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우진이 좀 놔줘
1. 우리 우진이 좀 놔줘
“가을아!”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대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은 멈칫했다.
반갑지 않은 인물이 찾아왔다.
한때 반가웠으나 지금은 아닌.
오늘도 정시 출근은 그른 것 같다.
이 시간에 찾아온 건 저를 꼭 만나고 말겠다는 뜻일 테니.
사장이 썩은 얼굴로 또 지각이냐고 딱딱거릴 게 눈에 선했다.
가을은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렀다.
현관을 나와 단 세 걸음이면 대문이다.
단 세 걸음 너비의 마당이라도 있을 건 다 있다.
할머니가 정성 들여 가꾼 화단도, 식재료를 공급하는 텃밭도.
가을의 출퇴근 수단인 자전거도 마당에 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가을이 대문을 열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대문 앞엔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우진의 엄마가 서 있다.
“미안해. 너무 이른 시간이지? 그렇지만 널 꼭 만나야 해서…… 네 얼굴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
그렇긴 하지. 투잡, 스리잡을 뛰다 보니 같은 동네에 살아도 제 얼굴을 보는 게 힘들 것이다.
그뿐 아니지. 사는 곳이 다르니 마주칠 일이 없다.
동네 이름은 같아도 우진 엄마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가을이 사는 낡은 주택 밀집 지역 사이엔 먼 거리가 존재한다.
“들어오세요.”
가을은 우진 엄마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누가 왔니?”
기척을 느꼈는지 할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현관 앞에 서 있는 우진 엄마를 본 할머니의 얼굴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안녕하세요, 가을 할머니? 제가 너무 일찍 찾아왔죠?”
“아, 우진 엄마, 오랜만이네요. 어쩐 일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대요. 제 방에서 얘기할게요. 할머닌 안 나오셔도 돼요.”
가을은 머뭇거리는 할머니의 등을 떠밀었다.
우진 엄마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아니까. 저만 힘들면 되지, 할머니까지 힘들 건 없지 않나.
하지만 할머니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손녀가 혼자 힘든 얘기를 듣는 게 싫은 거다.
“할머니, 잠깐이면 돼요. 가을이 길게 붙잡아 놓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할머니는 우진 엄마의 재촉을 받고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도 내키지 않는 듯 몇 번이나 우진 엄마와 가을을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까지 확인하고 가을은 제 방문을 열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좁은 방이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가을이 전등 스위치를 올리고 비켜서자 우진 엄마가 들어왔다.
“가을아!”
우진 엄마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가을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제발 부탁해. 우리 우진이 좀 놔줘. 그게 너도 살고 우진이도 사는 길이야.”
가을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제가 우진이를 안 놔주면 우진이도 죽고 저도 죽는다니.
“어차피 너희 둘은 안 된다는 거 너도 알잖니? 너희에겐 함께할 미래가 없어. 그런데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나도 네게 이런 말 하는 내가 싫다. 그렇지만 앞길이 구만리인 너희가 서로에게 독이 되는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구나.”
“아줌마, 우진이와 저 헤어졌어요.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우진이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했어요. 난 너에 대한 마음 정리했으니 너도 마음 정리하라고요.”
가을이 힘겹게 입을 떼 말했다. 같은 말을 듣고, 같은 말을 하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우진 엄마는 잊힐 만하면 전화하거나 찾아와 우진이와 헤어져 달라고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애 때부터 우진을 알고 지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한 유치원, 한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성이라는 걸 의식하게 됐고. 대학 입학식 날 우진이 고백했다. 그날부터 우진은 가을의 남자친구가 됐다.
“확실하게 말했니? 우진이에 대한 미련 조금도 없다고?”
“네, 확실하게 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도 했어요.”
“그런데도 우진인 왜 그러는 거니? 우진이가 한국에 돌아오겠대. 네가 미국에 못 오니 자기가 한국에 와야겠대. 미국에서 경력 쌓는 건 포기하겠단다. 지도교수가 우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지? 그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잖아. 그런 사람이 우진일 밀어주고 있는데, 그걸 다 버리고 한국에 오겠단다.”
우진 엄마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가을은 우진 엄마에게 공감했다.
저도 우진이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저 때문이라니 더더욱.
“다시 한번 물을게. 가을아 너 정말 미국 가지 않을래? 모든 거 털어 버리고 우진이랑 둘이 공부하면서 살지 않을래?”
우진의 엄마가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가을에겐 유혹적인 눈빛이고 제안이었다.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날 만큼.
가을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처음 받는 제안도 아니었으니 제가 내놓을 답도 알고 있다.
“할머니와 겨울이 두곤 못 가는 거 아시잖아요. 겨울이 대학도 가야 하고. 할머니도 연로하셔서 언제까지 일하실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 그들을 가을이 책임져야 한다. 이젠 가을이 이 집 가장이니까.
그건 우진 엄마도 알고 있다. 알고서 저러는 거다.
우진 엄마와 가을 사이엔 같은 대화가 벌써 몇 번이나 오갔었다.
그런데 오늘은 거기에 가을도 예상치 못한 일이 추가되었다.
가을의 대답을 들은 우진 엄마가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은 것이다.
그 순간, 가을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아, 아줌마,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가을아, 나 좀 살자. 내겐 우진이 하나뿐이야. 너도 알지? 내가 우진이만 보고 사는 거.”
우진 엄마는 무릎을 꿇고서도 가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가을이 몇 차례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우진 엄마는 그 손을 더 꼭 붙들었다.
가을은 그 손을 떨쳐버리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달라진 게 뭔데요?”
가을이 억눌린 음성으로 물었다. 그걸 들은 우진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진이와 저 사귀는 거 아줌마도 좋아하셨잖아요. 우리 사귀기로 했다는 말 듣고 아줌마가 파티 열자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때랑 달라진 게 뭐예요, 아줌마? 우리 집이 망한 거? 아빠 돌아가신 거? 제 생각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이젠 제가 우진이에게 독이 돼 버렸네요.”
우진 엄마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가을의 손을 놓고 눈물을 닦았다.
그러곤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켰다.
“그래, 그게 달라졌지. 그것 때문에 넌 이제 우진이에게 짐이 됐고. 아니, 짐이면 다행이지, 장애물이 됐어. 우리 우진이 발목을 붙잡는 존재. 네가 지금 그런 존재라고. 우진이와 함께 발전하는 길을 열어 주겠다고 해도 싫다, 헤어지는 것도 싫다, 그러고도 네가 우진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니니?”
우진 엄마가 자분자분 모진 말을 토해냈다.
차라리 우진 엄마가 언성을 높였으면 가을도 상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가을의 가슴에 대못 박는 말을 그녀는 사정 조로 했다.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절박하게.
“헤어지기 싫은 거 아니라니까요. 저 우진이와 헤어졌어요. 저랑 우진이 이제 정말 아무 사이 아니라고요, 아줌마.”
가을은 제 가슴을 쾅쾅 치면서 말했다.
제 마음을 까뒤집어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요. 메일도 보내고 통화도 하고. 우진이에게 제발 나 좀 놔달라고 제가 오히려 사정까지 했다니까요.”
“아니야, 내가 널 몰라? 너 아직 정리 못 했어. 우진이도 그걸 아니까 한국에 돌아오려는 거고.”
가을은 막무가내인 우진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진 엄마가 제게 좀 덜 고마운 사람이라면 이 상황이 덜 고통스러울까, 의문이 생겼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우진 엄마는 제게 엄마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아들 앞길을 제가 막고 있다니. 죄책감이 느껴졌다.
우진이와 헤어졌다는 걸 어떻게든 우진 엄마에게 증명해 보여야 할 것 같았다.
“우진이 단념시킬게요. 무슨 수를 쓰든 우진이에게 우리 사이가 끝났다는 걸 납득시킬게요.”
“그러니까 어떻게, 어떻게 단념시킬 거냐고. 헤어졌다, 말만 하지 말고 확실하게 보여줘. 사귀는 사람과 찍은 사진이라도 보내든지.”
가을은 망연해졌다. 우진 엄마가 이리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나.
징글징글하게 모질고 끈덕지다.
“그럴게요. 사귀는 사람과 찍은 사진 보낼게요.”
가을은 한숨을 쉬었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사장에게 연애하자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장과 연애한다는 소문이 우진 엄마와 우진이에게 들어가도록.
그럼 우진이완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 두 사람이 받아들이겠지.
“아줌마, 저 이제 출근해야 해요.”
돌아가 달라는 말이었다.
우진 엄마는 몇 번 더 다그친 후에야 가을을 놓아주었다.
우진 엄마를 대문까지 배웅하고 난 후 가을은 음성을 밝게 꾸며 집 안을 향해 소리쳤다.
“할머니, 저 나가요.”
잘 다녀오라는 할머니의 대답이 들린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나와 보지 않았다. 지금 할머니를 대면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굳이 서로의 고통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을은 자전거에 올라탄 후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지각 확정이다. 이제 바랄 건 늘 그렇듯 사장이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어슬렁어슬렁 사무실에 나타나는 것이다.
몹시 드물게 사장이 일찍 등장하는 날이 있다.
딱 가을이 지각하는 날.
바로 오늘 같은 날.
그래서 가을은 미친 듯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등에 땀이 차기 시작할 때, 멀리 붉은 벽돌 2층 건물이 보였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다.
40년 전엔 새 건물이었겠지만. 그 1층에 가을의 직장이 있다.
‘대운 투자’라는 거창한 이름이 쓰인 현판만 아니라면 여느 부동산 중개사 사무소나 다름없는 8평짜리 사무실.
가을은 그 건물 옆 자투리 공간에 자전거를 세웠다.
거기가 이 건물의 공식 주차장이다.
건물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차 한 대가 좁은 주차장을 꽉 채우고 있다.
사장 놈의 차다. 국내에 몇 대 들어와 있지 않은 슈퍼카란다.
요란하긴. 가을은 그 차 옆에 제 자전거를 세우며 혀를 찼다.
볼 때마다 혀를 차게 되는 차다. 말이 ‘대운 투자’ 사장이지 고작 편의점 몇 개 가지고 있는 사장 놈에겐 분에 넘치는 차지, 암.
그 차가 못마땅하건 말건 그 차 옆에서 가을의 행동은 조심스러워진다.
제 낡은 자전거로 차에 미세한 흠집이라도 남기면, 그야말로 가을의 앞날이 캄캄해질 테니.
수억 원대의 차를 제대로 된 차고도 아닌 곳에 세워둔 사장과는 달리 가을은 제 자전거를 건물 울타리에 꼼꼼히 묶었다.
그러곤 조용히 사무실 문을 밀었다.
문이 열려 있다.
가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사장이 벌써 출근했나 보다.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가을의 코를 공격했다.
가을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냄새 속엔 술 냄새도 섞여 있었다.
“또 밤새 퍼마셨나 보네.”
가을은 중얼거리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사장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장은 자기 주거 공간인 2층까지 올라가지도 못할 만큼 퍼마시고 뻗은 모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테이블 위와 소파 밑엔 소주병이 널려 있다.
테이블 위에 배달 음식 그릇들이 뚜껑도 닫지 않은 채 놓여 있는 걸 보고, 가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무실 여기저기 토사물이 없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날도 있었으니까.
‘한심한 인간.’
가을은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 그에 상응하는 눈길을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사장에게 던졌다.
‘인물이 아깝다, 인간아. 허우대는 멀쩡해 가지고.’
생긴 거야 얼마나 멀끔해. 가을은 소파가 다 담지 못한 사장의 기럭지를 훑어봤다.
소파 밖으로 다리가 한참 삐져나가 있었다.
가을의 눈이 다시 사장의 얼굴로 돌아왔다.
높이 솟은 반듯한 이마, 쭉 뻗은 콧대, 너무 두텁지도 얇지도 않은 입술.
제가 사장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가을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잘생기면 뭐 해. 그래 봤자 팔자 좋은 한량에 불과한 걸.
자석에 끌린 쇠붙이처럼 가을의 시선이 다시 사장의 얼굴로 돌아갔다.
한량이라도 잘생긴 한량인 건 맞다.
그나마 보기라도 좋으니 다행이지.
이 좁은 사무실에서 온종일 부딪혀야 하는 얼굴인데.
그때 사장이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사장의 가슴이 가을의 정면을 향했다.
셔츠 앞섶이 활짝 벌어져 있었다.
가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벌어진 셔츠 앞섶 사이로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이 보였다.
“뭐야, 실하잖아.”
가을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인정. 무위도식하는 근육질의 미남.
그게 바로 자신의 사장이다. ‘대운 투자’의 기대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