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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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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더니

“불닭 먹기 싫으면 다른 거 사 먹어. 도시락값 주면 되잖아.”

가을의 눈물에 놀란 대운이 달래듯 말하며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도시락은 벌써 비어 있었다. 가을은 거칠게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빈 도시락을 집어 들려는데 대운이 가을의 손목을 잡았다.

“배고파서 그래? 점심 약속 있었다며, 밥 못 먹고 왔어?”

점심시간은 자유롭게 써도 됐지만 가을은 굳이 사장에게 문자를 남겨 두었었다.

곧 죽어도 혼자 힘으로 식사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사장이기에, 쫄쫄 굶은 채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불닭을 시켜준 것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은 있었고.

“4천 원 주세요.”

가을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왜 눈물이 나와 버린 건지, 저도 제게 놀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특히 남들 앞에서는. 그 맹세를 잘 지켜 왔다, 오늘까지는. 그런데 왜 하필 오늘, 그것도 사장 앞에서…….

“이건 못 본 걸로 해주세요.”

가을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숨긴다고 숨겨질 것도 아니니까. 빼앗긴 도시락이 아까워서 운 걸로 해두지 뭐. 너무 배고프면 그럴 수도 있잖아.

저는 방금 점심을 먹고 왔고 사장도 그걸 안다. 그래서 뭐, 알면 어쩔 건데. 제가 그렇다는데. 저도 제 눈물의 의미를 모르겠는데.

가을은 부끄러워서 더 당당해졌다. 사장이 훔쳐 먹은 그 도시락이 부끄러웠다.

어제 먹고 남은 밥을 김치만 넣고 대충 볶은 김치볶음밥. 계란프라이 하나 얹혀 있지 않았을 김치볶음밥이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우진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제 처지.

제 도시락을 훔쳐 먹은 사장이 제 처지도 훔쳐보았으리라.

사장이 5만 원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가서 점심 사 먹고 와.”

돈을 보는 순간 가을의 머리가 제 기능을 찾았다. 역시 돈보다 강력한 에너지원은 없다. 적어도 한가을에겐 그렇다. 5만 원 권을 보니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사장님, 아예 숙취 해소제 한 박스를 사다 드릴까요? 귀찮게 한 병씩 사지 말고 한 박스 사놓고 필요할 때 냉장고에서 꺼내 드시면 되잖아요. 한 박스에 10병 들었으니까 4만 원 어때요?”

지금까지 제 돈으로 한 박스를 사다 놓고 사장에게 한 병씩 팔아왔다. 팔 때마다 800원씩 이문을 남기면서.

그렇게 찔끔찔끔 이문을 챙길 게 아니라 한꺼번에 목돈 8,000원을 챙기겠다는 거다. 저는 숙취 해소제 한 박스를 3만 2천 원에 사 올 수 있으니까.

사장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어린다. 그래, 감탄이 나오겠지. 이렇게 빠릿빠릿한 부하 직원에게 감탄이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정작 기대운은 그 순간 급변한 가을의 얼굴을 보고 감탄했다.

제 도시락 좀 훔쳐 먹었다고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다가 돈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에서 생기가 폭발한다. 방금까지 제 앞에 서 있던 비련의 여주인공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그래 그렇게 해. 남은 돈으론 점심 사 먹고.”

“남은 돈에서 김치볶음밥값만큼 제할게요.”

사장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을이 야무지게 덧붙였다. 그에 사장이 인상을 팍 찌푸린다.

“제 김치볶음밥 드셨잖아요. 계란프라이는 없었지만. 식당에서 계란프라이 빼고 그만큼 값을 깎아달라고 할 수도 없고.”

사장이 인상 찌푸리는 걸 제 맘대로 해석한 가을은 나름 합리적인 근거를 들었다. 사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저 점심 먹고 학교 앞 편의점에 가요. 거기 오후 아르바이트생이 오늘 못 나온대요.”

가을은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걸 본 기대운은 픽, 헛웃음을 지었다. 눈물 글썽거리던 게 마음에 걸려 점심 사 먹으란 말을 몇 번이나 했더니. 역시 돈만 한 게 없다. 적어도 한가을에게는.

“내게 바가지 씌운 모양이군.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대운은 중얼거리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몸을 쭉 뻗는 그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바가지를 쓰고도 웃는 저를 보면 세현은 뭐라고 할까? 또 한가을은 뭐가 다르냐고 추궁하겠지?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만 8천 원 벌었어.”

번번이 약국까지 심부름시키는 게 얄미워 한 병에 800원씩이나 덧붙여 숙취 해소제값을 받았는데, 이제 한 박스에 8,000원의 이문을 남기게 됐다.

게다가 점심값까지 따로 받았고, 냉장고엔 쇠고기 수육이 들어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늘은 과일이라도 좀 사가 볼까? 우진 아버지가 사준 것이라 들고 오는 내내 무겁게만 느껴지던 수육에도 흐뭇한 마음이 든다. 수육은 죄가 없어.

* * *

“사장님, 어제 미국 주식 시장 동향 보고할까요?”

벌써 해가 중천이다. 한국 주식 시장이 개장된 지도 몇 시간 지났다. 이젠 구닥다리 정보가 돼 버렸겠지만, 월급을 받으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가을이 대운에게 물었다.

“됐어. 점심 메뉴나 정해 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대운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가을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 않으면 한심하다는 눈길이 사장에게 향할 것이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2.32% 폭락했고요. 나스닥은 4.05%, S&P 500 지수는 3.24% 떨어졌어요. 유럽 증시도 동반 하락했는데…….”

“하아암.”

사장이 뭐라고 하든 보고를 시작했는데 사장은 벌써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다. 가을이 사장에게 향하려는 경멸의 눈길을 붙들어 매느라 눈에 힘을 줬다.

하긴 이 보고도 사장이 시켜서 시작한 건 아니다. 월급을 받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가을 스스로 시작한 거다. 투자 회사라니 주식 시장에 대한 보고를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처음엔 뭘 보고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주식의 ‘주’자도 몰랐으니. 궁여지책으로 출근 전 유튜브의 주식 방송을 듣고 그걸 요약해 사장에게 옮겼다. 잘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보고를 1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유가 하락으로 항공 회사들의 주가가 일제히 오른 데 반해 여행, 레저 산업의 주가는 내렸대요. 왜일까요? 기름값이 내렸으면 여행, 레저 산업의 주가도 올라야 할 것 같은데. 기름값 내리면 보통 여행을 더 많이 하지 않아요?”

“한가을.”

사장이 가을의 말을 잘랐다. 지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넌 생각하지 마. 생각하라고 널 고용한 거 아니야. 넌 그냥 네 할 일만 하면 돼. 달달한 커피나 한잔 타 줘.”

달달한 커피나 한잔 타는 게 가을의 할 일이라는 걸 사장이 상기시켜 준다.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장이 그건 어지간히 길게도 말한다. 가을은 썩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튀어나온 입은 좀 집어넣지.”

가을의 뒤통수에 대고 대운이 소리쳤다. 대운의 입가가 저절로 치솟았다. 가을이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건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있나. 저렇게 티를 내는데. 대운은 커피 마실 준비를 했다. 일어나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은 것이다. 다리는 꼬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역시 소파를 잘 샀어.”

대운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면서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운이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물었을 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한가을, 여기 한가을 있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남자에게선 술 냄새가 확 풍겼다.

“한가을! 한가을!”

낮술에 취한 남자가 화난 음성으로 연신 가을을 찾았다. 대운이 책상에서 발을 내리기도 전에 칸막이 뒤에서 가을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아저씨.”

내민 가을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보기 힘든 걸 많이 보네. 한가을의 눈물, 한가을의 창백한 얼굴.

대운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생각했다. 가을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야무지고 당당한 한가을이. 사장에게도 할 말 다 하는 한가을이.

“너, 그동안 잘도 숨겼구나. 직장을 구했으면서. 한 동네 살면서 나만 몰랐네. 나만 바보 됐어.”

남자는 사납게 소리치며 가을에게 다가갔다. 대운이 그를 막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가을이 더 빨랐다. 가을은 남자에게 다가가 그 팔을 잡았다.

“아저씨, 나가서 얘기해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놔.”

남자가 가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뿌리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한 가을이 뒤로 튕겨 나갔다. 비쩍 마른 몸으로 남자의 힘을 감당하는 게 무리였을 거다.

“무슨 일입니까?”

대운이 제 몸으로 가을의 앞을 막아섰다.

“사장님,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일부러 제 등 뒤로 숨겼는데 가을은 기어이 제가 해결하겠다고 한다. 가을이 또 남자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저씨, 다 말씀드릴게요. 나가서 얘기해요. 제 얘기 들어보시면…… 큭.”

가을은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남자가 가을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자 가을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 나왔다.

“이제 와서 무슨 얘기. 여편네와 짜고 날 속인 거? 동네 사람들이 내 등 뒤에서 비웃었다며, 멍청한 새끼라고.”

남자가 가을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고함쳤다. 그가 소리칠 때마다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으며 가을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그 손 놓지 못해!”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가을이 대운의 고함을 들은 건 영민 아빠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고 난 후였다. 대운이 영민 아빠의 팔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대운의 눈에선 불이 뿜어져 나왔다.

“괜찮아? 어디 봐.”

대운은 영민 아빠의 팔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가을의 셔츠 깃을 젖혔다.

“괜찮아요.”

가을이 놀라 셔츠 깃을 여미며 뒤로 물러났다. 대운의 손이 스친 목에 맥박이 팔딱거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중년의 여자가 소리치며 뛰어 들어왔다.

“여보, 영민 아빠! 당신 왜 이래? 얼른 나와. 여기가 어디라고 여길 찾아와.”

“그동안 그렇게 꼭꼭 숨겼는데 내가 찾아내서 놀랐어?”

“영민 아빠, 그런 거 아니야, 집에 가서 얘기해. 가을아 미안하다. 이 양반 지금 술에 취해 제정신 아니야. 네가 이해해.”

“뭐야?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영민 엄마의 등장이 영민 아빠를 더 자극한 듯했다. 영민 아빠는 아내를 때릴 듯 대운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본 대운은 잡고 있던 영민 아빠의 팔목을 비틀었다.

“으으윽.”

영민 아빠가 앓는 소리를 내며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너, 넌 뭐야?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야.”

“나? 나, 이 회사 사장, 한가을의 고용주.”

대운은 털어버리듯 영민 아빠의 팔을 내던지곤 가을을 제 뒤로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 가을의 몸이 휙 딸려 왔다. 애가 너무 가볍다. 대운은 평소 점심으로 짜장면만 시켜준 걸 후회했다.

“너희들 내가 가만둘 줄 알아? 돈 받으러 온 사람을 폭행해? 내 이것들을 오늘.”

“아저씨,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앞으로 나서려던 가을이 대운의 팔에 가로막혔다. 빗장처럼 가로 뻗은 대운의 팔을 치우려고 가을이 힘주어 밀었으나, 대운의 팔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민 아빠의 뒤에서 미친 듯 고개를 젓고 있는 영민 엄마가 가을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는 걸 보고 가을은 영민 아빠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중단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영민 아빠가 저리 소리치는 걸 보니 더 이상 해를 끼치진 않겠지? 가을은 아무래도 영민 엄마의 비밀을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