의 대사와 동시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이태륜 감독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자기 눈은 정확하다 믿었다. 오디션 신청 영상으로 보았던 김도윤은 저런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무슨….”대사조차 필요 없었다.눈빛은 깊은 절망에 빠진 듯 시커멓고, 미세하게 떨리는 턱선,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까지.이태륜 감독이 상상하던 민우가 현실에 보이는 듯했다.‘이러면 마치….’이태륜 감독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세린의 탄식이 흘러나왔다.“어떻게.”저 천재 소녀조차 숨을 죽였다. 그녀 역시 느꼈을 감정. 김도윤의 연기가 그저 모방이나 해석이 아니었다는 것.머릿속으로 막연히 그리고 있던 장면을 들여다보여진 듯한 감각.‘어째서지?’자신이 보고 있는 김도윤이라는 배우.그에게는 여전히 재능의 티끌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런데도.“저 김도윤이란 학생….”“응, 눈이 가는 건 아닌데 말이야.”“오히려 너무 괴로워 보여서 제대로 못 보겠어요. 근데 왜 눈을 뗄 수가 없을까요.”관객을 압도하는 빛은 없다.아름다운 외모도, 아우라도 없다.그런데 방안의 누구도 김도윤이라는 배우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었다.배우 김도윤의 연기는 극도로 현실적이고, 절실했다.‘재능은 보이지 않는데. 저 표현은 뭐지?’윤송이 작가는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금… 뭔가를 그리고 있는 거죠? 대본에는 없던 행동인데.”“그래. 그리고 그건 아마도….”이태륜 감독이 정확히 원했던 장면.자신조차 언어로 뱉지 못한 감정선이 김도윤의 연기 안에 있었다.“꽃은… 졌다.”김도윤이 마지막 대사와 함께 손에 쥐고 있는 붓을 떨어뜨렸다.방 안에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감사합니다.”감독의 의도가 배우에게 흘러 들어간 듯한 기묘한 감각.이태륜은 그제야 깨달았다.재능의 빛이 아니다.압도적인 연습량이, 올바른 이해를 만났을 때의 포텐.그리고 갈망이 만들어낸 연기였다.***오디션이 끝났는데도 정신이 멍하다.막혀 있던 혈이 확 트인 기분이었다.연기를 마친 후의 탈력감과는 다른, 낯선 흥분.‘이게, 민우가 본 풍경이었나.’마치 완성된 영화 속에서 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이게 이태륜 감독의 기준이라면 내가 20년 전엔 혹평을 들어도 당연했다.다행인 건 이번엔 최소한 그런 반응은 아니었다는 거다.이태륜 감독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주변 스태프들의 술렁임은 똑똑히 들렸다.나쁘지 않았다는 거겠지.게다가.[<꽃은 진다> #4 씬 리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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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다시금 떠오르는 푸른 창.처음에는, 이 능력을 환상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조금 전 오디션에서, 본 풍경은 분명 이태륜 감독이 상상했을 장면이었다.그리고 무엇보다 대본박이….라는 사람의 댓글.그 댓글이 없었다면 분명 불가능한 연기였다.‘확실히 그냥 환상은 아니라는 건가.’푸른 창의 커뮤니티는 아무래도 내 연기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모양이었다.-뉴비 방금 뭐냐? [5]-어떻게 했노???? [2]-정말 잘했어. 자랑스러워 [3]-라스카상 3회 연속 수상자인 본인도 기립 박수 침 [21]-도내 S급 뉴비 ㅋㅋㅋㅋ [12]그리고 가장 댓글이 많이 달린 게시글이 이것.-뉴비 첫 오디션 [41]아무래도 자동 업로드로 올라간 내 게시글인 모양이었다.“댓글이 41개인가.”조금 떨린다.내 연기에 이렇게나 반응이 많은 적이 있었던가.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게시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보았다. [제목 : 뉴비 첫 오디션] 게시글에는 짧은 제목과 함께 방금의 오디션 영상이 올라가 있었다. [댓글] [연기 개 야하네 ㅋㅋㅋㅋㅋㅋㅋ][드큘라 : 라스카 상 3회 수상자인 본인이 보았을 때에는 조금 아쉽군. 그래도 신입치고는 나쁘지 않았다네.]└[딸피의 인정은 안 받는다는데요?][룬나 :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동했어. 정말 잘하더라.]└[아니 눈ㄴ나 진짜 왜 얘한테만 이렇게 다정한 건데? 나 미쳐버릴 것 같아.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는 호감고닉 드큘라님이고 좋아하는 영화는 드큘라님 주연 드큘라 백작이야.]└[그건 영화배우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데?]└[역시 스토킹은 드평 ㅋㅋㅋㅋ]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기에는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반응들이 아니다.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명 한 명 모두 사람이라고 봐야겠지.그보다 눈에 띄는 닉네임들이 보인다.왜 인지 굉장히 친절하게 말해주던 [룬나] 그리고.[대본박이 : 한 번에 이해했네? 장하다 뉴비야]중요한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걸 알려준 [대본박이].‘감사의 인사라도 남기고 싶은데 어떻게 쓰는 거지?’고민하고 있을 때 눈앞에 창이 하나 더 나타났다.-띠링 [수익금 정산] -출연료 200pt -최종 금액 변화 +200pt ‘수익금이라고?’ [해당 포인트는 배우 갤러리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출연료의 단위는 pt라. 포인트의 약자인가?아마도 내 연기에 따라서 출연료가 책정되는 모양이다.다시금 푸른 창을 바라보았다.‘그보다 감사인사를 남겨야 하긴 하는데.’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온몸의 탈력감 탓에 당장 쉬고 싶은 기분이다.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기분 좋네.”얼마 만에 받아본 호평일까.이렇게나 기분 좋은 거였구나.빰을 가볍게 후렸다.“정신 차리자.”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모든 걸 쏟아붓고 끝내자고 다짐했다.진심을 담았고 후회는 없다.이제 와서 이런 능력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그렇게 자신을 타일렀음에도 흥분감은 가시지 않았다.‘……역시 재밌네.’다짐조차 흐려지는 기분.그래도 연기는 정말 이게 마지막이다.더는 후회하지 않겠다.***대기실 구석, 짐을 정리하던 이세린이 눈에 들어왔다.매니저가 밖에서 기다리는지, 서두르는 모습이다.‘인사 정도는 해도 되겠지.’어떤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깨워준 고마움을 전하려고 다가갔다.“이세린 대배우님.”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부르자.“흐윽!”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보는 그녀.“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미안.”이세린이 이쪽을 노려봤다.“무슨 일이야?”“아까 깨워줘서 고맙단 말 하려고.”“그냥 내 신경에 거슬려서 깨웠을 뿐이야.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툭 내뱉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진심이다.그대로 계속 잤다가는 20년을 시원하게 털어낼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내 미소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아까 연기.”응? 그러고 보니 그 이세린 배우가 내 연기를 보고 있었던 거네.체감하고 있지 못했는데 꿈같은 일이었다.“혹평이라도 괜찮아. 듣고 싶어.”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녀의 말은 의외였다.“혹평이라니. 너 지금 비꼬는 거야?”“응?”평가도 아깝다는 걸까.나름대로 모든 걸 쏟아부은 연기였는데 말이다.“…됐어.”이세린은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그보다 너 아역배우 출신이었어? 분명 들어본 적 없는데.”“한 두 작품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은 있었지.”예전에 그녀와 같은 작품에 나간 적도 있다.이세린은 여주인공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꼬마 5’ 였지만.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가.“잠깐. 그게 다라고?”이세린의 얼굴에 미묘한 당혹감이 보였다.“그것 말고는 열심히 연습했지. 복습도 하고, 필기도 하고.”응, 20년간의 단역 생활 동안 죽어라 했었지. 진짜로 죽어라 말이다.“연습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방법이 없잖아. 너처럼 매소드 연기도 못하고, 김찬욱처럼 얼굴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노력하는 수밖에.”매소드라는 말에 이세린의 인상이 조금 어두워졌다.“네가 메소드를 못한다니. 그럼 아까 했던건 뭔데?”이상하다. 아까부터 말이 잘 맞지 않는다.아!“혹시 이세린 대배우님이 제 연기를 칭찬해 주시고 계신 건가요?”내 흥분 섞인 질문에 이세린은 당황한 듯 대답했다.“뭐?”“그랬나. 내 연기가 별로였다는 거구나.”내가 풀이 죽은 척 하자 이세린은 말을 더듬었다.“아니, 안 좋았다는 게 아니고….”아, 이거 조금 재밌다.이세린은 괜히 말을 꺼냈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됐어, 그냥 생각해 볼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이세린 배우에게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죽을 때까지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아니, 이미 한번 죽었으니까 듣는 건가.“됐어, 다음엔 그런 일 없을 테니까.”“다음?”내 말에 그녀는 긴 흑발을 찰랑이며 고개를 돌렸다.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리허설 때 볼 거 아니야.”“아.”아무래도 이세린 대배우님은 내가 캐스팅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언제까지 보실 생각이에요.”윤송이 작가의 불평에도 이태륜 감독은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조금만 더 보자고.”“끝나고 회식하자고 하셨잖아요.”오디션은 이미 끝난 지 한참.그럼에도 이태륜 감독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또 그 장면이네요. 안 질려요?.”“어딘가 석연치 않지?”“뭐가요?”“형편없잖아.”모니터에는 김도윤의 온라인 오디션 지원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뻣뻣한 몸, 불안정한 발성, 군데군데 끊기는 호흡.전형적인 초보 배우의 모습이었다.“테크닉도 부족하고 감정도 못 잡고 대사는 날아가고.”“긴장해서 그렇겠죠. 오디션 영상이잖아요.”“오디션 지원 영상에는 가장 잘한 걸 내겠지. 그래서 이게 최선이라는 거잖아. 근데, 누가 최선을 이딴 식으로 내?”윤송이 작가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실전에 강한 타입일까요?”“그런 타입이 있긴 하지. 그래서 불러본 거고. 그런데 말이다.”이태륜 감독이 탁, 키보드를 눌러 다른 영상을 띄웠다.“이거 봐라.”“아까 김도윤 지원자 오디션 때 영상이네요?”“그래. 이상하지 않냐?”“잘하네요.”이태륜감독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잘한다고? 이건 너무 잘하잖아. 몸의 텐션, 시선 처리, 감정의 리듬, 또렷한 발성. 테크닉이 이제 막 아역을 벗어난 배우가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디서 뭐 하던 놈인지.”“현장경험은 없을걸요?”윤송이 작가가 지원자 서류를 뒤적거렸다.“응, 그러네요. 학력도, 소속도 없어요. 아역 경력 몇 줄이 전부예요.”“거짓말이지. 저 나이에 단역 몇 번으론 절대 불가능해.수십 번, 수백 번, 바닥부터 깔고 쌓아 올린 감각이다.”윤송이 작가는 헛웃음을 지었다.“그 나이에 수백 번 무대에 섰으면, 이미 이름 좀 알려졌겠죠. 김찬욱보다 더 유명했을걸요?”“그래. 뭐, 그건 그렇다 쳐. 연습으로 깎을 수 있는 부분이니까.”이태륜은 잠시 영상을 멈췄다.모니터 속, 김도윤은 조용히 붓을 든 채 허공에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아무것도 없을 터,그런데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윤작가는 저게 연기로 보여?”“……”“덜떨어진 오디션 영상을 보낸 놈이 갑자기 왜 이 장면에선 완전히 달라졌지? 난 이해가 안 간다.”“코칭이라도 받았나 보죠.”“그런 선생이 있다면 내가 얼마를 써서라도 모셔다가 함께 작업했을 거다.”미묘한 당혹감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 목소리에 윤송이 작가가 물었다.“그럼 저 애를 민우역으로 캐스팅하시려고요?”“아니.”“뭐예요? 방금까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이번 연극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흥행시켜야 해. 김찬욱을 쓰는 게 안정적이지.”“결국 실력이 아니라 흥행이에요? 감독님답지 않네요.”“허! 내가 그럴 거라 생각해 윤작가?”윤송이 작가의 눈에도 이태륜 감독이 흥행을 위해 배우를 뽑을 것 같지는 않았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감독님은 안 그러겠죠. 좀 타협도 필요한 법인데.”“다른 건 몰라도 배우에서 타협하면 감독은 그걸로 끝이야.”이태륜은 손끝으로 눈가를 문질렀다.“내 눈은 말이야 틀린 적이 없어. 난 여태 이 눈을 믿고 작업해 왔어.”“그 눈이 뭐라 말했는데요?”윤작가의 물음에 이태륜 감독이 대답했다.“이세린과 김찬욱한테는 보였던 반짝임이 김도윤한테는 안 보였다. 그것뿐이야.”그 말에 윤송이 작가가 약간 아쉽다는 듯 말했다.“그럼 그 애는 안 쓰는 거예요?”이태륜 감독은 대답 대신 책상을 조용히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조연 정도면 쓸 만하려나.”탁-다시 재생된 영상 속,이름 모를 신인 배우가, 여전히 허공을 향해 그리고 있었다.그 장면은, 자신의 눈을 맹신하던 이태륜의 가슴 한 구석을 기묘하게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