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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또 연애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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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또 연애하자고?

가을은 칸막이 뒤의 싱크대로 갔다. 마시는 건 사장 놈의 몫이지만 치우는 건 제 몫이다.

술 파티의 흔적을 지우려면 사무실 대청소가 필요할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문을 활짝 열어 환기부터 시켜야지. 그러려면 사장을 깨워야 하고.

아차,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사장을 깨우기 전에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 가을은 살금살금 사장에게 다가갔다.

얼핏 보기엔 사장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가을은 확인차, 사장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봤다. 사장은 미동도 없다.

가을은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 의자를 벽시계 밑에 놓았다. 지금이 9시 17분. 출근 시간이 9시니까 시계를 9시 2분 전에 맞춰 놓으면 될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해놓고 사장을 깨운다. 청소한다는 핑계로 사장을 내보낸다. 그 후 시계를 원래의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그게 가을의 계획이었다. 그러면 감쪽같겠지.

의자 위에 올라간 가을은 벽시계의 분침을 돌리려고 시계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사장이 깨지 않았다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사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널브러진 자세 그대로인 사장이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히익. 가을이 숨을 멈췄다.

“너 뭐 하냐?”

사장이 심드렁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장은 도대체 언제부터 깨 있었던 걸까? 물색없는 사장 놈. 이럴 땐 보고도 못 본 척해 주면 좀 좋아.

“뭐 하긴요. 하하, 하하하.”

가을은 웃음으로 시간을 번 다음 말했다.

“시계가 안 맞는 것 같아 맞춰 놓으려고요.”

“그래?”

사장은 심상하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다음 벽시계로 눈을 돌렸다.

“시간이 터무니없이 안 맞는데? 어제까지 잘 맞던 시계인데 말이지.”

사장의 말본새가 의미심장했다.

“그렇죠? 불량품인가? 하하, 하하하.”

애꿎은 시계를 탓하며 가을은 헛웃음을 흘렸다. 안 맞을 수밖에. 사장이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제가 분침을 확 돌려놓았으니.

그래봤자 제가 제 발등 찍은 꼴이라는 걸 가을은 금세 깨달았다. 사장의 주의가 시계에 쏠렸으니까.

“흐음, 지금이 9시 18분이네.”

유난히 18을 힘주어 발음하는 사장이다. 가을이 움찔했다. 그러니까 출근 시간을 18분이나 넘겼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 움츠러들 가을이 아니다. 가을은 금세 정신력을 보강하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사장이 불러준 시간에 시계를 맞춘 다음 의자에서 내려왔다.

“사장님, 오늘…….”

“그래, 오늘 지각이네. 또.”

사장의 주의를 슬쩍 딴 데로 돌리려던 가을의 시도는 실패했다. 오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못 나온다고 해서 땜빵하러 가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너 말이야.”

이제 시작이다. ‘퇴근 시간은 목숨처럼 지키면서’가 나올 차례지. 가을이 눈을 굴렸다.

“퇴근 시간은 목숨처럼 지키면서.”

다음은 ‘20분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지 알아?’, 그다음은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가는 네가 출근 시간 하나를 못 지키냐?’로 이어지겠지. 사장의 레퍼토리는 늘 똑같으니까.

“20분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지 알아? 가뜩이나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가면서. 출근 시간 하나 못 지키는 게 말이 돼?”

가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쳤다. 사장님 1절만 하시죠.

“말이 안 되죠, 절대.”

머리에서와는 다른 말이 입에서 나왔다. 말이 안 돼도 어쩔 수 없었다. 가을은 퇴근 시간을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

퇴근 후엔 또 개인 과외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출근 시간을 못 지키는 데도 이유가 있다. 밤늦게까지 수업하는 날이 있다. 새벽부터 보강해야 하는 날도 있고. 어느 쪽이든 가을이 좋아서 지각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받아 가는 건 아니죠. 편의점 세 곳 모두 제가 관리하잖아요. 아르바이트생 빠질 때마다 메꾸는 것도 저고요. 사장님이 시키는 잡일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것도 비서 한 사람 몫이라고요.”

“흥.”

사장이 콧방귀를 꼈다. 일단 사장의 질타인지, 문책인지, 야단인지, 잔소리인지의 흐름이 잠시 끊어졌다.

가을은 그 틈에 제 입지를 만회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서둘러 냉장고로 가 숙취 해소제 한 병을 꺼내 사장 앞에 갖다 바쳤다. 수시로 곤드레만드레가 되는 사장을 위해 상비해 놓는 숙취 해소제이다.

“이건 또 얼만데?”

사장이 썩은 얼굴로 물었다. 지각을 무마하기에 숙취 해소제 한 병은 약한가?

“물론 무료죠. 제가 사장님께 숙취 해소제 값을 받겠어요?”

“응. 너 지금까지 그랬어. 기억 상실증이야?”

사장의 가차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꼼꼼한 놈. 그걸 잊지도 않네.

“하하, 사장님은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지은 죄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는 가을은 사장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다.

우진이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 주라고 간청하던 우진 엄마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사장을 설득해야 한다. 저랑 연애하자고. 연애가 안 되면 계약 연애라도. 그것도 싫다면 연애하는 척이라도 해 주면 안 되겠냐고.

“물수건이나 좀 만들어 와 봐.”

기대운 사장이 날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을 곁들이며 말했다. 그 말이 반가운 가을은 사장의 지시가 땅에 떨어질세라 후다닥 칸막이 뒤 싱크대로 갔다. 일단 지각에 대한 문책은 끝난 것 같았다.

기대운은 가을이 칸막이 뒤로 사라지는 걸 가소롭다는 듯 지켜봤다. 한가을이 제게 공짜 숙취 해소제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가지나 안 씌우면 다행이지. 그런데 그 있을 수 있는 일이 방금 일어났다. 한가을이 제 입으로 공짜라고 하지 않나.

‘뭔가 부탁할 게 있는 거로군.’

반사적으로 기대운의 얼굴이 굳었다. 한가을의 부탁이라면 생각나는 게 있었다. 또 제게 연애하자고 할 건가?

가을에게 우진이란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대운도 알고 있었다. 가을을 소개한 사람이 우진의 아버지였다. 우진의 아버지는 가을이 자기 아들의 여자 친구라고 했다.

가을은 그 우진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고. 우진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야 우진이 저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거라고.

대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을은 칸막이 뒤에서 살짝 고민하고 있었다.

한 손엔 수건, 한 손엔 걸레를 들고. 가을이 워낙 깨끗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걸레라곤 해도 수건과 별 차이 없었다. 사장은 구별하지 못할 거다.

가을은 수건을 서랍에 도로 넣고 걸레에 더운 물을 적셨다. 그걸 가지고 가 사장에게 내밀었다. 사장은 어느새 소파에 널브러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사장이 물걸레를 받아 제 얼굴에 얹었다.

“해장해야 해. 아침 좀 시켜 줘.”

“뭐 시킬까요?”

“알아서 시켜.”

게으른 인간. 어찌나 게으른지 제 먹을 것도 제 머리로 생각을 안 한다. 늘 가을이 시켜주는 대로 먹는다. 가을은 걸레에 덮인 사장의 얼굴을 향해 인상을 확 그었다.

그러나 금세 생각을 고쳐먹고 최대한 상냥한 음성으로 사장을 불렀다.

“사장니임?”

가을은 사장의 얼굴이 걸레에 덮여 있을 때 용기를 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연애하자는 말이 좀 더 쉽게 나올 것 같았다. 사장의 빈정거리는 듯한 눈을 보지 않으면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도 좀 더 쉬울 테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 또 연애하자고?”

지체 없이 나온 사장의 반응에 가을은 깜짝 놀랐다. 사장이 관심법을 익혔나.

“우진 엄마가 또 전화했어? 제발 자기 아들과 헤어지라고? 그럴 때마다 너 내게 연애하자고 하잖아. 동네에 한가을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야 한다고. 이게 대체 몇 번째냐?”

“아홉 번째요. 그리고 이번엔 전화가 아니라 찾아왔어요.”

“싫어. 넌 어떻게 네 회사 사장에게 연애하자고 하냐? 그것도 아홉 번씩이나. 아무리 내가 우습게 보여도.”

심상하게 구시렁거리는 것과는 달리 대운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대책 없는 한가을. 넌 내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날 고문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냐? 네 남자친구의 앞날을 위해 내게 연애하자고 하다니.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관둬요. 나라고 꼭 당신이 좋아서 연애하자고 하는 건 아니라고.’

가을은 가을대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랑 연애하기 싫다는 티를 아낌없이 내는 사장을 보니 용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가을은 제 앞에서 무릎을 꿇던 우진 엄마를 떠올리곤 마음을 다잡았다.

“사정은 말씀드렸잖아요. 저라고 제가 다니는 회사 사장님께 이러고 싶겠어요? 그래도 그간 쌓인 정이 있으니 편의 좀 봐주십사 하는 거죠.”

“쌓인 정?”

대운의 얼굴 위에 놓인 걸레가 살짝 들썩였다. 가을이 자신의 마음을 ‘쌓인 정’ 따위로 표현하는 게 가소로워 대운은 콧방귀를 뀌고야 말았다.

“삼 개월만. 삼 개월만 어떻게 안 될까요?”

가을은 최대한 저자세로 말했다.

“제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시간이 있으면 사장님께 이러지도 않죠.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제 주변에 남자라곤 제가 가르치는 애들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뿐인데, 걔들은 핏덩이잖아요. 걔들한테 연애하자고 하는 건 범죄라고요.”

“그런데 왜 하필 삼 개월이야? 네게 남자가 생긴 걸 알고 우진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는 데 걸리는 시간이 딱 삼 개월이야?”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가을이 우진이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같아 짜증이 난 대운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걸레가 그의 얼굴에서 흘러 떨어졌다.

“우진이가 한국에 돌아오는 걸 막는 데 걸리는 시간요.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걔가 마음을 정리하게 만들어야죠.”

얽매이기 싫어하는 사장이기에 저와의 연애가 영구적인 게 아님을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연애하자는 걸 사장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사장은 의외로 삼 개월이란 시간을 걸고넘어진다.

“그럼 그건 계약 연애 아닌가? 아니면 연애하는 시늉을 하는 거든지.”

“그 정도론 안 돼요. 저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본 줄 아세요? 사장님도 이 동네에서 일 년 살아 보셨으니 아시잖아요. 이 동네가 어떤 동넨지. 특히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주민끼리는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안다고요. 그런 사람들을 믿게 해야 하는 일이에요. 계약이나 흉내로 될 리 없잖아요.”

“하긴 그래. 이놈의 동네엔 개코들만 사는지. 왜 그리 킁킁거리며 냄새들을 맡고 다녀.”

대운이 툴툴거리며 가을의 말을 수긍했다. 여기 이사 온 후 동네 사람들의 과한 호기심에 시달려 본 그다.

“그리고 밥 먹고, 영화 보고, 좋은 곳에 같이 가고, 하는 건 똑같은데 그걸 굳이 계약 연애라고 할 필요 있나요? 연애라고 하면 되지. 게다가 저 사장님 좋아해요. 사장님도 저 좋아하시죠? 다 알아요.”

말문이 막힌 대운은 순간 온갖 생각을 했다. ‘제가 감정을 그리 흘리고 다녔나?’부터 ‘알긴 뭘 안다고, 좋아한다는 말을 저리 쉽게 하나?’까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어떤 악연으로 얽혀 있는지, 내가 어떤 눈으로 널 보고 있는지 넌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운이 마음속으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