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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할 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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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할 말 있어요?

‘차시헌이다.’

소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 떴다.

차한 그룹 회장이 끔찍하게 아낀다는 막내 손자이자, 차한 라이프 그룹 회장의 막내아들.

얼마 전, 그의 막말 동영상이 떠도는 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소이가 근무하는 H 텔레콤 본사 대표이사인 강유경 사장의 아들이기도 하기에 회사 내에서도 한바탕 소란이었다.

막말은 모르겠고 진짜 잘생겼다며 여직원들은 동영상을 캡처해 개인 소장을 할 정도였다.

그런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실물로 보게 되다니.

마치 연예인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를 해야 하지? 능력이 없어서 회사에서 자른 것뿐인데. 그게 왜 사과할 일인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선명하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마치 조각을 빚어놓은 듯 완벽하다고 생각하던 때,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나갔다.

싸늘한 표정으로 멀리 석양을 응시하던 그는 천천히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한국 시각으론 지금 밤 열두 시가 이미 넘은 시간일 텐데, 누나야말로 정신 좀 차리고 얼른 집에 들어가지 그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누군가와의 통화가 꽤 불쾌했는지 눈썹을 살짝 구기며 전화를 끊었다. 무심하게 돌아보던 중 소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이는 마치 몰래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와, 진짜 잘생겼다…….’

주책맞게 가슴도 콩콩 뛰어댔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로 핸드폰을 집어넣더니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멀리 운하 끄트머리로 무감한 시선을 던졌다.

소이는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저녁 빛에 그의 눈동자가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날렵한 턱선 아래로 힘줄이 잘게 솟은 목선이 옅은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져 보였다.

아무리 봐도 시선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는 얼굴이다.

‘이별 여행이랍시고 혼자 와서 온갖 궁상은 다 떨어놓고, 낯선 남자를 보며 두근거리는 건 또 뭐야.’

소이는 가까스로 시헌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낮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저 얼굴만 잠시 바라본 것뿐인데 도무지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다.

해가 저물어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어두워 붉어진 귓불과 두 뺨이 보이지 않을 테니 흩날리는 바람결에 긴 생머리를 목뒤로 쓸어 넘긴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서늘하게 뺨을 스치는 저녁 바람을 차분하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크게 심호흡했다.

지난 연애의 부스러기는 모두 다 비워내고 이 두근거리는 감각만 기억하기로 했다.

부디 다음번의 연애에선 지금 느끼는 이런 설렘이 가득할 수 있기를.

어느새 시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지만, 소이는 달아오른 두 뺨을 식히느라 한참을 더 다리 위에 머물러야 했다.

***

그리비티 팰릭스 호텔은 베네치아에서 꽤 고가의 호텔에 속한다.

소이는 영현과 헤어진 후 이탈리아 여정의 마지막인 베네치아에서의 호텔을 취소하고 그리비티 팰릭스 호텔로 다시 예약했다.

스탠다드 룸이 1박에 무려 100만 원에 달하지만,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호텔의 가장 꼭대기 층에 위치한 라운지 바에서 만끽할 수 있다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의 야경과 베네치아의 물빛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우연히 사진으로 마주했던 그 풍경은 평소에도 야경을 좋아하던 소이에겐 거부하기 힘든 전경이었다.

소이는 부푼 기대를 안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베네치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호텔이라더니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화려한 조명, 우아한 실내 장식까지.

역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묵었던 호텔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호화스럽고 럭셔리한 호텔이었다.

웰컴 라운지 가운데 놓인 화려하고 커다란 테이블 위엔 웰컴 쿠키와 웰컴 브레드가 종류별로 고급스럽게 담겨 있었다.

라운지 정면 벽에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지도자였던 안드레아 그리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단 한 번도 범접해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취한 듯 호텔을 둘러보던 소이는 곧바로 체크인하고 객실로 향했다.

“너무 야한가……?”

샤워를 마친 후 소이는 한국에서 사 온 검은색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과감하게 구매했던 원피스였다.

어깨와 가슴 부분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도 민망한데 길이는 또 왜 이렇게 짧은지.

빈틈 하나 없이 몸에 딱 붙는 바람에 가뜩이나 잘록한 허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던 그녀는 드디어 결심한 듯 준비해 온 스틸레토 힐을 갈아 신고 크게 심호흡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섹시하지!”

소이는 도톰한 입술 위로 자주색 립스틱을 살짝 덧바른 후 허리를 바로 세웠다.

더는 영현이 했던 말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 입어보지 않았던 스타일의 옷이라 어색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곧은 걸음걸이로 라운지로 향했다.

***

룸으로 들어온 시헌은 샤워한 후 룸서비스로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하얀 면티 위에 짙은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감색 슬랙스를 입은 뒤 룸을 나섰다. 라운지 바에서 간단하게 와인을 한잔 마실 생각이었다.

“Monfortino 13, per favore.”

베네치아에 오면 종종 마시곤 했던 몬 포르티노 13 와인을 주문하며 바에 앉았다.

포도가 좋은 해에만 만든다는 와인답게 붉게 잘 익었을 포도의 깊은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는 게 좋았다.

포도를 껍질째 씹는 듯 상큼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겉도는 맛 하나 없이 깊게 감도는 짙은 질감을 느끼며 바 체어 등받이로 몸을 기대던 때, 바의 외부로 이어진 테라스로 다가서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살짝 불어온 밤바람에 길게 늘어트린 긴 생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로 살랑이며 흘러내렸다.

여자는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에 적당한 볼륨감이 잘 드러나 보이도록 타이트한 검정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돈하며 살짝 고개를 돌린 옆모습에 조금 전 리알토 다리에서 마주쳤던 여자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제 누나인 차시연과 통화를 마치며 무심하게 던진 시선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 혼자 두 뺨을 붉혀가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

말간 피부와 동그란 두 눈이 꽤 청아한 인상이었던 것 같았다. 동양인인 듯 짙고 풍성한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자 목 위로 이어진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보였다.

잠깐이었지만 제 옆에 서서 힐끔거리며 저를 바라보더니 어느새 두 뺨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던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이란 생각도 잠시, 그녀는 눈을 스르륵 감으며 저녁 바람을 맞이했다.

다리 난간을 살짝 부여잡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로 하얀 달빛이 스며 투명하게 빛났다.

‘저렇게 입으니까 느낌이 색다르네.’

라운드 티셔츠 위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청바지를 입고 있던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리알토 다리에서 보았던 모습이 한여름에 청아하게 피어난 물망초 같은 느낌이었다면, 타이트한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금의 모습은 빨간 튤립 같았다.

지나치게 관능적이지도 않으면서 매혹적인 싱그러움이 눈길을 끈다.

한국 여자 같은데.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고.

저런 차림으로 이 시간에 혼자 라운지 바에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진 알고 온 걸까.

바람결에 흩날리는 그녀의 긴 생머리가 어깨 뒤로 넘어가며 새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살결이 청초하게 빛났다.

한참 동안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바라보던 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바 내부로 들어섰다.

약지와 중지 사이로 와인 잔의 베이스를 누른 채 천천히 원을 그리며 여자를 계속 바라보던 때, 그녀와 눈길이 닿았다.

그를 알아본 건지 잠시 멈칫하던 여자가 경직된 발걸음을 옮겨 시헌이 앉은 쪽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

조금 전, 소이는 드디어 그리비티 팰릭스 호텔에서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라운지 바로 들어섰다.

길게 이어진 바 옆에, 야외로 향하는 테라스가 보였다. 우선 베네치아의 야경을 감상하고픈 마음에 테라스로 다가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제법 한산해진 운하 건너편으로 고아한 빛을 내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바로 보였다.

반짝거리며 흘러가는 운하 위로 은은하게 달빛이 물든 모습에 저도 모르게 옅은 탄성도 내뱉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황홀한 기분이 가득 차올랐다.

어깨 위를 스치는 밤바람에 머릿결을 내맡긴 채 한참 동안 눈앞의 전경을 만끽했다.

‘하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

만족스럽게 운하를 내려다보던 소이는 칵테일을 한잔 마시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려 라운지로 들어섰다.

선선한 날씨 때문인지 테라스와 연결된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소이는 야경을 보겠다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던 라운지 내부를 천천히 돌아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과 진회색의 대리석으로 이어진 벽면이 베네치아 특유의 고풍스러운 멋을 한껏 드러내주고 있었다.

체리 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테이블과 붉은색 소파가 군데군데 놓여 있고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라운지 안을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흐르는 라운지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바 쪽으로 다가서던 순간, 와인 잔을 빙글 돌리고 있던 시헌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호텔이었어……?’

심장이 또 콩콩 뛰었다.

‘옆에 앉아볼까?’

잠시 머뭇거리던 소이가 용기를 냈다. 어차피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다신 볼 일이 없을 테니 가까이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단 생각에 그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Martini, please.”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한 잔 주문하고 다시 시헌을 힐끔 바라보았다. 언제 시선을 거두었는지, 그는 손에 든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와인 잔을 들어 살짝 입을 축였다.

‘다시 봐도 잘생겼네.’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려던 때, 시헌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