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느 쪽이 붙인 끄나풀이야?
3. 어느 쪽이 붙인 끄나풀이야?
“내, 내가 널 좋아한다고? 넌 거울도 안 보냐? 어디가, 어딜 봐서?”
대운은 부정하는 쪽을 선택했다. 한가을이 말한 ‘좋아한다’가 제가 생각하는 대로의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제 인성이요. 제가 성격 하나는 좋잖아요. 그러니까 사장님의 그 개 같은…….”
앗, 실수. 가을이 말을 뚝 끊었다. 사장님의 그 개 같은 성질을 견뎌내고 있는 거라고 할 뻔했다.
“개 같은 충직한 부하 직원이 된 거잖아요.”
가을은 재빨리 말을 이으며 제 잔머리에 감탄했다. 그러곤 사장이 제 말실수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도록 사장의 혼을 빼놓았다. 제 얼굴에 사장에게 쓱 들이댄 것이다.
“그리고 제 생긴 게 어때서요. 잘 보시라고요. 저 오늘도 거울 보고 나왔거든요. 제가 꾸미질 않아서 그렇지, 꾸며 놓으면 연예인 저리 가라래요.”
가을의 예상대로 기대운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사이 그는 가을에게서 풍기는 향기를 맡고 말았다. 샴푸 냄새인지, 화장품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게 섞인 한가을의 냄새인지를.
그게 뭐든 기대운의 몸 속 신장 위에 위치한 부신을 쓱 건드리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의 몸에 부신 수질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방출되었다. 심박수가 늘어나고 혈압이 상승했다. 한마디로 흥분했다는 말이다.
“누가 그래? 네 할머니가?”
그깟 냄새 하나에 흥분한 자신을 추스르려고 대운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곤 황급히 계단으로 걸어갔다.
말문이 막힌 가을은 썩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예리한 놈.
“좀 사귀어 주면 어때서.”
가을은 입을 삐죽거렸다.
“씻고 올 테니 아침이나 시켜 놔.”
사장이 이 층으로 올라가며 소리쳤다.
암, 시켜드려야죠. 해장이 될 만한 걸로.
가을은 아침 일찍 문 여는 식당에 전화해 불닭을 주문했다. 불닭 먹고 땀을 쭉 빼고 나면 해장이 될 거다.
* * *
가을은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무실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까다로운 사장도 사무실의 청결도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않았다. 가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하고 있는데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기대운 사장 있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그윽한 저음에 바닥을 쓸던 가을이 몸을 일으켰다. 문간에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연예인인가? 연예인이 왜 우리 사장을? 가을은 홀린 듯 남자를 쳐다봤다.
“여기 대운 투자 아닙니까?”
가을이 대답을 않고 쳐다보고만 있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맞아요, 대운 투자. 사장님은 지금 2층에 계신데요.”
“네 사장 지금 내려가고 있어.”
제가 호랑인 줄 아는지 가을이 말을 하자마자 사장이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한가을, 넌 편의점에 가서 물건 진열하는 거나 도와줘.”
사장은 찾아온 손님을 흘긋 보더니 가을에게 말했다.
“마실 건…….”
“됐으니까 빨리 가 봐.”
손님에게 물었는데 사장이 대신 대답했다.
“청소가 덜 끝났는데요.”
조금이라도 사무실에 더 남아 있으려고 가을이 핑계를 댔다. 결단코 잘생긴 남자를 조금 더 보려는 건 아니었다.
손님을 맞는 사장이 왠지 긴장한 듯 보이는 것이 가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 왔는지 묻지 않는 걸 보면 약속된 손님 같은데.
“어서 가라니까. 청소는 나중에 해.”
뭉기적거리는 가을을 향해 사장의 호통이 떨어졌다. 가을은 얼른 사무실을 나왔다.
“문 닫고 가.”
뒤에서 또 사장의 호통이 날아왔다.
“눈 호강 좀 할랬더니. 하여튼 사원의 복지엔 조금도 관심이 없지.”
사무실 문을 닫은 가을이 툴툴거렸다. 궁금증은 오히려 더해졌다. 문을 닫기 직전, 사장을 찾아온 손님이 싱글거리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웃는 얼굴, 나머지 한 사람은 웃는 얼굴에 침 뱉을 듯한 얼굴이라…….”
묘한 조합이다. 사장과 사장을 찾아온 사람.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행색은 딴판이다.
술독에서 방금 건져내어 물에 대충 헹군 뒤 널어놓은 시래기와 허접하고 시들한 구석 하나 없이 말쑥하게 손질된 고갱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란 얘기다.
“서로 허물없어 보이는 게 친구 사이 같긴 한데…… 그런데 사장 친구라기엔 지나치게 비즈니스맨 냄새가 난단 말이지. 사장관 너무 다르잖아.”
가을은 길 건너에 있는 사장 소유의 편의점으로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 사무실을 봤다.
“설마 빚 받으러 온 건 아니겠지?”
사무실을 나오기 전 봤던 장면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엉뚱하긴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 같진 않았다.
편의점에서 나오는 수입은 뻔한데 사장의 씀씀이는 엄청나다. 꼴에 재벌 3세랍시고 사장 놈이 타고 입고 마시는 건 다 최상급품뿐이었다.
빚쟁이가 찾아올 정도라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은 끝없이 부풀려졌다. 아직은 이 직장이 필요한데. 저야말로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란 말이다.
설렁설렁 다니기만 하면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나름 꿀 빠는 직장이라는 것 말고도 가을이 ‘대운 투자’에 다녀야 하는 이유는 있었다. 사장이 알아서는 안 되는.
아, 사장 놈은 어쩌자고 빚을 졌단 말인가. 집안에서도 쫓겨났다면서 쓰던 가락을 못 버리고. 빚 때문에 회사 문을 닫게 되기라도 해 봐.
가을은 편의점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당장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가을이 직장을 잃을까 봐 걱정을 사서하고 있을 때, 대운 투자 회사의 사무실에선 잘생긴 두 남자가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웃는 얼굴로, 한 사람은 불쾌한 얼굴로.
“뭐야, 숙취를 도지게 하는 그 느끼한 웃음은.”
불쾌한 얼굴을 한 쪽이 웃는 얼굴에 대고 말했다.
“네 그 썩은 얼굴이 꼭 숙취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한가을 씨 얼굴 보여주는 것도 아깝냐? 그렇게 서둘러 내보내다니. 소문의 한가을을 보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구먼.”
“이제야 나타나서 뭔 소리야. 너 두 달 전에 들어왔어야 했어. 네가 안 오는 바람에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던 일 마무리 짓느라 늦어진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는데 새삼 그걸 걸고넘어져? 말을 돌리려면 제대로 돌리지. 여기 와 본 애들이 한가을 씨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한다더라. 사흘 버티기도 힘든 기대운 밑에서 1년을 살아남았으면 그럴 자격 충분하다고. 근데 한가을 씨는 뭐가 다른 거야?”
“신경 꺼.”
기대운이 참지 못하고 팩 소리 질렀다.
“내가 신경 끌 것 같아? 뉴욕까지 소문난 한가을을 직접 보게 됐는데. 천상천하 유아독종 기대운에게 할 말 다 하는 유일한 직원, 한가을. 그런 한가을을 1년씩이나 두고 본 기대운. 기대운 사전에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게?”
“응, 얼마든지. 내가 1년 넘게 데리고 있는 직원이 한가을만은 아닐 텐데. 뉴욕에 있는 네게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심어준 한가한 새끼가 누구야?”
“왜, 또 자르게?”
“잘라야지. 제대로 일 안 하는 새끼니까. 제대로 일을 안 하니까 한가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뿐 아니라, 그걸 또 저처럼 한가한 새끼에게 옮기지.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유아독종이 아니라, 이 한가한 새끼야.”
“넌 천상천하 유아독종 맞아, 독종. 그런데 어느 쪽이야?”
“뭐가?”
“한가을. 어느 쪽 스파이냐고. 네 할아버지? 아니면 큰아버지?”
“변호사 아니랄까 봐.”
대운이 대답을 미루며 툴툴거렸다. 앞에 앉은 친구 놈은 태생이 변호사다. 왼손 잽으로 간을 보다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어퍼컷을 날린다. 잽에 정신이 팔려 있다간 훅 들어오는 어퍼컷에 당하기에 십상이다.
“정세현 변호사, 의뢰받은 일이나 잘하지? 의뢰인의 사생활에 신경 쓰지 말고.”
“호오, 그러니까 한가을 씨는 사생활의 영역이라는 거? 공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라는 거지?”
“그걸 알았으면 신경 끄라고.”
대운이 짜증을 폭발시켰다.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가을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사장님?”
가을이 사무실 안 두 남자를 살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넌 왜 그렇게 벌컥 문을 여는 거야?”
“고함소리가 들려서요. 혹시 싸우시는가 하고.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중이었다고 생각하며 가을은 얼른 도로 나가 문을 닫았다. 사무실 분위기를 확인한 가을의 걱정이 더 깊어졌다.
찾아온 사람이 빚 받으러 온 거 같다는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가을은 서둘러 건너편 카페로 갔다. 좀 더 오래 사무실에 머물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선 커피가 필요할 것 같았다.
사무실 안에선 세현의 추궁이 계속되었다. 가을이 사무실을 염탐하러 왔다 간 뒤 세현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
“끄라고 한다고 꺼지겠냐? 한가을 씨가 저렇게 열심히 정보를 캐내려고 하는데? 한가을이 스파이인 걸 알면서도 곁에 두는 이유가 뭐야?”
“구두 닦을 시간에 뇌도 좀 닦아. 네 뇌가 네 구두의 반만이라도 반짝거린다면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안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방금 그 질문은 미스. 요즘 술을 안 마셔서 뇌가 굳었나 봐. 한가을을 역으로 이용하면 적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지. 잘만 하면 적의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고.”
세현은 대운의 빈정거림을 불쾌한 기색도 없이 받았다. 그러곤 또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이냐고? 할아버지? 큰아버지? 어느 쪽이 붙인 끄나풀이야?”
“끈질긴 자식.”
쯧. 대운은 귀찮은 듯 혀를 찼지만 이번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꼭 어느 한쪽일까? 양쪽 다일 수도 있잖아.”
“양쪽 다?”
“이쪽, 저쪽 모두가 한가을을 통해 정보를 빼내려 할 거라는 거지. 할아버지가 이용하는 정보 제공자를 큰아버지인들 탐내지 않겠어?”
대운은 가볍게 말하다가 세현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마주했다.
“한가을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거야? 왜?”
“돈 때문이겠지.”
대운의 얼굴에 시큰둥한 표정이 돌아왔다.
“한가을 씨는 자기 아버지가 네 아버지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게 확실한가 보군. 그걸 안다면 네 정보를 네 큰아버지에게 팔아넘길 리는 없지. 적어도 사람이라면.”
“모르는 게 확실한 것 같아. 자기 아버지를 몹시 존경하는 것 같던데. 제 아버지가 한 짓을 안다면 그렇게 존경할 수 없겠지.”
“난 네가 존경스럽다. 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의 딸을 가까이 두다니. 그것도 그 사람이 스파이질을 한다는 걸 알면서.”
“한가을은 운동화에 든 돌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프고 성가시지만, 적당한 자극을 주기도 해. 방심하지 않게 만든다고. 결국 오래 걷는 데 도움이 되지.”
대운은 빙그레 웃었다.
“어쨌거나 좀 더 속도를 내야겠어. 네가 이 변두리에서 파락호처럼 살고 있어도 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여전히 널 경계하고 있는 것 같으니. 한가을이란 스파이를 네 옆에 붙여 놓은 것만 봐도 알잖아. 게다가 내가 돌아온 걸 알면 바짝 긴장하겠지.”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세현과 대운은 입을 다물었다.
“사장님, 커피 왔습니다. 저 이번엔 노크했어요.”
가을이 커피 캐리어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두 남자는 기가 막힌 듯 그걸 지켜봤다.
설마 우리가 한 말을 들은 건 아니겠지? 둘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대운은 건물 리모델링을 하면서 특별히 방음에 신경 썼던 걸 떠올리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제 발 저린 건 어쩔 수 없었던 대운은 당황한 걸 감추려 호통쳤다.
“밥이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너 제대로 주문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