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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정한 승자는 한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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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정한 승자는 한가을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리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나. 그랬으면 가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일이 엇나간 것엔 망할 사장이 개입한 것이 한몫했다.

“여보,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얘기해. 술 깨고 후회하지 말고. 여태 잘 참고 기다리다 왜 이래.”

영민 엄마가 필사적으로 남편을 끌어당겼다. 이때 대운이 나선 것이다. 가을의 평가대로라면 ‘쓸데없이.’

대운은 제 참견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영민 엄마가 가을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걸 분명히 봤다. 그 신호를 받은 가을이 마음을 바꿔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것도 알아차렸고.

“한가을과는 상관없는 일 같은데 두 분이서 해결하시죠.”

그래서 나선 것이다. 겉똑똑이 한가을이 제 앞가림을 못 하는 것 같아서. 물러터진 한가을이 저 죽는 줄 모르고 덮고 가려는 걸 터트리려고. 대운이 보기에 덮고 가서 피해를 보는 건 한가을뿐이니까.

“뭐야, 넌. 네가 뭔데 아까부터 끼어드는 거야.”

팔목의 통증을 잊은 듯 영민 아빠가 대운에게 덤볐다. 그때 대운은 결심했다. 한 대 맞아주자고. 그게 영민 아빠에겐 족쇄가 될 거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래서 대운은 영민 아빠를 도발했다.

“나? 당신이 소란 피우고 있는 이 사무실 사장. 당신이 못나서 속아 놓고 어디서 행패야. 당신이 이 모양이니 아들이 뭘 보고 배웠겠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운은 대낮에 별을 보는 경험을 했다. 왼쪽 턱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대를 얕보고 한 대 맞아주려던 게 실수였다. 영민 아빠는 몸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인 듯, 주먹이 매서웠다.

“사장님!”

“영민 아빠!”

대운은 제 턱을 살피려 달려드는 가을에게 손을 뻗어 막으며 소리쳤다.

“한가을, 경찰에 신고해. 이거 주거 침입에 폭행이야.”

순간 소란이 가라앉았다. 영민 아빠는 자기 행동에 놀란 듯 조용해졌다. 대운은 한 대 맞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해 공갈단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경찰에 갈까요, 여기서 얘기하시겠습니까?”

통증을 참으며 대운이 물었다. 영민 엄마가 미안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곧 털어놓을 모양이었다. 그녀를 동정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 얘기해 보자. 난 내 돈 받아야겠으니까. 불쌍한 고아라고 이제껏 봐줬더니 사람 뒤통수를 쳐? 그래, 해보자. 내 돈 내놔. 돈 받기 전까진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테니까.”

영민 아빠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영민 엄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제 그만 털어놓으시죠. 어차피 오래 숨기진 못할 겁니다.”

대운은 차가운 얼굴로 영민 엄마를 부추겼다. 딱 봐도 켕기는 게 있는 것은 그쪽이다.

그러면서 부모도 없이 살아 보겠다고 바동거리는 애를 자기 살자고 희생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대운에게서 따뜻한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아저씨, 집에 돌아가서 아줌마 얘기 들어보세요. 들어보시면…….”

“너도 여기 와서 앉아. 주제도 모르고 오지랖 부리지 말고.”

끼어들던 가을에게도 대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을은 영민 엄마를 앉히고 저도 그 옆에 앉았다.

“빌린 돈이 얼맙니까?”

모두 자리를 잡자 대운이 대화를 주도했다.

“왜 당신이 갚아주게? 한가을이랑 무슨 사인데? 한가을 애인이라도 돼?”

“아저씨, 말씀 삼가세요. 아저씨 지금 제 직장에서 행패 부리신 거예요.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뭐야? 내가 행패를 부렸다고? 그래 너 아주 잘났구나.”

영민 아빠가 금방이라도 가을을 낚아챌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진정해요. 가을아 미안하다. 이 양반, 지금 제정신 아니야. 영민이가 사고를 쳐서.”

“들었어요. 영민이가 아저씨 차 몰고 나갔다가 사고 낸 거.”

이 좁은 동네에선 소문이 빨리 퍼진다. 그러니 오래된 동네 주민들끼리는 서로에 관해 모르는 게 없다.

“그래, 들었겠지. 영민이와 겨울이가 한 반이니. 피해자가 합의를 안 해주려고 해. 그래서 이 양반이 속이 상해 낮술을 마시고는…….”

영민 엄마는 옆으로 돌아앉아 손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사고는 영민 어머니도 치신 거 아닙니까?”

얘기가 겉도는 걸 막으려고 대운이 추궁하자 영민 엄마가 펄쩍 뛰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가을을 봤다. 가을이 자기 비밀을 대운에게 말했는지 묻는 듯. 가을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대운의 말에 가을도 놀란 듯했다.

“한가을, 숙취 해소제 하나 가져와.”

동정을 받아야 하는 쪽은 오히려 영민 아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대운이 가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맞은편에 앉은 양반의 속이 많이 쓰리게 될 것 같았다. 거의 울 듯한 영민 엄마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을이 재빨리 숙취 해소제를 가져와 영민 아빠 앞에 놓았다.

“여, 여보, 내, 내가…….”

남편이 숙취 해소제 마시는 걸 보며 영민 엄마는 마음의 준비를 한 모양이다. 그녀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계를 들었는데…… 계주가 곗돈을 들고 날랐지 뭐야. 그래서…….”

“뭐야?”

영민 아빠가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그 돈을 메꾸려고 가을에게 빌려줬던 돈을 남편 모르게 받아 주식에 투자했더란다. 그 결과 투자한 돈 다 날리고 깡통 계좌만 남았단다.

대운은 흘긋 옆자리의 가을을 봤다. 이 난장판에서 가을의 역할이 뭔지 궁금해졌다.

“이, 이, 이 여편네가……!”

영민 아빠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둘렀다.

“아악, 여보!”

“아저씨!”

영민 엄마가 맞는 모습을 멀뚱히 보고만 있는 대운과 달리 가을은 빠르게 움직였다. 가을이 제 옆에 앉아 있던 영민 엄마의 몸을 감쌌다.

“넌 저리 비켜.”

영민 아빠가 가을의 목덜미를 잡아 던져버렸다. 대운이 손쓸 새도 없었다. 가을의 몸이 휙 날아갔다. 탁, 소리와 함께 가을의 몸이 책상 밑에 구겨져 내렸다. 책상에 머리를 부딪힌 듯했다.

“가을아!”

“한가을!”

의식을 잃기 전 가을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더니. 물진 않아도 던지긴 하네. 의식을 잃기 전 가을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 *

사장의 슈퍼카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가을은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눈 뜬 가을이 제일 먼저 본 건 기대운의 얼굴이었다. 사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장님.”

대운의 뒤에 쳐진 푸른 커튼을 보고 제가 깨어난 곳이 사무실이 아님을 알아차린 가을이 입을 열었다. 목이 잠겨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 깼어? 잠깐 기다려. 의사 불러올게.”

대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튼 밖으로 나갔다. 그 핑계로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홧홧했다.

‘우진아, 미안해. 미안해, 우진아.’

의식이 없는 중에도 가을은 우진을 찾았다.

“우진일 정리하긴, 개뿔.”

대운의 입술이 뒤틀렸다.

가을은 가을대로 휙 나가버린 대운에게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부하 직원이 죽다 살았는데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깨어나서 다행이다.’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아니면, ‘너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으려 했…….’ 어 이건 너무 나갔나?

그러는 동안 정신을 잃기 전 있었던 일들이 빠짐없이 기억났다.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던 사장의 목소리도. 그러고 보니 의식을 차린 후 처음 본 사장의 얼굴이 비장해 보였던 것도 같다. 그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깊어 보였고. 이건 그냥 느낌적인, 느낌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잠시 후, 대운이 의사와 함께 왔다.

“다행히 골절이나 뇌출혈은 없습니다. 찢어진 곳은 꿰맸으니…….”

의사가 CT 촬영 결과를 보며 말했다.

“그럼 퇴원해도 되죠?”

가을이 불쑥 물었다. 큰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치료비 걱정이 앞섰다.

“안 됩니다.”

냉정한 의사의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지금은 상태가 좋은 것 같아도 나중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경과를 지켜 봐야 하니 오늘 하루는 입원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멀쩡해요.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병원에 올게요. 저희 집 여기서 가까워요.”

사정 모르고 끼어드는 대운의 말을 가을이 서둘러 막았다. 가을은 입원할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과외도 가야 했다. 횟수대로 돈을 받으니 한 번 빠지면 그만큼 돈 받는 날짜가 미뤄진다.

꽉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돈 갚을 날짜에 맞춰 돈이 들어와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겐 한가하게 아파 누울 여유가 없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갑자기 두통이나 구토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의식을 잃을 수도 있고요.”

“입원하겠습니다.”

제 뜻과 반대되는 대답을 하는 대운의 팔을 가을이 꽉 꼬집었다. 그냥 잡으려고만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정도 모르면서 나서긴,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아무래도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운은 꼬집힌 강도만큼이나 단호하게 말했다.

완강한 대운의 모습에 가을은 어쩔 도리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입원실로 옮기고 나니 의사 말대로 두통이 생겼다. 치료비에 입원비까지 들게 생겼으니 없던 두통도 생길 수밖에. 오늘 날린 과외비는 어떻고.

“사장님.”

“너 나 모르게 주식 투자했다며?”

왜 물색없이 나섰냐고, 왜 쓸데없는 돈을 쓰게 하냐고 따지려는데 사장이 훅 치고 들어온다. 다 들었군. 가을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내가 하는 거 훔쳐보고 따라 했다며?”

“아, 머리야. 왜 이리 머리가 아프지?”

가을은 사장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꿰맨 자리가 욱신거리는 듯하다. 진통제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다. 가을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볼 일이다.

“영민 엄마가 주식으로 날린 돈 찾아준다고 했다며?”

끈질긴 놈. 냉정한 놈. 머리를 열다섯 바늘이나 꿰매고 입원한 환자에게 지금 그걸 따져야 해?

“넌 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거냐? 무슨 배짱으로 영민 엄마를 부추겨 주식 투자를 하게 한 거야? 너 ‘주린이’잖아. 주식의 ‘주’ 자도 모르는 주, 린, 이.”

눈을 감고 누웠는데도 대운의 추궁은 끝나지 않았다. 가을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고 대답했다.

“제가 부추긴 거 아니에요. 아줌마가 제게 받아 간 돈 주식으로 다 날렸으니 아저씨에겐 아직 돈을 안 갚은 거로 해달라고 했어요. 아줌마가 그 돈 메꿀 때까지만요. 아저씨가 알면 아줌마를 죽일 거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주식으로 돈을 날린 사람에게 또 주식을 권해? 넌 대체…….”

“그럼 어떡해요. 아저씨 손에 죽는다는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잖아요. 아줌마가 무슨 수로 그 돈을 벌어요.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걸 훔쳐보고 따라 했다?”

“훔쳐보긴요. 사장님이 종일 컴퓨터를 켜 놓으시니까 저절로 보게 된 거죠. 사장님이 하는 대로 따라 하니까 돈이 벌리더라고요. 사장님 운 좋으시잖아요.”

운이 좋다고? 내가? 대운은 기가 막혀 가을을 내려다봤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무실에서 증권사 사이트를 들락거린 게 화근이었다.

“너도 했어?”

영민 엄마에게만 주식 투자하라고 부추긴 게 아닐 것이다.

“그럼 돈 벌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놓쳐요?”

가을의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강적이군. 대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나는 자신의 등에 업혀 가는 가을이 진정한 승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