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첫 리허설
008. 첫 리허설
<꽃은 진다>의 리허설 현장에 도착했다.“이제야 캐스팅됐다는 실감이 좀 나네.”가장 깔끔한 외출복을 입고 왔다.오디션 때마다 입었던, 나름의 승부복이었다.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지만, 엉덩이와 무릎 부분이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수없이 돌려 입은 흔적.‘이걸 입고가라 할 줄이야.’오늘 내가 맡을 역할에는, 이 옷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라는 배우갤러리의 조언이 있었다.주인공 민우 역은 예상대로 김찬욱에게 돌아갔다.대신 나는 민우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그의 재능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가난한 조각가 ‘상철’역에 캐스팅 되었다.비중은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으나, 결코 단역이나 보조연기자와는 다른 ‘조연’.가슴이 벅차올랐다.대사 한두 마디 하고 사라지는 행인1, 주인공 뒤를 멀찍이 지나가는 동네 청년4 같은 역할이 아니란 말이다. 이름이 있고, 서사가 있고, 극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조연’! 수십 시간을 쏟아부어 분석하고 연습해도, 카메라 앞에서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2분 남짓. 그마저도 편집 과정에서 통째로 날아가기에 십상이었던 지난 20년.‘다르다, 다르다는 말이다!’비록 드라마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 아니, 최고가 될 예정인 감독 이태륜의 연극에, 나는 정식 배우로 참여하게 된 거다.‘갤러리’ 제목 : 배역 확정됐습니다!!글쓴이 : 괴물 신인 보조출연자 아니고 조연입니다! 첫 배역이라 너무 기쁩니다…. 댓글 [나 뉴비때문에 정신 나갈 것 같아][조연받고 기뻐하기는 진짜 초식이 다르네 ㅋㅋㅋㅋㅋㅋㅋㅋ]└[본인도 우리 물괴한테 벽느꼈다ㅋㅋㅋㅋㅋㅋㅋ]└[드큘라 : 너희는 조연을 한 적이 없었나? 남을 비웃지 말도록.]└[없는데???]└[첫 작부터 주인공으로 시작했는데요??]└[역시 조연사랑은 드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드큘라님 조연이면 대사 몇줄임? 진짜 모름]└[뒷통수 한 대 맞는 장면 대사 7줄(으악하는 비명 소리 까지 포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괴물 신인이 아니라 조연신인이었네ㅋㅋㅋㅋㅋ]└[뉴비한테 나쁜말 하지 말아라 씨1ㅂ]너무 기뻐서 갤러리에 글을 썼다가 웃음벨이 되었긴 했지만 말이다.뭐 어떤가!흥분을 가라앉히고 가져온 가방을 내려두었다. “아직 도착한 사람은 없나.”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텅 빈 객석처럼 무대 위에도 아직 인기척은 없었다. ‘두 시간이나 일찍 왔으니.’이건 회귀 전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현장에 일찍 도착하면 분위기에 익숙해질 시간도 벌고, 혹시나 마주칠 스태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결국은 아무 의미 없었지만.”무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낡은 화구 가방을 꺼냈다. 어젯밤 상철이라면 어떤 화구를 썼을까 고민하며 준비한 소품이었다.갤러리에 글작성 버튼을 오늘 새벽에야 알아냈기 때문에 내가 준비한 소품을 배우갤에 물어보지는 못했다.정식 소품도 아니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그래도 한번 올려나 볼까.’ 제목 : 제가 직접 준비한 소품인데 어떤가요?작성자 : 괴물 신인 소품.jpg글을 올리기 무섭게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댓글 [어디서 주워왔냐 ㅋㅋㅋㅋㅋ][뉴비 쓰레기통 털었네…][저거 냄새나냐? 솔직히 말해라][소품 챙겨가라니까 쓰레기를 챙겨가네…]역시. 고인물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수거함에서 뒤져 온 거라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까지 알아챈 모양이었다.[괴물 신인 : 네! 진짜 화구를 사기에는 돈이 없었는데 마침 분리수거함에 있길래 주워왔어요 나쁘지 않죠?]순간 불어나던 댓글창에 정적이 흘렀다.[뭐임?][뉴비야 쓰레기 줍고 다니지 마라ㅅㅂ…][괴물 신인 아니고 길거리 신인이었구나][방금까지 놀리던 새끼들 다 어디 갔냐ㅋㅋㅋㅋ]이제 나도 이게 WWE 놀리기라는 걸 안다.[괴물 신인 : 그래도 괜찮지 않아요?]└[대본박이 :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니가 새벽에 올린 대본대로면 나쁘지 않긴 함]└[ㅇㅇ 그거 써. 리허설이어도 있는 게 나음]└[괜찮긴 한데 냄새나면 좀 씻어라…]역시 말투는 저렴해도 다들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다.그리 생각하고 있자, 눈에 들어오는 댓글 하나가 달렸다.[드큘라 : 흠. 내 주변에 화가들이 많아서 잘 알지. 가난한 화가들은 팔레트 위에 물감을 버리지 않고 말려서 다시 물에 풀어 사용하곤 하지. 그래서 팔레트가 깨끗하지 않고 여러 겹 쌓여있어. 네가 가져온 팔레트를 보니 고학생이 쓰다 버린 것 같군. 운이 좋았네 신인]└[르네상스 뜰딱은 드평 ㄷㄷㄷ]└[역시 연기 빼고 다 잘하는 드평]고학생이 버린 팔레트인가.‘드큘라’씨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화구를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노력 끝에 빛을 보아서 버린걸까.아니라면 재능의 벽에 막혀 포기한걸까.어느 쪽이든 분명 상철이라면 이런 화구를 썼을 거다.[괴물 신인 : 다들 감사드립니다! 첫 리허설 잘 마치고 오겠습니다!]└[어 잘하고 와라]└[룬나 : 첫 리허설이구나. 잘하고 와. 응원할게]└[마리는 공쥬 : 본녀는 공주라 리허설 같은 건 없어서 잘 모르겠구나. 그래도 말이 통하는 천것은 오랜만이니. 어디, 잘 해보거라.]└[@마리는 공쥬 자신이 공주인 줄 아는 정신병자]└[뉴비야 제발 자동업로드 끄지 말아줘]└[부탁한다. 니 연기 보는 낙에 산다]└[배우갤의 보배…]└[배우갤의 빛…]└[배우갤의 웃음벨…]짧은 감사 인사를 달자 답글이 우수수 달렸다.‘마리는 공주와 드큘라씨는 언제나 까이고 있네….’캐릭터성이 너무 강한 탓에 눈에 띄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좋아,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배우 갤러리를 닫았다.“가보자.”무대 위에 선 채 대본을 펼쳐 상철의 동선과 대사를 다시 한번 체크하기 시작했다.“아마, 첫 등장은 이쪽에서. 민우를 발견하고 다가가는 느낌이려나.”천천히 무대 중앙을 향해 걸었다.첫 리허설이다.당연하게도 연출팀의 디렉팅을 받은 적이 없기에 정확한 동선은 알 수 없다.‘그래도 어깨너머 봐온 게 있지.’아무리 단역이라도 20년간 매번 일찍 도착해 스태프들을 도와왔었다.그렇기에 현장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어떤 동선이 자연스러운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게다가 갤러리에서 리허설 대본을 한번 검토받으며 물어본 내용이다. 거의 확실하겠지.“이쯤이려나.”대본의 지문과 대사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림은 그려졌다.감독이, 연출팀이 어떤 움직임을 원할지는 어렴풋이라도 예상할 수 있다.화구 가방에서 낡은 붓을 들어 올렸다.***윤송이 작가는 이태륜 감독을 향해 투덜거리듯 말했다.“리허설 시간 9시 아니었어요? 근데 왜 7시부터 사람을 부르시는 거예요.”어째서 드라마 작가일 터인 자신이 새벽부터 리허설 현장에 참여해야 하는 가에 불만을 가진 듯 보였다.“윤작가 시간도 널널하잖아.”“그건 그렇긴 한데.”“이것도 다 경험이야. 윤작가 입봉작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줄 거라니까?”“…감독님 이상한 라임 넣지 말아요.”툴툴거리긴 했으나 이태륜 작가의 말대로 어디서 영감을 받을지 모르는 게 작가라는 직업이다.그리고 기본적으로 마감에 쫓겨 쪽대본을 써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드라마 작업보다는, 연극 각색 쪽이 훨씬 시간상으로 여유로운 것도 사실이었다.“뭐, 궁금하긴 했어요. 이세린 배우랑 김찬욱 배우 케미도 실제로 보고 싶기도 하고.”“윤작가의 그런 열정이 좋아. 배우 보는 눈도 점점 생기는 것 같고.”“그렇죠? 이참에 감독이나 할까요?”“아니, 윤작가는 작가가 맞아.”“왜요!”자신이 각색한 하랑과 민우의 역에 딱 맞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는 생각에 윤송이 작가도 아주 보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근데 왜 도윤인가. 왜 그 애를 상철 역으로 쓴 거예요?”오디션 때 잠깐 보여준 연기가 정말 우연히 터진 고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렇기에 안정적인 흥행 카드인 김찬욱을 민우 역에 캐스팅한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럴 거라면 왜 하필 조연인 상철 역에, 검증되지 않은 신인 김도윤을 쓴 걸까.“조연 정도면 연기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래도 상철이면 나름 주연급인데···.”“마스크가 딱 좋잖아.”“좋아요? 저게? 나름 잘생기긴 했지만, 김찬욱 배우에 비해서는 아니지 않아요?”이태륜 감독이 미소 지었다.“그래서 좋은 거야. 마스크에서부터 현장감이 나오잖아. 가난한 고시생은 그렇게 생겼어야지.”“그런가…?”이태륜 감독은 입을 닫았다.거짓말은 아니었다.마스크 자체는 자신이 상상하던 상철과 비슷했다.다만, 오디션 영상의 연기가 너무 처참해서 뽑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신경 쓰기 싫은데 말이지.’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은 날로부터, 자신의 ‘반짝임을 보는 눈’을 의심하게 만든 배우는 처음이었다.그 의심을 지우고 싶었다.“뭐, 보면 알겠지.” 그렇게 말하며 이태륜 감독이 리허설무대의 문을 열었다.“아무도 없는 무대라는 거 은근히 으스스하네요.”“그런 법이지.”“그보다 아직 스태프들도 도착 안 했는데…… 감독님 제 말 듣고 있어요?”윤송이 작가는 갑자기 조용해진 이태륜 감독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뭐예요, 아무도 없는데…… 어라?” 아무도 없을 터인 무대의 중앙에서, 누군가 낡은 붓을 들고 있었다.“김도윤 배…으읍!”김도윤을 향해 인사하려는 윤송이 작가의 입을 이태륜이 가로막았다.“아잇! 이 아저씨가! 왜 그러는데요?”“조용히 있어봐.”이태륜의 진지한 모습에 둘은 말없이 무대를 바라보았다.평범하게 연기를 펼치고 있는 김도윤. 분명 오늘 리허설하기로 했던 부분이었다.윤송이 작가는 한참을 바라보다 무언가에 이상함을 느꼈다. “어 저거? 아직 소품팀 도착 안 하지 않았어요?”“당연하지. 우리밖에 없어.”“혼자 연습해 오려고 준비해 온 건가?”윤송이 작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켜보던 중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어, 근데 저거 꽤···.”“알겠냐?”김도윤이 들고 있는 화구 가방과 붓. 소품팀이 준비했던 것보다도 훨씬 현실감 있는 모습이었다.그 차이를 윤송이 작가는 깨달았다는 듯 자신이 쓴 대본을 펼쳐 훑었다.“아! 그러네요. 확실히. 상철이라면 저게 더 어울리겠네.”가난한 고학생 상철.학비도 제대로 마련하기 힘든 상철이 말끔한 새 붓을 사용할 리 없었다.부러진 걸 억지로 테이프로 붙인 것부터, 물감이 굳은 팔레트, 군데군데 모가 빠진 오래된 붓.가난하지만, 노력파인 상철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윤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뜨끔했다.‘조연이라 별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주인공 민우도 아니고, 그 주변 인물의 소품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설마 그걸 무명 신인배우에게 지적당할 줄이야.“감독님 말대로 작가도 현장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네요.”이태륜 감독은 어딘가 언짢은 얼굴로 대답했다.“몰라. 더 봐야 알 것 같은데.”“뭐예요. 이 사람 아직도 이러네.”저번처럼 이태륜 자기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연기가 이번은 보이지 않는다.‘연습이라 그런 건가. 아니면 역시···.’자연스러운 연기, 그러나 저번과는 분명 달랐다.그리 생각하던 중 이태륜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윤송이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다.“윤작가, 대본 좀.”“아, 네.”이태륜은 윤송이 작가가 내민 대본을 훑었다.“이거……”이태륜 감독이 말하려던 중, 연출팀 스태프 몇 명이 들어왔다.“안녕하십니까.”“어.”이태륜 감독은 짧게 대답하고서는 다시 무대를 바라보려던 때였다.스태프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아, 저런 의욕만 넘치는 신인들이 가끔 있다니까.”“그니까. 어차피 동선이랑 블로킹은 우리가 다 짜주는 건데. 혼자 해봤자 시간 낭비지.”신인 배우의 과한 열정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듯한 태도.그 말에 윤송이 작가가 껴들었다.“뭐, 어때요. 열심히 하면 좋죠.”“에이, 윤작가님이 뭘 몰라서 그럽니다. 저러다 괜히 쓸데없는 동선이 기억에 남으면 고생하는 건 우리라니까요.”그때, 연습실 문이 다시 열렸다.도도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이세린. 그녀 역시 무대 위의 김도윤을 발견한 듯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의아하다는 표정.“그냥 막 움직이는 게 아닌데요?”“네? 누군데 저 배우가…… 어? 이세린 배우님!”연출팀 스태프가 뒤늦게 이세린을 알아보고 말을 더듬었다. 어리다고 하나, 이미 아역 시절부터 배우 경력만 10년이 넘은 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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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년 차에 접어드는 자신들보다는 한참 보는 눈이 다를 터였다.“그, 그런가?”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스태프의 표정.이태륜 감독은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그리고서는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쯧, 연출팀이라는 놈들이, 보고도 모르겠냐.”이태륜 감독은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뭐해, 일 안 할 거야? 가서 동선 따라니까.”“예?”스태프가 당황한 듯 되묻자 이태륜 감독이 소리쳤다.“못 들었어? 저게 맞는 동선이니까 수정하라고. 내가 하리?”“아, 아닙니다!”이태륜 감독은 스태프가 뛰어간 무대 위 김도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속을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