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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베네치아.

가짜 연애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물의 도시,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북동부, 베네토 주에 위치한 118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 베네치아.

베네치아의 중심지라 불리는 산 마르코 광장엔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카페 플로리안이 있다.

풍기 문란죄로 프리지오니 누오베 감옥에 갇혔던 카사노바가 탈옥에 성공한 후 제일 먼저 들렀다던 카페답게 카페 안팎은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시헌은 카페 플로리안의 허름한 외벽 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외벽에 등을 기대었다.

길게 뻗은 다리와 너른 어깨 때문인지 근처를 지나던 관광객들이 한 번씩은 그를 돌아보았다.

클래식한 진회색 재킷 위로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탄탄한 체격과 굵직한 목선이 먼저 이목을 끌었다. 자연스럽게 짙은 눈썹과 또렷한 눈매로 향한 시선은 곧은 콧날 아래로 강직하게 다문 붉은 입술로 이어졌다.

낮게 스며든 석양을 머금어 수려하게 빛나는 그의 피부 결에 몇몇 사람들은 발걸음까지 늦춰가며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그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시선이 밀려들었다.

한국에서도 줄곧 겪어온 일이었기에 시헌은 짙은 계피 향이 감도는 카푸치노를 한입 머금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쓸 만한 인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자기네 회사가 다른 회사에 넘어갈 때까지 두고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 하나같이 썩은 머리에 안일한 태도였으니 자기 회사가 이런 헐값에 다른 회사로 넘어가게 둔 겁니다. 그런 인간들, 계속 데리고 가봐야 똑같아요. 그냥 이참에 싹 정리하고 유능한 직원으로 새로 채용하는 게 낫습니다.

대학 후배인 장우에게 전달받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 시헌은 호박색 액체가 담긴 온더록스 잔을 빙글, 돌리며 그의 부친이자 차한 라이프 그룹 회장인 차현섭 회장과 통화를 하고 있다.

이미 몇 번 봤는데도 못마땅한 듯 그의 반듯한 미간 사이에 잘게 주름이 졌다.

누군가가 몰래 찍은 이 영상은 보기 좋게 편집되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차한 라이프 그룹 회장 아들, 차시헌. 차한 미디어의 상무이사로 부임 후 첫 성과 내나 했더니 막말 논란.]

[OTT 분야로 첫걸음을 내딛던 차한 미디어, 이대로 주저앉나.]

[단비 미디어 인수합병 후 대규모 정리해고. 알고 보니 진짜 이유는 ‘무능한 직원들’]

단비 미디어를 인수해 OTT 사업에 손을 뻗으려 했던 시헌은 막말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상무 자리를 내려놓아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어디든 가서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거라. 그리고 다음 주부터 H 텔레콤 고객센터 대표로 출근해. 잠잠해지면 다시 차한 미디어로 불러들여 줄 테니.]

명령과도 같은 제 부친의 말에 시헌은 곧장 베네치아로 향했다.

‘해고당한 직원들이 요구하는 공식 사과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좌천이라니…….’

그에겐 좌천과도 같은 이번 발령은 분명 제 모친인 강유경 여사의 계략일 거라 생각했다.

시헌은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유경은 늘 그 점을 못마땅해했다.

차한 그룹의 초대 회장이었던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자라느라 사과를 하는 법을 모른다며 늘 못 미더워하던 차에 이런 일이 터졌다.

해고 사유에 부당함을 주장하는 직원들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시헌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시헌은 납득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무능했고 결국 회사를 빼앗겼다.

제 말에 막말, 갑질 따위를 붙여 구질구질하게 여론을 선동하는 수작 역시 비열했다.

사과하지 않겠다는 시헌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차 회장은 적절한 보상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시헌을 상무직에서 물러나게 함으로써 성난 직원들을 달래주기로 한 것이다.

단지 공개 사과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무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화가 치미는데 그의 모친 강유경은 더욱 어이없는 제안을 꺼내 들었었다.

바로 유경이 운영하는 H 텔레콤의 자회사인 H 텔레콤 고객센터 대표 자리에 자신을 앉히겠다는 것.

시헌은 눈을 질끈 감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산 마르코 성당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귓가로 파고든다. 경건하기도 하고 청량하기도 한 오묘한 울림이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돈하는 느낌이다.

점점 기울어가는 해그늘을 따라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칼을 스쳤다.

종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민하고 시름해봐야 달라질 건 없다.

어쨌거나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생각이니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즐기자.

어디, 결국엔 누가 이기는지 두고 봅시다.

입안으로 이를 살짝 악물었다 놓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해가 더 기울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 와인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서머타임이 끝난 11월의 베네치아는 아직 4시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소이는 리알토 다리에서 보는 석양을 즐기기 위해 천천히 다리로 향했다.

우아한 아치형 포르티코로 연결된 리알토 다리 양쪽엔 석조 상점과 판매대들이 늘어서 있다.

양쪽 판매대의 바깥쪽엔 베네치아를 가로지르는 대운하의 풍경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도록 좁다란 길이 나 있다.

소이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난간을 따라 판매대 바깥쪽 다리의 가장 가운데 부분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난간을 따라 쭉 늘어선 관광객들 사이에 서서 베네치아의 전경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베네치아는 로마가 가진 웅장함과 피사의 차분함, 피렌체의 우아함을 모두 품고 있었다.

“역시, 그래도 오길 잘했어.”

낮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함께 오기로 했던 남자친구는 여행을 열흘 앞두고 다른 여자가 좋아졌다며 당당하게 등을 돌렸다.

‘아담하고 귀여운 맛은 있는데 애가 영 색기가 없어. 먼저 교태도 좀 부리고 안겨드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던 길, 문득 그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샀던 넥타이핀이 생각났다.

그래도 선물은 주고 돌아서려고 곧바로 영현을 따라나섰던 때 누군가와 통화하던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좀 전에 헤어졌어. 무슨 애가 다른 여자 생겼다고 말하는데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고개를 끄덕여. 이러니 내가 만날 맛이 났겠냐고.’

소이가 1층 카페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했었기에, 그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이미 몇 차례 들어본 이별 사유였다.

‘나 혼자 너 좋아하고 안달 나는 것 같아서 힘들어.’

‘헤어지자. 너 만나는 게 재미가 없어졌어.’

성인이 된 후 몇 차례 만나봤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소이가 반응이 없다며 지친다는 듯 이별을 고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점점 끝이 보이던 만남이었다.

대화는 줄고 바쁘다는 핑계는 늘어갔다.

식어버린 눈빛과 무심한 목소리는 진작부터 이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여자가 좋아졌다는 그의 말에 제법 덤덤했다.

오히려 1년의 연애가 드디어 끝을 보였던 그 시점에, 다른 고민이 슬픔을 앞지를 정도였다.

‘함께 가기로 했던 이탈리아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나…….’

영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 후 소이는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핀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그 순간에도 소이의 머릿속엔 여행을 갈지 말지 고민이 앞섰다.

짧게 고민을 끝낸 소이는 취소 수수료를 핑계로 혼자라도 다녀오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여행은 꽤 만족스러웠다.

날씨도 딱 적당하고 마음도 딱 좋았다. 생각보다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고 홀가분했다.

‘아담하고 귀여운 맛은 있는데 애가 영 색기가 없어. 먼저 교태도 좀 부리고 안겨드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다만, 누군가와 통화하던 영현의 그 말이 여행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색기……. 그게 도대체 뭐라고…….’

다시금 떠오른 그날 그의 목소리에 한껏 맑아졌던 기분 위로 컴컴하게 그늘이 드리웠다.

소이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떨쳐내자. 그러려고 혼자라도 여행을 온 거니까.’

금세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비워내며 다시 석양으로 시선을 던졌다.

낯선 공기와 낯선 풍경은 생각보다 빨리 잡념을 밀어냈다.

이래서 사람들은 힘들고 우울할 때 여행을 떠나는 걸까.

소이는 난간에 기대어 운하를 바라보며 피식 쓴웃음을 흘려보냈다.

“벌써 해가 지고 있네……. 예쁘다.”

점점 해가 기울어 어둑어둑해지는 노을을 보며 소이가 중얼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베네치아의 석양은 마음 어딘가 찜찜하게 남아 있던 영현과의 이별을 말끔하게 지워주었다.

황금 가루를 뿌려놓은 듯 아름답게 빛나는 운하 위로 붉은 석양이 타들어가고 있다.

고요하게 저물어가는 석양을 뒤로하고 곤돌라와 수상택시가 쉴 새 없이 다리 밑을 지나면 다리 위에 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었다.

수려한 목소리로 칸초네를 부르며 노를 젓는 곤돌리에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활짝 웃어준다.

한 편의 영화처럼 낭만적인 장면이었다.

한참을 서서 노을을 바라보던 때, 어느새 파스스 타들어간 저녁노을과 함께 어둑어둑해진 운하 양쪽으로 하나둘 상점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까맣게 잠들어가는 물빛 위로 하나둘, 떠오르는 베네치아의 빛은 눈에 다 담아가기에 벅찰 만큼 아름다웠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픈 맘에 난간을 밟고 올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던 때였다.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옆에 선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