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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받은 도움이 목을 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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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받은 도움이 목을 조른다

가을은 들어간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아보기 위해 사무실의 동정을 살피려던 계획은 깡그리 버렸다. 불닭이 오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사장의 해장용으로 불닭 시켜 놓은 걸 왜 잊어버린 건지.

그 와중에 커피 캐리어는 테이블 위에 두고 나왔다.

잘생긴 남자가 왜 사장을 찾아왔는지는 알아내지도 못하고 커피값만 날린 듯했다. 낭패다. 폭음한 다음 날 빈속에 불닭을 먹은 사장에게 커피값을 받아내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가을은 사무실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불닭의 기운이 떨어질 때까진 사장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편의점 세 군데를 돌며 영업 상태를 점검하고 난 가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 표시에 ‘우진 아버지’라는 글자가 떴다. 아침에 우진 엄마가 다녀간 일과 관련 있는 전화인 듯해 가을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처지는 기분을 끌어올리려 가을은 더 밝게 인사했다.

“많이 바쁘지? 더운데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별로 하는 일도 없는걸요.”

“바쁘지 않으면 잠깐 볼까? 근처에 왔다가 네 생각이 나서.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장소 정해 주시면 제가 그리로 갈게요.”

전화로 말씀하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근처까지 오셨다는데. 하루에 우진 엄마, 아빠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힘든데. 아무리 마음에 철벽을 쳐도.

가을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진 엄마가 아침 일찍 들이닥치는 바람에 도시락도 못 싸 왔는데 잘 됐지 뭐. 점심값 굳었네. 사장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는 걸 우진 아빠에게 보고도 해야 하니까.

약속 장소인 냉면집엔 우진 아버지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이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우진 아버지가 미리 주문해 둔 음식들이 테이블에 차려졌다.

“여름엔 역시 냉면이지. 많이 먹어라. 넌 어째 볼 때마다 더 마르니?”

‘여름엔 역시 냉면이지’라는 말과 달리 우진의 아버지 선재호 이사는 수육 접시를 가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가을은 사양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지. 쇠고기 수육을 또 언제 먹겠어. 쇠고기는 언제나 동생 겨울의 몫인데.

겨울이 떠올라 버렸다. 수육으로 가던 가을의 젓가락이 멈칫했다. 할머니와 겨울이에게도 먹이고 싶었다.

“수육 3인분 포장해 주세요.”

가을의 젓가락이 멈칫거린 이유를 눈치챈 듯 우진 아버지가 얼른 수육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고마운 분. 우진의 어머니, 아버지는 가을의 식구들에게 고마운 분들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고마우니 더 미안하다. 우진과의 사이를 정리 못 해 두 분께 걱정만 끼치고 있으니. 우진의 저에 대한 마음을 빨리 접게 만들어야 하는데.

“할머니는 건강하시니?”

“예.”

가을의 머리가 푹 숙어졌다.

“겨울이는? 학교 잘 다니지? 이제 수능이 얼마 안 남았구나.”

“겨울이는 공부하느라 정신없죠, 뭐.”

가을은 순간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우진의 아버지에게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데.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사업을 벌이지만 않았더라면…… 그 사업이 망하지만 않았더라면…….

“회사엔 별일 없지? 기 사장은 여전히 술을 많이 마시니?”

냉면 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가을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예. 요즘 술이 더 는 것 같아요. 마시는 빈도나 양, 다 늘었어요. 어젯밤에도 밤새 술을 마셨는지 아침까지 인사불성이 되어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있더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 아직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을이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 누가 찾아오지 않았던?”

“예, 찾아왔어요. 사장님 친구인 것 같던데 제겐 소개해 주지 않아서 누군진 몰라요.”

대답을 하는데 우진 아버지가 만나자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우진 엄마가 찾아온 일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어? 차림새라든지 특징이라든지.”

“잘생긴 사람이었어요.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사람 같았고요. 사장님과는 허물없는 사이로 보였어요.”

가을은 사장과 그 잘생긴 남자가 사무실에 있던 장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정세현이 돌아온 게 맞는구나.”

우진의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네가 잘 봤구나. 오늘 왔다는 사람, 정세현이라고, 기 사장의 오랜 친구다. 유일한 친구지.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것도 맞고. 법무법인 에이펙이라고 들어 봤지? 거기 대표 변호사 아들이야. 본인도 굉장히 유능한 변호사이고.”

법무법인 에이펙은 가을도 들어본 적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가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무슨 얘기하는지 들었니?”

“아뇨. 사장님이 저를 내보냈어요. 제가 빨리 나가기를 바라는 눈치였어요. 제가 나오기 전까진 두 사람 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요.”

“음.”

우진 아버지 선재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을을 빤히 봤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가을아,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고 내게 얘기해 줄 수 있겠니?”

‘해 줄 수 있겠니?’ 우진의 아버지는 ‘해라’, ‘해다오’라고 하지 않는다. 늘 ‘해 줄 수 있겠니?’라고 묻는다. 마치 가을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듯. 그러나 그도 알고 가을도 안다. 가을에겐 거부할 자유가 없다는 걸.

그동안 우진 아버지에게 받은 도움이 목을 죄고 있는데 어떻게 싫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감히 어떻게.

가을은 멍하니 우진의 아버지를 봤다. 왠지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 같았다.

기 사장의 동향을 보고해야 한다는 건 대운 투자에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가을을 이 회사에 넣어줄 때 우진 아버지가 말했었다.

‘기 사장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기적으로 내게 알려줄 수 있겠니? 기 사장 할아버지가 손자 걱정을 많이 하셔. 기 사장이 제대로 사는지 확인하고 싶은가 봐. 내가 기 사장 상황을 일일이 체크하지 못하니 네가 나를 좀 도와줄 수 없을까?’

그때 가을은 그러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 후, 기대운 사장 사는 꼴을 보고선 그 할아버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고. 그의 할아버지가 기대운의 동향을 보고 받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나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도 남을 테니.

그런데 이번엔 가을도 쉽게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그냥 할아버지의 손자 걱정을 덜어주는 정도의 보고가 아닌 듯했다. 기대운과 정세현의 우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듣고 싶은 게 아닐 거다.

왠지 덫에 걸린 기분도 들었다. 우진 부모의 도움을 받지 말아야 했을까? 그 도움이 지금처럼 제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줄은 몰랐는데.

“예, 그럴게요.”

가을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지금 우진 아버지가 알려 달라는 것이 그때 알려 달라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사장이 정세현과 나누는 얘기를 제게 들려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 사장이 그리 서둘러 저를 내보낸 걸 보면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리라.

믿음과 동시에 의심도 생겼다. 우진 아버지가 이때를 위해 저를 대운 투자에 취직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의심.

기대운과 정세현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러니 정세현이 기대운을 찾아오자마자 저를 만나자고 전화한 게 아닐까?

* * *

“어, 왜 이렇게 일찍 와?”

우진의 아버지와 헤어진 뒤, 심란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들어서는 가을에게 기대운이 대뜸 물었다.

가을은 실눈을 뜨고 사장을 훑어봤다. 정세현은 없고 사장이 혼자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수상한 냄새가 났다. 왠지 사장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는 듯도 하고.

무엇보다 이게 정상적인 사장이 부하 직원에게 할 소린가? ‘왜 이렇게 늦게 와?’면 몰라도. 내가 없는 동안 사장이 또 무슨 사고를 쳤지? 가을은 재빨리 사무실을 둘러봤다. 나가기 전이랑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았다.

“손님은 가셨어요?”

“으음.”

사장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약국 가서 숙취 해소제 하나 사다 줘.”

기대운의 유일한 부하 직원으로서 잔심부름은 가을의 담당이다. 처음 입사했을 땐 그런 일은 직접 하라고 버텨보기도 했었다.

잠깐이긴 했지만. 나를 잔심부름이나 시키려고 고용했냐며 항의도 했었다. 결국 그러려고 고용한 게 맞는다는 것만 확인했다.

“아까 하나 드셨잖아요. 그리고 꼭 약국 걸 드셔야 해요? 편의점에도 있는데.”

왠지 사장이 저를 내보내려고 핑곗거리를 만든 것 같아 가을은 버텨 봤다.

“약국에서 파는 게 더 잘 듣는 것 같아. 효과에 차이가 있더라고. 내가 좀 민감하잖아. 귀하게 자라서.”

그놈의 귀하게 자란 타령은. ‘내가 좀 귀하게 자라서’란 말은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많이 들었다. 사장이 말끝마다 갖다 붙이니까.

어쨌든 귀찮게 됐다. 아까 사장에게 상납한 게 마지막 남은 숙취 해소제였는데. 이 땡볕에 약국까지 걸어가게 생겼다.

“4천 원요.”

숙취 해소제값을 받으려던 가을의 눈에 낯익은 물건이 들어왔다.

“사장님!”

가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사장이 당황한 기색을 보인 게 이것 때문이었군.

“그거 제 도시락이잖아요.”

제가 없는 사이 할머니가 갖다 두고 가셨나 보다. 우진 엄마 때문에 도시락 쌀 정신이 없었다는 건 할머니도 아셨을 테니.

“넌 불닭 먹으면 되잖아.”

사장이 턱으로 풀지도 않은 꾸러미를 가리키며 도시락을 슬쩍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시락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거다.

“너라고 하지 마세요. 제 이름 한가을이에요. 아무리 작은 사무실이지만 저 사장님 부하 직원이잖아요. ‘야’, ‘너’ 말고 ‘한가을 씨’라고 부르세요.”

가을이 언성을 높여 따졌다. 따지면서도 제가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마운 사람들인 우진의 부모에게는 할 수 없으니까. 그들에게 받은 상처가 억눌려 있던 분노가 되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같은 문제로 사장에게 항의한 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때마다 사장은 ‘알았다’고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가을의 호칭은 금세 ‘야’ 아니면 ‘너’로 돌아갔다.

“넌 사장한테 연애하자고 덤비면서, 난 너를 ‘너’라고도 못 부르냐?”

어라, 사장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네. 오늘 뭘 잘못 먹었나? 도시락이 상했나? 사장이 논리를 내세우다니.

“좋아하면 사장한테라도 연애하자고 덤빌 수 있죠. 그렇지만 부하 직원을 ‘야’나 ‘너’로 부르는 건 인권 문제라고요. 부하 직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거란 말이에요.”

“음, 그런 거구나.”

사장은 성의 없는 대꾸를 하면서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했다. 뻔뻔하게도, 대놓고 남의 도시락을 먹는다. 나중엔 아예 도시락을 입에 대고 내용물을 젓가락으로 입 안에 퍼 넣는다.

“그만 드시고 돌려주세요.”

항의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젓가락질은 더 빨라졌다.

“내놓으라고요.”

가을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눈이 휘둥그레진 대운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가을을 올려다봤다. 눈물이 들어찬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가을이 대운의 눈에 들어왔다.

대운은 가을의 눈물을 처음 봤다. 처음 본 게 아니라도 그렇지. 놀랄 일이었다. 이게 저리 죽일 듯 쳐다볼 일인가? 도시락 좀 훔쳐 먹은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