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겨서요.
잘생겨서요.
“네……?”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놀랐는지, 소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길래. 나한테 할 말 있나 했죠.”
그는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생겨서요.”
뭐에 홀린 듯, 소이가 답했다.
평소였으면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 못했겠지만 두 번 다신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시헌은 그제야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소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직접 마주한 그의 검은 두 눈동자에 숨이 멎을 뻔했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그의 눈매는 까만 선으로 꼼꼼하게 그려놓은 만화 속 캐릭터의 눈처럼 짙고 선명했다.
“예뻐요, 그쪽도.”
“그런 말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칭찬은 고마워요.”
대담하게 내뱉은 목소리와 달리, 바 위에 살짝 걸쳐놓은 소이의 손끝엔 진땀이 맺혔다.
조각 같은 옆모습에 홀려 이미 혼이 반쯤 나갔는데 그는 또렷한 발음에 목소리까지 완벽했다.
“오해할 뻔했어요.”
“오해라뇨?”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내 옆에 앉아서 날 계속 쳐다보길래. 다른 뜻이라도 있는 건 줄 알았지.”
진심인 듯, 아닌 듯. 그의 입꼬리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오해가…… 아니면요?”
아무래도 뭐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말을 내뱉은 후였다.
심장이 쿵쿵 정신없이 울린다.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고 나면 다시 볼 일 없을 테니까.
“괜찮겠어요?”
시헌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런 차림으로 여기서 남자들을 쳐다보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아는 거냐고 돌려 말했는데, 오해가 아니라고 답하며 눈동자를 파르르 떤다.
무슨 대단한 결심까지 했다고 주먹에 힘은 꽉 주는지, 더 놀려보고 싶어졌다.
“난 한 번으로 안 끝내는데.”
시헌이 천천히 바 체어 등받이로 몸을 기대었다.
“상관없어요.”
여자는 꽤 담담한 목소리로 태연한 척 답했다. 어디까지 가려는지 궁금해지려던 차, 여자의 뒤쪽으로 모자를 눌러 쓴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여기까지 따라붙었나 보군.’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부터 누군가 따라붙었다는 걸 눈치챘었다.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아무나 출입이 가능한 라운지라 찜찜하긴 했지만 와인이나 마시다 들어갈 생각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더니 아까부터 불쾌한 시선 하나가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검지로 톡톡, 바를 몇 번 두드리던 시헌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더 시간 끌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덜컥, 소이의 심장이 세게 흔들렸다. 정말 수락할 줄이야.
대화가 끊길까 봐 아무 말이나 내뱉었는데 그는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미쳤어! 미쳤나 봐!’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말할까.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머릿속이 미친 듯 요동치는데도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대로 그를 따라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혼연한 척 그를 따랐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차시헌과 원나잇이라니.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짙은 밤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금색 테두리가 그려진 웅장한 스위트 룸 앞에 선 그가 도어록에 객실 키를 태그했다.
띠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능숙하게 벽에 달린 키태그에 카드 키를 꽂더니 곧바로 소이에게 몸을 돌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내린 그의 입술이 소이의 입술 위로 망설임 없이 맞물렸다.
“자, 잠시만…….”
마음의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씻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다음…….
하나하나 순서대로 진행해 나갈 생각이었기에 지금의 소이는 무방비 상태였다.
“거두절미를 좋아하는 편이라.”
밀어붙이듯, 소이와 함께 어느새 거실까지 다다른 시헌이 카디건을 벗어던졌다.
“그래도 씻고…….”
더운 숨을 색색거리며 씻겠단 말을 하려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거칠게 집어삼켰다.
바짝 긴장한 채 굳어버린 소이의 온몸이 불처럼 뜨겁다.
어디까지 센 척하려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곧바로 티가 났다.
자신 있게 오해가 아니라더니 고작 키스만으로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앗!”
한 발자국씩 밀려나며 침실까지 언제 가겠느냐 싶어 소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느새 소이를 침대 위에 눕힌 시헌이 양팔로 몸을 지탱하며 소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건이 하나 있는데.”
“조건이라뇨?”
“오해가 아니었다며. 그럼 작정하고 나에게 접근한 거였나?”
작정하고 접근한 건 아니지만,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소이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나랑 한 달만 연애해요. 가짜로.”
여전히 위에서 소이를 내려보는 자세로, 그가 말했다.
한 달만 연애하자는 건 무슨 소리고, 또 가짜로 연애를 하자는 건 무슨 소리인지.
시헌의 아래 누운 채 소이는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한국 돌아가고 나서도…….”
시헌이 묘하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한 달만 나랑 사귀는 척해달라고.”
닿을 듯 말 듯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느른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내 조건을 수락하면……. 그쪽 꼬임에 넘어가 주고.”
이제 와 그와의 달콤한 밤을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미 달아오른 소이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하게 뛰어댔다.
“어때요?”
시헌의 입술이 소이의 입술 위로 겹칠 듯 가까워졌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보내주고.”
시헌의 까만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소이를 집어삼킬 듯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좋아요.”
이미 이성은 하얗게 바스러진 상태였다. 그의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따져볼 여유 따윈 없었다.
소이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시헌이 짧게 웃었다.
스르륵, 소이의 눈이 감기며 시헌의 고개가 다시 한번 소이의 얼굴 위로 겹쳤다.
탄탄한 그의 어깨 위로 뻗은 소이의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순식간에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고작 키스 하나에도 자꾸만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숨은 좀 쉬고.”
고맙게도 그가 먼저 숨 쉴 타이밍을 알렸다. 들숨과 날숨이 제멋대로 엉키는 탓에 가슴이 엉망으로 들썩거리던 때, 그가 다시 입을 맞췄다.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대론 숨이 멎을 것 같단 생각에 몇 번이나 아찔해졌지만, 다행히도 그는 딱 정신을 놓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몰아붙였다.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다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긴 밤이 다 가도록 소이는 잠들 수 없었다. 샤워하면서도, 샤워를 마친 후에도 소이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새하얀 커튼 사이로 어스름한 새벽녘이 스며들던 때쯤에야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지이잉.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시헌이 잠에서 깼다. 소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객실 안엔 베네치아의 오후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다.
- 형, 이 여자 누구예요?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장우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여자?”
- 지금 메시지 보냈어요, 봐요.
시헌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낸 후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젯밤 라운지에서부터 누군가 따라붙는 느낌이 든다 했더니, 역시 그의 예상이 맞았다.
장우가 보낸 메시지 속 기사에는 검은색 튜브톱 원피스를 입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 객실로 따라 들어서는 여자와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다.
“애인.”
시헌이 건조하게 대답을 내뱉자 장우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 네?! 뭐라고요?!
“그건 그렇고,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서며 물었다.
- 아! 바에 연락해봤는데 그날 거기 바에 있던 사람은 형이랑 저밖에 없었대요.
“CCTV도 다 확인한 거고?”
- 네. 아예 그날 다녀간 사람 연락처를 싹 구해볼까요?
답답하다는 듯 내쉰 시헌의 한숨 소리가 수화기를 넘어갔다.
“됐고. 우리 어머니는 뭐라셔.”
- 뭐라 하시긴요. 그대로시죠.
“기어이 나를 그리 보내시겠다고.”
시헌이 낮게 실소를 뱉어냈다.
-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형. 그래도 제가 같이 가잖아요, 형 비서로.
옅은 한숨과 함께 건너온 장우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했다.
허장우.
시헌의 대학 후배인 그는 대학 시절 어머니의 후원을 받아 공부를 마쳤었다. 이후 그에 보답한다며 어머니가 운영하는 H 텔레콤에 입사했고 지금은 본사 비서팀 소속 비서이다.
“그래. 내가 거기서 속 터져 죽을 것 같으면 나랑 같이 순장도 하자.”
-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요. 그것보다 갑자기 애인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전적 의미 그대로니까 뜻이 궁금한 거면 사전 찾아보고.”
시헌은 피식 웃으며 장우의 전화를 끊었다.
그때, 시헌의 누나인 차시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자마자 시연의 앙칼진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 너 그 여자 누구야!
시연 역시 기사를 확인한 듯했다.
- 너 진짜 엄마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아들이 연애를 좀 한다고 해서 정신까지 놓으실 분은 아닐 텐데.”
- 뭐? 하아……. 너 혹시 반항하는 거니?
미니바로 다가선 시헌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목 스트레칭을 하며 무심하게 답했다.
“반항이라니. 그저 연애를 좀 하겠다는 것뿐인데.”
- 말이 안 되잖아! 네가 고작 그런 여자를 만난다는 것부터가!
“첫눈에 반했나 보지.”
- 그래, 잠깐 네가 눈이 돌았다고 쳐. 그래도 연애와 관련된 사항은 우리 가족들과 먼저 상의한 후 외부에 알리기로 한 거, 잊었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누나도 알다시피 내가 고의로 외부에 알린 게 아니라서.”
- 차시헌! 너 진짜!
약이 바싹 오른 듯 시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 내가 널 몰라? 네가 그 정도도 예상 못 하고 여자를 만나고 다닐 애가 아니란 걸 내가 모르겠냐고! 해고된 직원들은 속이 상해서 잠도 못 자는데 너는 럭셔리 호텔에서 호화롭게 데이트를 즐긴다는 기사, 못 봤어?
“그만큼 여자한테 눈이 멀었나 보지, 내가.”
미니바에서 물을 하나 집어 든 시헌이 창가로 다가섰다.
- 후, 그건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고. 지금 차한 라이프 홍보팀에서 최대한 빨리 기사를 다 내리도록…….
“아니, 내리지 마.”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 마시던 시헌이 시연의 말을 자르며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 뭐라고?
“기사, 내리지 말라고.”
낮게 내리 깐 그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가뜩이나 말없이 사라진 게 괘씸했다.
연락처도, 메모 한 장도 남긴 것 없이 그녀는 사라졌다.
한 달짜리 가짜 연애를 담보로 잠자리를 가져놓고는.
- 그게 무슨 소리야!
“내 허락 없이 기사 내리면.”
시헌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식으로 교제설 기사 내보낼 거야.”
말을 마친 시헌이 전화를 끊으며 창가로 다가섰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운하를 내려다보는 시헌의 눈매가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